장례식장에서 망자 위해 트럼펫 연주하는 박정수씨
낮에는 자동차 정비사로 일하는 기악과 출신의 밴드

영결식과 발인제로 망자와 유족들이 이승과 저승을 달리하는 청주병원 장례식장에서는 이른 아침마다 구슬프면서도 청아한 트럼펫 소리가 울려퍼진다. 두 달 전부터 검정색 양복에 검은 넥타이를 맨 30대 청년이 장례식장 마당 한 구석에서 눈물의 진혼곡을 연주하는 것이다.

   
대개 해가 중천에 오르기 전에 하관을 하는 풍습 때문에 자칫 부산스러울 수 있는 발인제 현장에 일순간 고요한 침묵이 흐르고 마침내 침묵이 숨죽인 흐느낌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트럼펫을 연주하는 주인공은 박정수(36)씨. 직업을 물어보니 뜻밖에도 6년의 경력을 지닌 자동차 정비사다. 지금은 청주시 복대동에 있는 정비공장에서 일하지만 앞으로 자신이 직접 정비업소를 운영하겠다는 뜻을 지닌 결혼을 얼마 앞둔 청년이었다.

트럼펫 연주는 차별화된 서비스
20여년 전부터 장기간 임대 운영돼 온 청주병원 영안실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공동화 현상을 빚고 있는 시청 주변의 칙칙한 분위기와 맞물려 눈길을 주기에 꺼려지는 장소였다.

그러다가 5년 전부터 청주병원이 직영하게 되면서 내부 인테리어를 완전히 바꿨고 지금도 시설 및 서비스에 대한 개선작업이 진행 중이다. 트럼펫으로 진혼곡을 연주하는 것도 일종의 서비스 개선차원에서 시도되고 있는 것이다.

이 병원 조임호(69) 이사장이 영결식과 발인제 현장을 경건하고 엄숙하게 만들 수 있도록 아이디어를 낼 것을 실무진에게 지시했고, 처음에는 오디오시설을 이용해 진혼곡을 틀어주려다 라이브 연주로 방향을 튼 것이다.

라이브 연주는 장례식장 조원익(40)의전팀장이 친구와 대화를 나누다 외국영화의 장례식 장면을 떠올려 이루어진 것이다. 결국 이른 새벽에 장례식장에 나와 트럼펫을 연주할 사람을 수소문하다가 정비사로 일하며 민간 밴드의 트럼펫 주자로 활동 중인 박정수씨를 섭외하기에 이른 것이다. 박씨에게 있어 트럼펫 연주는 부업거리인 셈이다. 그러나 ‘보도를 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 일당을 물어보아도 박씨는 끝내 수입을 공개하지 않았다.

기악과 전공의 자동차 정비사
박씨는 6년째 자동차 정비를 하며 정비업소 경영을 꿈꾸고 있지만 트럼펫 연주에 있어서도 프로 아닌 프로의 경력을 지니고 있다. 대전고등학교에서 밴드부로 활동한 경력을 바탕으로 서원대학교 기악과(89학번)를 졸업한 뒤 4년 전부터 사회인 밴드인 ‘청풍명월 빅밴드’에서 트럼펫 주자로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청풍명월 빅밴드는 단장인 이종완(52·남경건설 대표)씨를 비롯해 의사, 자동차 정비공, 자영업자 등 다양한 직업군의 연주자 30여명이 매주 1~2차례 청주시 율량동 청주여고 인근 연습실에 모여 연습을 하며 1년에 2차례 정기연주회를 여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아마추어 밴드다.

악단의 구성은 관악기와 키보드, 기타 등 전자악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오는 8월 제주도에서 열리는 국제관악제에도 초청될 만큼 아마추어 밴드로는 실력을 인정받았다. 박씨는 자동차를 좋아해 생계수단으로 정비사의 길을 걷고 있지만 음악의 꿈 역시 마음의 서랍 속에 고이 간직 하고 있는 셈이다.

‘새처럼 자유롭게’ 편히 가시라
연주 분량이 길지 않은 3~4곡을 연주하는 것이지만 박씨의 하루는 보통 새벽 4시30분에 시작된다. 장지가 먼 경우에는 새벽 6시를 전후해 발인이 이뤄지고 돌발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1시간 전부터 대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쉬는 날은 발인이 없는 날로 매주 1~2차례에 불과하고 하루 아침에도 여러 건이 잡힌 날이 있어 후배 연주자인 강성원(33)씨가 거들기도 한다.

연주곡은 찬송가인 ‘내 주를 가까이’를 시작으로, ‘애니 로리’, ‘새처럼 자유롭게’, 천주교 의식곡인 ‘오늘 이 세상 떠난’ 등이다. 찬송가인 ‘내 주를 가까이’는 ‘영화 타이타닉’의 마지막 장면에서 배가 침몰하는 순간에 선상 관현악단이 연주하던 곡으로 기독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귀에 익은 멜로디로 이루어져 있다. ‘새처럼 자유롭게’ 역시 현충일 등 각종 추모행사에서 항상 연주되는 곡으로 누구나 한 소절만 들으면 콧노래로 따라 흥얼거릴 수 있는 곡이다.

박씨는 “종교가 기독교이다 보니 찬송가 중심으로 곡이 선정됐는데, 앞으로 레파토리를 다양화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피드백 없는 연주, 그래도 보람
연주는 장례식장에서 영결식을 치를 때 첫 곡을 연주하는 것으로 시작돼 운구 과정, 운구차가 장례식장을 떠나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현장의 분위기는 무심코 지나가던 사람이 들어도 눈물이 맺힐 정도.

박씨는 “이 세상을 떠나는 망자에게 편안히 가시라는 의미로 트럼펫을 분다”며 “그 순간에는 오직 망자만을 위한 경건함으로 가득 차는 기분”이라고 심정을 표현했다.
아쉬운 점은 발인의 과정에서 트럼펫을 연주하기 때문에 관객(?)들의 피드백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종교의식을 방불케 하는 숙연함과 숨죽인 흐느낌이 그의 연주에 대해 돌아오는 유일한 답례인 셈이다. 박씨는 다만 “영구차 운전기사들을 통해 유족들의 고마운 뜻을 전해 듣는다”고 밝혔다.

시설개선 등 새로운 서비스 구상 중
최근 장례식장의 시설과 서비스가 개선되는 추세에 따라 몇몇 장례식장과 함께 차별화에 성공한 청주병원 장례식장은 트럼펫 연주로 차별성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조원익 의전팀장은 “처음에는 직원들도 트럼펫 연주를 듣고 울음을 터뜨릴 정도로 장례의 막바지에 경건하고 엄숙한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며 “일부 유족들이 부가 서비스인줄 알고 신청할 정도로 반응이 좋다”고 설명했다.

한편 그동안 시설의 성격은 물론 칙칙한 분위기로 인해 철저하게 혐오시설로 인식돼 왔던 장례식장들은 최근 목재의 질감을 살린 편안한 인테리어와 침실, 샤워시설 등 유족 대상의 편의시설을 갖춘 빈소, 문상객을 위한 식사공간 개선, 작품 전시, 부대 행사 등을 무기로 과거의 부정적인 이미지에서 과감하게 탈바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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