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 고시합격자, 사무관 승진의 산실
‘땡삐 주지스님의 죽비 세례’ 지금도 회자

‘사법·행정고시 합격자 40여명 배출’, ‘회계사·세무사 시험 합격자 10여명 배출’… 어느 명문 고등학교의 학맥을 나열한 것이 아니다. 일류 고시학원의 선전문구는 더더욱 아니다.

30년 동안 독특한 운영방식과 높은 합격률로 명성을 날리다 지난 2001년 사찰의 불사계획에 따라 잠시 문을 닫았던 청주시 명암동 풍주사 고시원의 실적이다. 청주시내 어느 명문 고교 못지않은 정·관계 인맥을 보유한 풍주사 고시원이 현대화 추세에 맞는 시설과 규모로 다시 문을 연다. 그러나 새벽 5시에 일어나 참선을 해야 하고 고시원의 규칙을 3차례 위반한 사람을 강제로 쫓아내는 불문율은 변함이 없다. 낮잠을 자는 원생들에게 양동이로 물을 퍼부어 ‘땡삐’라는 악명(?)을 얻었던 주지스님도 건재하다.

   
방 4칸으로 시작, 80년대 금란방 신화
풍주사 고시원은 1971년 비를 겨우 가릴만한 4칸짜리 요사체에서 무료 고시원으로 문을 열었다. 고시원을 운영해 빠듯한 절 살림에 보탬이 되게 하려는 생각이 아니라 ‘사회의 인재들과 불교 사이에 좋은 인연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지 범추스님의 소신 때문이었다.

그러나 식구가 늘면서 무료 운영을 지속할 수 없게 되자 밥값만 받자는 심산으로 쌀 5말에 해당하는 월세를 받기 시작하면서 고시원 운영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당시 풍주사는 옛 절터로 추정되는 자리에 지어진 조그만 암자였다. 1965년 이 곳에 바랑을 푼 범추스님이 띳집을 짓고 수행을 하다가 지하 암반 밑에서 큰 물줄기를 발견한 것이 오늘날의 가람을 일구게 된 시초였다.

굴속에서 솟는 물이 고이는 자리에 해수관음상을 조성하고 이른바 동굴법당을 지어 신도를 모으기 시작했는데 이 동굴법당이 훗날 용주관음전이 된 것이다. 이처럼 한 뼘 한 뼘 사역을 넓혀가는 과정 속에서 고시원도 규모를 늘려가기 시작해 1980년대 초반에는 14칸의 규모를 갖추게 됐다.

풍주사 고시원이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것은 1986년 풍주선원 건물을 신축하면서 이 가운데 일부를 금란방(禁亂房)이라는 현판 아래 고시원으로 활용한 것이 계기가 됐다. ‘금란방’이란 ‘어지러운 행동을 금하라’는 뜻으로 한 눈을 팔지 말고 정진하라는 의미다. 풍주선원 가운데 고시원으로 사용된 방은 16칸인데 이때부터 전체 고시원의 규모도 30칸으로 늘어난 셈이다.

썬데이서울에 소개되며 전국에 명성
풍주사 고시원이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것은 1984년 첫 사법시험 합격자를 내면서부터다. 서울중앙지검 소속인 이부영(48)부장검사와 김지학(46) 변호사가 처음으로 합격의 테이프를 끊었다.

1990년에 합격한 서울지법의 오충진(38)판사, 1994년에 합격한 울산지검의 윤춘구(42) 검사, 1997년에 합격한 서울북부지검의 최용현(38)검사를 비롯해 고시원이 문을 닫던 해까지 20여명의 사법시험 합격자를 냈다. 행정고시 합격자도 19명에 달해 양대 고시를 더하면 합격자가 40여명에 이른다.

이처럼 줄줄이 고시합격자를 내다보니 풍주사 고시원은 서울에서 더 이름이 났다. 방학 때만 되면 서울지역 대학들의 고시반 학생들이 짐을 싸들고 내려오기 시작한 것. 풍주사 고시원은 특히 ‘스카이대’로 불리는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의 뒤를 잇는 서울 중상위권 대학의 고시생들에게 이름이 높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풍주사에서 사무장으로 일하면서 10년 동안 고시원 생활을 했던 김한규(49) 세무사는 “당시 ‘선데이서울’과 ‘주간경향’ 등에 신비한 영험이 있는 고시원으로 소개되면서 더욱 많은 서울지역의 학생들이 몰렸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지역에서는 사무관 승진의 터전
서울 등지에서 고시생들이 몰려들었다면 지역에서는 사무관 승진을 준비하는 공무원 등이 풍주사 고시원을 애용했다. 승진을 위해 사찰에다 잠시 딴살림을 차린 것이다. 이들은 도청, 청주시청을 비롯해 교육청, 검찰청, 선거관리원회 등 청주지역의 공공기관을 망라했는데 지금도 이름을 대면 알만한 사람들이 많다.

1987년 풍주사에서 3달 동안 승진시험을 준비해 사무관 시험에 합격한 이상기(59) 도교육청 총무과장도 그중에 한 사람이다. 이상기과장은 당시 매일 아침 마다 법당에서 108배를 올렸다고 하는데 지금도 매주 일요일 풍주사를 찾아 108배를 올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상기과장은 “당시에는 불교에 대해 잘 몰랐지만 스님의 권유로 108배를 하고 보니 체력도 강해지고 정신도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며 “그것이 인연이 돼 불교에 귀의해 신행생활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밖에도 공무원 7, 9급 시험, 순경시험을 공부하는 사람들을 비롯해 심지어는 작가지망생까지 그동안 풍주사 고시원을 거쳐 간 사람은 줄잡아도 2800명에 이른다. 물론 그들이 모두 합격의 영광을 누린 것은 아니다.

고시생 가운데에는 생각이 바뀌어 머리를 깎고 수행자가 된 사람도 있다. 풍주사 원주 덕일스님은 이에 대해 “몇 년 동안 공부를 하고도 뜻을 이루지 못해 쓸쓸하게 산문을 내려가던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며 “지금은 사회에서 자리를 잡았는지 뒷일이 궁금하다”고 말했다.

물벼락, 죽비 세례로 일군 영광
풍주사 고시원의 신화는 주지 범추스님의 극성스러움에서 비롯됐다는 것이 고시원을 거쳐 간 사람들의 공통된 견해다. 밤늦게까지 책을 보고 늦잠이라도 잘라치면 양동이에 찬물을 떠와서 바가지로 뿌렸다는 것.

또 풍주사 고시원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불교에 입문하는 자세를 다룬 ‘초발심자경문’ 강의를 보름 동안 들어야 하고 아침참선 등에 빠지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써야 했다. 특히 고시원 안팎에서 술을 마시거나 여자친구를 방에 들이는 일 등은 엄격히 금했는데 이를 3번 어기고도 스스로 나가지 않을 경우에는 죽비 세례를 맞으며 쫓겨나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같이 엄한 규율만이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불전에 공양을 올렸던 과일은 언제나 고시생들의 몫이 됐으며, ‘육식을 멀리하다 보니 체력이 저하된다’는 고시생들의 불만을 받아들여 때때로 육식을 제공하는 파격이 이뤄지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시험에 합격자가 나올 때마다 성대한 축하파티를 열어 고시생들의 기를 살려준 것도 주지스님이다.

‘잘되면 자기 탓이고 안 되면 남 탓’이라지만 풍주사 고시원에서 등용문에 오른 합격자들은 채찍과 당근을 고루 제시한 범추스님에 그 공을 돌리고 있다. 김한규세무사는 “밤늦게 순찰을 돌다가 비어있는 방이 있으면 사찰 입구에서 매복을 서던 스님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자등원, 법등원으로 다시 문을 열다
사찰 측의 종합 불사계획에 따라 2001년 문을 닫았던 풍주사 고시원은 옛 고시원이 있던 자리에 반지하 1층, 지상 2층, 연면적 250평 규모로 새 건물을 짓고 5월2일 낙성식을 갖는다. 강원도 적송을 이용한 목조와 콘크리트 양식을 겸한 양식에 바닥에는 황토를 깐 웰빙고시원이다. 욕실과 간이 부엌까지 갖춘 고시실이 모두 14칸이다.

고시원의 이름은 지상 1층이 자등원, 2층이 법등원이다. 이는 석가모니가 설한 마지막 설법인 ‘자등명, 법등명’에서 따온 것인데 ‘스스로를 등불 삼고, 진리를 등불 삼아 앞으로 나아가라’는 뜻이다. 풍주사는 지난 2001년부터 사찰 종합불사에 들어가 6층 공덕탑과 사물이 걸려있는 종각 등을 건립하고 사찰 전각 등을 전반적으로 개·보수했는데 이날 낙성식은 이 모든 불사를 회향하는 자리다.

이날 행사에서는 또 용주관음전 내 보탑에 보관 중인 부처님 진신사리 15과 가운데 6과를 공덕탑으로 이운해 봉안케 되는데 이를 기념해 가수 김태곤씨 등의 공연도 펼쳐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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