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훌륭하신 조상님을 두신 경기자님 부럽습니다.
그러나 전 국민이 존경하는 국부 전 박대통령을 친일파 대통령이라 호칭한것은 분명 잘못된 행동으로 보입니다. 주변강국에 대적 해서 이기는길은 친일논쟁으로 싸우는것보단 나라를 강국으로 만드는일이 우선이라 생각되는군요. 지하에 계신 우리의 조상님도 그것을 원할것이고요.
혜춘 경석조 선생은 1881년 괴산군 연풍면에서 태어나 한학을 수학했다. 1914년 독립운동에 뜻을 세우고 광복회 조직에 앞장섰다. 1919년에는 천도교 손병희선생과 연락을 취하며 도내 3 1만세운동을 이끌고 대동단 충북지단장을 맡기도 했다.
경석조 선생은 만주와 한국을 오가며 임시정부의 명령을 각지에 시달하고 독립자금 모금에도 힘썼다. 또한 한족자치연합회를 결성해 중앙총무부장에 피선됐고 30년 한국독립당 기밀부장에 피선됐다. 해방후 귀국한 경 선생은 하르빈에서 조직한 한국혁명군사단을 고문을 맡았고 49년 제헌의회 박우경 의원의 추천으로 반민특위 충북책임자로 임명됐다.
당시 이광 충북지사도 독립운동가 출신이었고 문화동 중앙초교 인근 적산가옥을 지정받아 반민특위 사무실 겸 거처로 썼다. 수염을 길게 기른 경석조 선생은 도책임자로 임명돼 서울에서 열차편으로 조치원에 도착하자 충북도에서 직접 영접을 나가 경찰의 에스코트를 실시하는등 최고의 의전을 갖췄다.
하지만 서울 본부가 강제 해체되면서 충북사무소도 하루아침에 폐쇄됐고 경 선생은 거처가 없어 전세방을 구하는 처지가 됐다. 이후 57년, 76세를 일기로 운명할 때까지 전세방을 면치 못하는 힘겨운 노년을 보냈다. 반민특위 위원장을 지낸 독립운동가 김상덕옹(제헌의원)이 오랫동안 경 선생의 뒷바라지를 했다.
생전에 국가훈장조차 받지 못한 경 선생은 장례도 사회장을 추진하다 여의치않아 가족장으로 조촐하게 치러야했다. 선영은 괴산 연풍면이며 지난 70년 지역출신 안동준 의원의 주도로 혜춘선생 기념사업회가 조직돼 추모비를 세우기도 했다. 유일한 혈육인 퇴직교사인 경성호씨(67)는 광복회 충북지부장을 맡은등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길라잡이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