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사람들이 편하게 다닐 수 있게 하는 월천공덕(越川功德)의 보시 구현

녹차향이 그윽한 전남 보성. 보성읍에서 국도 2호선을 따라 순천 방향으로 가다보면 벌교읍에 당도하게 된다. 벌교는 소설 ‘태백산맥’(조정래 작)의 주무대로써 1948년 여·순 사건에서부터 6·25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의 질곡의 현장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어답사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태백산맥이라는 제목이 갖는 의미는 한반도의 척추로써 남북으로 잘린 허리를 말하며 이는 곧 민족분단을 한마디로 상징하고 있다. 벌교라는 자그마한 지역을 중심으로 270여명의 등장인물이 이념의 대립과 다양한 모습으로 그려지면서 태백산맥의 무대가 만주, 서울, 부산, 강원도 까지 배경이 넓어지지만 소설의 중심 공간은 항상 제한된 공간에 두고 있고 결국 벌교에서 마무리 짓는다.
벌교는 남쪽으로 내려가면 고흥 반도이고 동쪽 순천만의 한 끝이 읍내의 벌교천 하구에 닿아 있다. 여기에 벌교의 이름이 비롯된 홍교가 있다.
벌교 홍교는 벌교천 위에 걸쳐진 세 칸 무지개다리를 말한다. 전체길이 27m에 높이는 약 3m, 폭은 4.5m이며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홍교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보물 제 304호로 지정되어 있다.

승려가 월천공덕 보시로 축조
이 다리는 조선 영조 5년(1729)에 순천 선암사 주지인 호암화상(護岩和尙)이 제자인 초안선사(楚安禪師)를 화주(化主)로, 습성대사(習性大師)를 공사감독으로 천거 착공하였으며 6년후인 영조 10년에 완공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선암사 승선교 근처 홍교비에 승선교 조성 내용과 함께 기록되어 있다. 선암사 승선교는 숙종 때 만든 것으로 벌교 홍교를 만드는데 선암사 홍교가 참조되었을 것이다.
다리를 놓아 모든 사람들이 편안히 다닐수 있게 하는 월천공덕(越川功德)은 불교에서 중요하게 꼽는 보시 가운데 하나다. 이 때문에 예전 승려들 가운데는 다리 축조 기술자가 많았는데, 절뿐 아니라 민간 지역의 다리들도 승려가 놓았다는 것이 여려개 남아 있다.
3간의 홍예(虹霓)를 연결 축조한 이 석교는 궁륭형(穹隆形)으로 각처에 있으며 선암사 승선교와 함께 구조 형식이 아주 뚜렷한 예에 속한다. 궁륭형 교량은 동서를 막론하고 고대부터 있어온 터이며 국내의 유례에서도 불국사의 청운교, 백운교, 전남 여수 흥국사 홍교 등이 있다. 또한 각지의 조선시대 석빙고 등에서도 천장가구(天井架構)에서 이러한 홍예와 동류의 기법을 보이는 유구들이 있으며 성문 등에서도 축조되던 형식이다. 궁륭형은 ‘시위를 당기는 활 모양으로 둥글고 하늘위의 무지개 처럼 걸쳐있는 모습’으로 가장 아름답고 정교한 기법으로 만들어진다.
벌교(筏橋)라는 지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홍교가 놓이기 전에 이곳에는 주민들이 떼다리(강과 해류가 교차하는 곳에 원목을 엮어 놓은 다리)를 놓았는데 영조 4년(1728년)에 전남도 지방에 내린 대홍수로 이 다리가 유실되자 승려들에 의해 석교로 축조된 것이다.
홍교는 만들어진 지 8년만에 중수되었고 헌종 10년(1844)에 크게 개수되었으며 1984년에 마지막으로 중수 공사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다리를 중수할 때마다 세운 기념비들이 읍내 쪽 다리 끝에 죽 서 있다.

아름다운 궁륭형식

다리의 구조는 부채꼴 모양의 석재를 맞춰 홍예를 만들고 네모나게 가공한 석재로 홍예 사이의 면석을 쌓았으며 그 위에 밖으로 튀어 나오게 멍엣돌을 걸치고 난간석을 얹은 후 판석을 깔아 다리 바닥을 만들었다. 홍예를 제외하고 각 홍예 사이의 면석과 난간의 축조 방식은 여러차례 중수하면서 원형이 많이 훼손되었다.
예전에 찍은 사진과 요즘 다리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 특히 면석 부분이 많이 달라진 것을 볼 수 있는데 예전에는 지금처럼 반듯하게 가공한 돌이 아니라 막돌이 쌓여있는 것을 볼수 있다.
홍예마다 아래쪽 가운데에 이무기 돌이 박혀 물을 내려다 보고 있다. 이처럼 다리 천장이나 멍엣돌 마구리 등에 동물이나 도깨비의 모양을 새겨 놓은 것은 재앙이나 잡귀를 물리친다는 의미를 지닌다.
옛날에는 벌교 홍교의 이무기 돌 코 끝에 풍경이 달려 있었다고 한다. 끊임없는 정진 수행의 의미를 되새겨 놓은 승려 축조자들의 정신을 가늠하게 하는 대목이다.
원래 맞은 편 강 언덕까지 다리가 계속되어 있었다고도 하는데 손상된 것인지, 처음부터 그만했던 것인지는 단언할 수 없지만 세 홍예중에서 가운데 것이 양쪽보다 높은 점으로 보아 현재 보다 대단히 길었다고 추정하기 어려울 듯 하다.
벌교는 오랫동안 낙안 고을 고읍면에 속했으며 1908년에야 보성군에 편입되었다. 낙안고을 변두리였던 벌교는 일제 시대에 보성과 고흥 일대의 물산을 실어내 가는 창구가 되면서 갑자기 커졌다.

옛 다리위에 현대 문물 교류의 조화

이 다리는 지금도 실제로 사용되고 있으며 홍교에 덧이어 콘크리트 다리가 붙어있다. 다리밑에 가끔 백로가 지나가고 다리 위로는 자건거를 탄 학생이나 아이를 업은 엄마, 장난 삼아 실 낚시를 하는 아이들도 눈에 띄어 옛 다리와 현대의 조화로움으로 다가와 보기 좋다.
벌교 사람들은 60년마다 한 번씩 이 다리에서 환갑 잔치를 해주었는데 1959년에 6주갑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보성, 녹차와 ‘태백산맥’의 무대>

‘보성’하면 녹차의 그윽한 다향(茶香)을 떠올리게 된다. 연간 3840톤의 녹차를 생산하는 보성은 전국 생산량의 40%를 점유한다.
차나무는 남도의 따뜻한 곳에서 자라며 안개가 많고 습도가 높은 곳을 좋아해 보성은 차 생산 최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송광섭 청주건설박물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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