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고 오래된 자전거를 타고 나섰다. 새벽비 내린 봄의 안부가 궁금해서였다. 높은 언덕은 낮게, 낮은 비탈길은 높게 보이는 세상은 펼쳐 놓은 초록의 도화지처럼 곱기만 하였다. 삐거덕거리는 자전거가 눅눅한 길 위에 뽀그작 뽀그작 소리를 새기며 달렸다. 젖은 땅을 누르는 가늘고 긴 바퀴자국은 아파트 단지를 지나 야트막하게 쌓아올린 담장이 늘어선 동네로 이어졌다. 세월의 더께 앉은 거친 담장은 누군가의 솜씨로 꾸며져 있었다. 익살스러운 그림으로 단장한 대문 너머는 길쭉한 바지랑대며 옹기종기 모여 있는 꽃 화분들, 볕이 머물다 가는 빈 의자가 정겨운 풍경을 더하고 있었다. 묵직한 자전거를 끌고 올라가느라 숨이 찼지만 담장과 하늘을 이어주는 언덕이 그리 야속하지만은 않았다.

담장이 끝나갈 무렵, 칼칼한 김치찌개 냄새와 구수한 밥 냄새가 진동을 하였다. 언제 생겼는지 ‘둥지’라는 간판을 내건 조그만 식당이 자리하고 있었다. 맛있는 냄새가 드나드는 식당 입구는 배고프고 바쁜 사람들의 목소리로 북적거렸다.

식당의 자그마한 마당에는 제법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크기도 모양도 제각각인 의자로 둘러싸인 나무의 가지마다 맑고 투명한 빗방울이 대롱대롱 걸려 있었다. 자잘하게 핀 싱그러운 꽃무리를 보는 것 같아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전거를 세우고 겨울을 이겨낸 계절을 마주하려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손바닥만 한 전화에 구름이 흘러가는 하늘과 봄을 피워낸 나무를 함께 담으려 쪼그려 앉기도 하고 발뒤꿈치를 들어가며 애 써 보았다.

“아주머니 그 자전거 얼마나 해요?”

점심 식사를 마쳤는지 커피향이 나는 종이컵을 들고 나온 남자가 나에게 물었다. 내가 서 있던 곳이 식후 손님들이 여유를 즐길 수 있게 주인장이 마련한 자리였는가 보다.

“별로 비싸진 않은데요.”

풋낯도 없는 남자의 싱거운 질문이라 생각한 나는 대충 얼버무렸다.

하나, 둘 비슷한 차림새의 남자 대여섯 명이 나무 아래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언덕 아래 아파트 단지 공사장의 근로자들이었던 모양이다. 허리춤에는 묵직한 연장을 달고 옆구리에는 안전모를 끼고 있었다. 헐렁한 바지 주머니에서 삐져나온 장갑은 얼마나 일에 시달렸는지 손가락 끝이 해져 너덜너덜했다. 발목까지 올라온 안전화에 제 색인 양 내려앉은 먼지 자국이 쉬지 않고 일한 시간을 짐작케 하고도 남았다. 검게 그을린 얼굴이 삶의 고단함을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딸이 4학년인데 그 애가 자전거를 타고 싶다잖아요. 도통 뭘 사야하는지도 모르겠고, 아주머니 타고 온 자전거가 딸애한테 얼추 맞을까 해서요.”

볼품없는 자전거인데도 이리저리 살피는 남자의 눈이 자신의 딸을 보는 듯 살뜰하였다. 속 깊은 부정이 묻어나는 남자의 말에 나는 일순간 무르춤하고 말았다. 조금이라도 성의 있는 대답을 해 주고 싶었다. 딸아이의 키를 어림잡아 보라고 물었지만 푸념처럼 구겨진 목소리만 되돌아 올 뿐이었다.

“한 달이면 몇 번이나 얼굴을 보려나, 한창 크는 아이 키를 잠 든 얼굴만 떠올려서는 가늠할 수가 없네요. 애들 클 때 잠깐이라더니.”

다 마신 종이컵을 들고 있던 대여섯 명의 남자들도 그의 속내를 닮은 말에 한 마디씩 거들고 나섰다.

“우리 아들이 축구를 그렇게 잘하는 줄 몰랐네. 축구화라도 신으면 날아다니겠더라고.”

“무뚝뚝한 아들 녀석이 나 먹으라고 라면을 끓여 냈는데, 제법 솜씨가 좋아.”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딸 애 사진을 가끔 들여다보면 언제 그렇게 컸는지 신기해.”

햇빛에 반짝이는 빗방울을 바라보는 그들의 얼굴이 순한 봄처럼 피어 있었다. 아무리 아무렇지 않은 척해도 진심을 숨기기엔 서툰 표정이었다. 뜨뜻하고 물컹한 마음이 먼 곳을 응시하는 눈동자에 비쳐 보였으니 말이다. 빠르게 흘러가는 자식의 시간을 아쉽고 애틋하게 여기는 아버지의 마음이 분명했다. 깊게 자리 잡은 주름과 피부에 쌓인 햇빛의 검은 이력, 인내로 그늘진 눈 밑이 삶의 피로를 이겨낸 시간의 훈장처럼 여겨졌다. 길고 고된 자신의 하루가 자식의 안온한 내일이 되리라는 위안으로 기꺼이 버티고 견뎌낸 아버지의 얼굴이었으리라.

정오의 하늘에서 흘러내리는 나른함을 툭툭 털며 그들은 일터로 돌아갈 채비를 하였다. 허리춤에서 덜렁거리는 연장과 머리 위에 솟아오른 흰 안전모, 묵직한 안전화가 그리는 커다란 뒷모습을 따라 나도 언덕을 내려갔다. 무른 땅에 깊게 파인 발자국에서 익숙한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묵은 계절을 씻어내려는 봄비와 시린 계절을 몰아내려는 봄볕이 애쓰는 향기가 지천이다. 코끝보다 마음으로 먼저 스며드는 초록의 향기가 들켜버린 부정만큼이나 아련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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