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판봉

“그러나 이제 내 말을 듣는 사람들아, 잘 들어라.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해주어라. 그리고 너희를 학대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해주어라. 누가 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주고 누가 겉옷을 빼앗거든 속옷마저 내어주어라.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빼앗는 사람에게는 되받으려고 하지 말라.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너희가 만일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한다. 너희가 만일 자기한테 잘해주는 사람에게만 잘해준다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겠느냐? 죄인들도 그만큼은 한다. 너희가 만일 되받을 가망이 있는 사람에게만 꾸어준다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것을 알면 꾸어 준다. 그러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남에게 좋은 일을 해주어라. 그리고 되받을 생각을 말고 꾸어 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며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은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다. 그러니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루가 6: 27~36)

이판봉씨(요한·41)는 꽃동네에서 ‘꽃반지 아저씨’로 통한다. 누구에게라도 꽃반지 아저씨가 누구냐고 물으면 이씨를 가르쳐 준다.그가 꽃반지 아저씨로 불리게 된 것은 그의 기묘한 손재주 덕분이다. 병원에서 쓰고 남은 링거줄이 그가 만드는 꽃반지 재료의 전부다. 어쩌다 고급스런 반지를 만들 때에는 큐빅이나 작은 보석을 박기도 하지만, 링거줄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그의 솜씨가 얼마나 좋은지 한 번 그가 하는 작업을 본 사람은 입을 다물지 못한다. 줄 하나로 주는 기쁨, 그는 그 기쁨으로 인해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그가 새로운 기쁨을 찾기까지는 깊고 긴 절망의 터널을 지나와야 했었다.전북 부안이 고향인 그는 우시장에 소를 내다파는 아버지와 조그만 가게를 운영하고 있던 어머니 사이에서 별 어려움 없이 유년기를 지냈다. 행복했던 그의 가정에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한 것은 아버지의 바람기에서였다.“넉넉한 집안이었죠. 머슴도 몇 데리고 있을 만큼 먹을 것 입을 것 별 걱정없이 살았어요. 그런데 어느날 아버지의 바람기가 가정을 파탄나게 했죠. 그 일로 친어머니와 아버지는 헤어지셨어요. 새엄마가 들어왔는데, 저는 아버지와 함께 살았죠. 헤어진 어머니는 지금까지 살아계시기나 한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계모 밑에서 자란다는 것이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었다. 친어머니가 두 눈 뜨고 살아 있는데 다른 여자에게 어머니라고 부른다는 것이 그에겐 늘 한으로 남았었다. 그래서 계모가 데리고 온 또래 녀석을 많이도 혼내주었었다. 그가 열세 살 때 그의 집에는 큰 화재가 발생했다.“12월이었어요. 동생녀석이 호롱불 심지를 너무 키워놓고 자는 바람에 호롱불이 과열되어 그만 터지고 만 거예요. 삽시간에 불이 집안 전체로 번져나갔지요. 그 일로 막내동생이 죽고 저는 중화상을 입었어요. 머리와 팔, 어깨 부분에 3도 화상을 입었으니까요. 자라면서 그게 늘 고통이었어요. 화상을 입은 저에게 친구녀석들은 시도때도 없이 놀려댔으니까요. 겉 허물만 조금 흉칙할 뿐이지, 속은 녀석들과 다를 게 전혀 없는데도 녀석들은 절 마치 외계인 대하듯이 꺼림칙하게 여기고, 놀려대고, 외톨이로 만들어 버렸죠. 화가 끝까지 치밀어 놀려대는 녀석들 집까지 쫓아가 손찌검을 했지요. 어릴 땐 그래도 힘깨나 썼고, 동네녀석들에게 무시 당하지 않을 만큼 ‘한가닥’ 했거든요.”화재사건 이후 그의 성격이 삐뚤어지기 시작했다. 그렇잖아도 어머니와 헤어진 설움으로 복받쳐 있는 가슴이었는데 화재 사건은 그를 사고뭉치로 만들기에 충분했었다. 집이 싫어졌다. 어디론가 떠나서 돈을 벌고 싶었다. 어머니가 없는 집안은 그에게 늘 외로움을 안겨다 주었었다. 열네 살 때 그는 사회로 나왔다. 누나의 소개로 성남에 있는 나전칠기를 만드는 공장에 취직이라는 것을 했다.“기술을 빨리 배우고 싶은데 이분들이 기술은 가르쳐주지 않고 아이들 보는 일만 시키는 거예요. 사장 딸이 둘 있었는데 3년 동안 그 집에서 애들만 봤어요. 하긴 기술을 가르쳐주기엔 제 나이가 너무 어린 탓도 있었겠죠. 3년이 지나니까 그때부터 가르쳐주기 시작하더군요. 꼼꼼하게 배웠어요. 완벽한 기술을 터득할 때까지 한 번 하고 두 번 하고, 아기가 걸음마 배우듯 열심히 배웠지요. 기술이 어제 오늘 다르게 늘더군요. 사장도 제 기술을 인정해주기 시작했어요. 직책도 이제는 ‘계장’이라고 떡하니 달아 주더군요. 그때 월급이 270만원이었으니까 꽤 되었던 셈이죠. 처음엔 톱질을 배우고 나중에는 도안까지 마스터 했죠. 그런데 나이 서른이 넘으니까 남의 집에 있기가 싫어지더군요. 18년 동안 그 집에서 나전칠기 일을 하다가 1990년에 나왔어요.”그는 음성 신천리로 왔다. 그의 집은 부안에서 이미 오래 전에 음성으로 이사 온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음성으로 돌아온 그는 농사일을 했다. 조금 있는 전답이었지만 내 일을 한다는 기쁨이 더 컸다. 그 집엔 아버지와 계모가 살고 있었다. 계모에게는 아들이 있었다. 그러니까 이씨에게는 동생이었던 셈이다. 그 동생이 1992년 변을 당했다. 서울 천호동에서 인형공장에 다니던 동생은 경기가 안 좋아 그 공장이 문을 닫자 지하철 공사장에서 일자리를 구했다. 지하철 공사장에서 일을 한 지 3일 째 되던 날 동생은 지하철 레일 쌓아둔 것이 무너져 레일더미에 깔려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계모는 그 아들을 무척이나 사랑했었다.아들이 죽자 계모는 늘 술만 마셨다. 세상에 살 맛을 잃은 그녀를 누구도 말리지 못했다. 동생 사십구제를 지내던 날 계모는 화장실에 쌓아둔 제초제를 마셨다. 병원에 실려간 계모의 상태를 본 의사가 고개를 저었다. 계모는 19일 동안 내내 피를 토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던 아들을 따라 저 세상으로 갔다.계모에게는 딸이 둘 있었고, 아버지와의 사이에 난 아들이 있었다. 계모는 자식 편애가 심했었다. 그것이 늘 그는 불만이었다. 밥을 먹을 때도 좋은 반찬은 동생차지였다.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늘 보리밥에 거친 반찬뿐이었다. 그러던 계모가 죽었다. 용서할 만도 한데 그는 아직까지 계모를 용서하지 못 한다. 너무 지나친 자식 편애(偏愛)로 지금도 작고한 계모 생각을 하면 치가 떨린다고 한다. 어렸던 그에게 그 환경은 그만큼 큰 상처로 남았었던 것이었다.그리고 세월이 흘렀다.1995년 5월 1일, 그에게 불행의 그림자가 찾아왔다. 오토바이를 타고 가던 그는 커브길에서 미끄러지면서 다리 난간을 받았다. 이 사고로 그는 척추를 크게 다쳤다. 의식을 회복했을 때는 병원이었다. 그런데 정신은 말짱한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만져도 감각이 없었다. 순간 그는 큰 사고구나!라고 느꼈다. 살고 싶지 않았다.충주 건국대병원에선 그를 치료할 수 없다고 했다. 너무 큰 사고라 이대로는 살기 힘들 것이라고 했다. 그는 여의도 성모병원으로 옮겨졌다. 그 곳에서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기적적으로 살았다.“사고 나고 얼마 안 돼 이복동생과 계모 딸이 저를 꽃동네에 입소시켜 주었어요. 저는 솔직이 삶을 포기한 상태였죠. 되는대로 살자는 마음이었어요. 노인요양원으로 들어갔는데 욕창이 심해서 생사를 넘나들 정도였죠. 소문이 났었나 봐요. ‘노인요양원에 젊은이가 하나 있는데 자꾸 죽으려 한다’는 소문을 들은 신 야고보 수사님이 그러면 호스피스로 데려오라고 하셨지요. 호스피스에서 6개월간 있었어요. 그런데 정말 이상하지요. 꿈에 예수님을 뵙게 된 거예요. 예수님께서 제게 말씀하셨어요.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그러면서 저를 안아주셨어요. 그 한 마디가 너무 이상했어요. 꿈치고는 너무 또렷이 기억에 생생한 거예요. 잊을 수 없는 신앙체험이었지요. 그런데 다음 날 낮에 오 신부님을 만나게 됐어요. 오 신부님께서 그러시더군요. ‘형제님은 다친 것을 어떻게 생각하시나?’ 저는 저도 모르게 대답했어요. ‘모든 것이 주님 뜻입니다.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오 신부님께서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시더니 병원 현관에서 즉시 저에게 안수기도를 해주셨어요. 그때 문득 떠오르는 게 있더군요. 묵주! 그래 묵주를 만들어 꽃동네가족들에게 선물하자. 꽃동네를 찾는 은인恩人들에게 선물하자. 만들어 보지도 않았는데, 바로 어떻게 만들 것인지 머릿 속에 확연히 떠오르는 거예요. 링거줄로 이렇게 저렇게 만들면 훌륭한 묵주가 될 거다.”처음에는 묵주를 만들었다. 묵주를 만들다보니 꽃반지 만드는 방법도 대강 알 듯하였다. 묵주를 선물로 받은 사람들은 너무 기뻐했다. 꽃반지를 선물로 받은 이들도 기뻐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때 처음 그는 느꼈다. 아, 쓸모 없으리라 생각 되던 나에게도 이웃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주님의 은총이 숨겨져 있었구나.병원에서의 일상은 늘 지겨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전혀 지겹지가 않았다. 그에겐 묵주와 꽃반지를 만들어 남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그는 두 번째 신앙체험을 하게 된다. 그 것 또한 꿈을 통해서였다.“신 수사님이 꿈에 나타나셔서 제 손을 이끄시는 거예요. 어딘가 갈 곳이 있다구요. 같이 간 곳은 허허벌판이었어요. 그 벌판에서 신 수사님은 무릎을 꿇고 저를 위한 기도를 올려주셨어요. 그때 갑자기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어요. 예수님 뒤로 구름처럼 밀려오는 것이 있는데 자세히 보니 그것은 무수히 많은 십자가였어요. 그 십자가에는 많은 사람들의 이름과 세례명이 하나하나 적혀 있었어요. 나중에 꿈이 너무도 신기해서 신 수사님께 면담을 청해 말씀을 드렸어요. 제 이야기를 들은 신 수사님께서 고맙다고 하시더군요. 수사님께서 왜 고맙지요? 라고 물으니까 수사님께서는 ‘당신의 꿈으로 제가 은총을 받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러면서 ‘주님께 당신 살려달라고 기도를 많이 올렸다’고 덧붙이시더군요. 수사님의 그 기도가 제 꿈으로 나타난 것이었지요.”
꽃동네 사랑의연수원에는 일주일에 1000명 이상의 학생들이 사랑을 배우러 다녀간다. 연수기간이 끝나고 이들이 피날레 행사로 캠프 파이어를 할 때면 가장 ‘눈독’을 들이는 것이 이씨가 만든 꽃반지다. 앙증맞고 귀엽고 예쁘게 생긴 링거 줄 꽃반지는 단연 학생들에게 인기 만점이다. 도저히 ‘물량’이 달려 수요와 공급이 맞지 않을 지경이다. 해서 그는 연수원 지도교사들에게 꽃반지 만드는 비법을 전수시켰다. 학생들이 받는 것은 작은 꽃반지에 불과하지만, 그들의 가슴 속에는 큰 사랑의 느낌표가 새겨진다.

“학생들에게 꽃반지를 주면서 그런 희망을 갖죠. 꽃반지를 받은 학생이 학교생활을 하면서 어느 날 문득 꽃반지를 보며 꽃동네를 한 번 더 떠올리는 그런 희망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 꽃동네가족들을 한 번 더 떠올리고, 사랑의 의미를 한 번 더 생각하는 그런 희망 말입니다. 꽃반지를 주니까 꽃동네를 잊지 않고 다시 찾아오는 사람이 생기고 편지를 보내오는 사람이 생기고…… 그런 것이 너무 좋아요. 대수롭지 않은 건데 학생들이 너무 소중하게 생각하니까 그 마음이 고맙지요. 꽃반지를 보면서 봉사활동을 한 번 더 오는 학생들을 볼 때면 가장 기쁩니다.”

그는 꽃동네에 있는 한, 아니 그가 죽기 전까지 늘 꽃반지를 만들고자 한다. 꽃반지를 주면서 그는 기도한다.

‘꽃반지를 받는 이들에게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주소서.’

그가 하루에 만들어내는 꽃반지는 대략 300여 개에 달한다. 하루에 1000개 이상 만들 때도 있다고 한다. 밥 먹고 하는 일이 그것 뿐인데 무어 힘들 게 있느냐는 대답이다. 꽃반지 한 개 만드는데 걸리는 시간이 30초가 채 넘지 않는다. 손에 익숙해지고 열이 나면 그보다도 더욱 빨리 만들기도 한다.

어느 날은 어느 학생에게 묵주를 선물하면서 “네 아빠 차에 이 묵주를 걸어놓으면 사고가 안 난단다”라고 우스갯소리를 했었다. 며칠 후에 그 학생에게서 편지가 왔다. 아빠 차가 사고가 났는데, 차에 걸어놓은 묵주 덕분인지 상대편 차가 크게 파손되는 사고였음에도 아빠는 찰과상 하나 입지 않았고 차도 멀쩡하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신앙체험을 열두 번 했다고 한다. 그만큼 간절한 염원이 그 체험을 허락 했으리라.

그에게도 소망이 있다. 이루어지지 않을 소망임을 누구보다 자신이 더욱 잘 알면서도 늘 그는 부질없는 그 소망을 갖고 있다.

“단 한 번만이라도 걸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휠체어에 신세를 지고 있다. 휠체어가 없으면 그는 움직일 수 없다. 늘 휠체어에 앉아 있으면서도 그는 걸어 다니는 사람을 보며 걷는 꿈을 꾼다.

꽃동네는 그에게 사랑과 평화를 안겨다 주는 공간이다.
한때 자살까지 생각했던 그였지만 지금은 살아 있다는 자체가 얼마나 큰 행복인지 모른다. 그 행복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갔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었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끔찍하다고 한다. 그가 찾은 행복은 꽃반지와 묵주를 만들면서 찾은 자신의 ‘역할’이다. 자신이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 그 일을 통해 남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 그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이다.

그는 자신이 만드는 꽃반지와 묵주를 ‘보석’으로 생각하고 있다. 찬란하게 빛나는 보석(寶石이) 아니라, 죄에 대한 사함을 받기 위해 치르는 대가로서의 보석(保釋) 말이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저지른 죄에 대한 참회의 몸짓이 그에게는 꽃반지와 묵주를 만드는 일이다.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그는 이런 메시지를 마련해놓고 있다.

“저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덤으로 사는 인생입니다. 한 번 마음 잡기가 힘들지 스스로 평정심을 찾으면 작은 일에도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 수 있습니다.”

꽃반지와 묵주를 통해 아이들과 함께 즐거울 수 있는 일상이 그에게는 늘 마련돼 있다. 그것이 바로 그가 찾은 행복의 길이다. 하여 꽃동네사람들은 그에게 ‘꽃반지 아저씨’라는 예쁜 별명을 지어 주었고 그는 그 별명으로 하여 새로운 인생을 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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