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혁동

그때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머리에 손을 얹어 기도해주시기를 청하였다. 제자들이 그들을 나무라자 예수께서는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 하늘나라는 이런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들의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축복해주시고나서 그곳을 떠나셨다. (마태오 19:13~15)

삶은 흐르는 강물과도 같아, 때로는 강의 시원(始原)을 이루는 실개천으로도 흐르다가 때로는 여울을 만나 격랑의 몸짓을 보이다가 때로는 흐름을 멈춘 듯 밑강물로 도도하게 흐르는 숙연한 모습을 보이다가 때로는 급격한 절벽을 만나 소용돌이를 일으키기도 한다. 묵연히 흐르는 강물도 그렇듯 다양한 모습을 보일진대 사람의 일이야 말해 무엇하랴.

한 가지의 마음을 균형있게 유지한다는 것, 초심(初心)으로 돌아가 늘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은 그래서 일견 불가능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늘 씩씩한 모습으로 꽃동네 사랑의연수원을 찾아 사랑을 배우고 있는 연수생들을 향해 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형제.이혁동씨(안토니오·40)는 꽃동네 사랑의연수원 지도교사다. 그의 주된 일은 연수생들 교육의 피날레, 캠프 파이어 행사의 진행이다. 이제 불혹의 나이에 접어든 이씨는 캠프 파이어 행사의 첫 멘트를 이렇게 장식한다.“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여러분의 귀염둥이 도라도라 이동혁, 인사 드립니다.”그의 본명은 이혁동이다. 그 본명을 버리고 동혁으로 개명한 것은 발음상 부드러움을 관객들에게 주고자 하는 의도에서이다. 별 것 아닌 듯 보이는 일이지만, 그는 자신이 맡고 있는 일에 관한 한 최선의 모습을 보이고자 한다. 이름을 아예 바꿔버린 것도 사실은 그런 취지에서 출발한 터.매끄럽게 행사를 진행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 천상 그는 ‘꾼’이구나,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초등학생이면 초등학생의 눈높이에 맞춰, 중고등학생이면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 또는 대학생과 일반인들의 경우엔 그들의 수준에 또 다시 맞추어 행사를 이끌어가는 솜씨를 보면 저래서 전문가가 필요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씨가 레크레이션에 입문하게 된 동기는 의외로 간단하다.“내 가정의 행복을 위해 많은 것을 익혀두자는 생각이 이제 직업으로 바뀌어버렸습니다.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볼 때마다 전 그렇게 생각했어요. 좀 더 부드러운 아버지의 상이 무엇일까, 좀 더 화목한 가정을 이끌기 위해 아버지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어요.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었죠. 우리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놀아주는 일, 그게 가정의 행복의 시발점이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레크레이션에 발을 들여놓게 된 거죠.”이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2년 한국레크레이션 아카데미에서 수학했다. 처음엔 어려움도 많았다. 대선배의 가방 보따리를 메고 따라다니며 배우는 레크레이션은 생각보다 수월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왕 파기 시작한 우물, 고통을 감내하고 대성해 보이자는 결심으로 공부를 이어나갔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가 그에게 찾아왔다. 대선배들이 그의 재능을 인정하고 ‘한사랑 레크레이션 이벤트’ 결성에 그를 끼워준 것이었다. 그룹을 결성하고 ‘뜻’을 이뤄보자는 거창한 목표를 세웠다. 무료공연도 많이 다녔다. 교도소 위문공연을 했고, 노인분들을 위한 이벤트도 마련했다.그러나 결국 한사랑 레크레이션 이벤트는 와해되고 말았다. 열기가 있고 혈기가 있었지만 경험이 부족한 까닭이었다. IMF로 허덕이게 된 자금난도 와해의 결정적인 원인이 됐다. 첫 번째 실패를 맛본 이씨는 그러나 그 실패가 오히려 이 세상에서 가장 보람있는 일, 자기 자신에게 꼭 필요한 ‘역할’을 주시기 위해 주님께서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한다.“꽃동네와 인연을 맺게 되고, 그로 인해 제 삶의 방향을 찾았으니 주님께서 주신 선물 중 그보다 더 큰 선물이 어디 있겠어요? 늘 소소한 일에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려 노력하고 있습니다.”이씨가 견지하고 있는 레크레이션은 우리 생활과 거리가 먼 행사의 일환이 아니다. 삶 속에 활기와 생동감을 주는 것, 노동이 아닌 여흥을 주는 것, 생활 속에서 발견되는 즐거움, 그것이 바로 이씨가 추구하는 레크레이션의 개념이다.“세상은 움직여야 합니다. 그 세상을 움직이는데 동인(動因)이 되는 원천적인 힘, 그것은 신바람이죠. 그 신바람은 바로 레크레이션에서 나오고 말입니다. 전 제 삶의 철학을 ‘끝이 좋으면 다 좋다’로 정하고 있습니다. 끝이 좋다는 말은 시작이 좋다는 말과 맥락이 닿아 있을 뿐 아니라 완결을 위해 노력하는 개인의 열정이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끝이란 결국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고나 할까요. 끝이라는 매듭은 그것으로 단절되는 성질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아름다운 삶을 살자는 마음으로 이씨는 늘 즐겁게 생활한다. 일견 그의 지나친 웃음은 혹 실없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그는 그런 오해쯤 가볍게 넘겨버린다. 일을 해도 먼저 하고 남보다 늘 많이 하려 한다. 욕심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욕심을 늘 버리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1983년, 스물셋 나이로 일찍 결혼해 아들이 벌써 고등학교 2학년이다. 올해 열아홉이니 3학년이어야 하지만 아들이 2학년인데에는 까닭이 있다. 아들은 친구관계가 그리 원만한 편이 못되었다. 성격에 모난 부분이 있었고 오락을 즐겨하는 아들을 보며 이씨는 결심했다.

‘공부 이전에 사람을 만들어야 한다.’

아들이 중학교를 졸업하던 해 이씨는 아들을 데리고 꽃동네로 찾아왔다.

“병두야, 나와 1년간 꽃동네에서 일하자. 어려운 사람들이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너도 배워두거라.”

아들은 이씨의 권유에 별다른 반발을 하지는 않았다. 이전부터 이씨와 이씨의 아내 강정순씨(40)는 아들과 몇 번 꽃동네에 와서 봉사활동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아들에게도 꽃동네는 낯선 곳이 아니었다.

“노인요양원과 천사의집에서 봉사활동을 했어요. 열심히 하더군요. 새벽에 일어나 쌀을 씻고 밥을 하고, 땀의 귀중함을 깨우치더군요. 그렇게 1년을 꽃동네에서 봉사활동을 하게 한 뒤 아들을 고등학교에 진학시켰어요.”

자식 공부에 지나친 열성을 보여 사회적 물의를 빚는 일이 잦은 요즘의 세태를 볼 때 이씨의 행동은 다소 엉뚱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학교에서 배우기 힘든 사랑을 배우는 것에 1년을 투자한다는 것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 이씨의 생각이다.

이씨가 아내를 만난 건 레크레이션에 입문하고 같은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부터. 예쁘기도 하지만 비길데 없이 마음은 더 예뻐 결혼하게 됐다고. 이씨가 꽃동네와 인연을 맺고 꽃동네사람이 된 것도 아내의 격려와 내조가 컸다고 한다.

“처음엔 꽃동네에 있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죠. 그런데 아내가 그러더군요. 라면 세 끼를 먹어도 행복하게 살자구요. 그러면 된다구요. 돈 걱정 집 걱정을 하지 말라구요. 행복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지 돈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구요. 꽃동네의 일이 당신에게 얼마나 의미있는 일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고 말이죠.”

마흔에 낳은 자식은 눈에 넣어도 안 아프다더니, 이씨가 요즘 그런 꼴이다. 이제 세 살된 딸아이 비아의 재롱을 보고 싶어 늘 눈 앞이 아슴프레하다. 아내 자랑이 팔불출이라면 자식자랑은 구불출쯤 될까? 이씨는 팔불출, 구불출을 두루 갖췄다.

“전에는 딸아이가 ‘이게 모야?’ 그러더니 요즘은 ‘이게 몰까?’ 그래요. 말 하나 변해간다는 것도 저에겐 마치 기적처럼 느껴지네요. 첫 아들과 나이 차가 15년쯤 되는데, 첫 자식 키울 때와는 다른 재미가 있어요. 금요일만 돼도 마음은 벌써 딸아이에게 늘 가 있죠. 1주일에 한 번 딸아이 본다는 것이 인생에 가장 큰 낙이 돼버렸어요.”

이씨가 꽃동네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꽃동네가 한창 벌였던 땅 한 평 이상 사서 선물하는 ‘사랑의한마음손잡기운동’에 회원으로 가입하면서부터. 그땐 주말마다 와서 꽃동네에 모든 것을 쏟아놓고 갔었다. 그러던 어느날 아내가 이씨에게 말했다.

“꽃동네에 사랑의연수원이 생겼어요. 한 번 가 보셔야죠?”

꽃동네에 와보니 연수원 건물은 큰데 아무 프로그램도 운영되고 있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이씨는 황종현 신부에게 권유했다.

“건물은 큰데 놀리면 됩니까? 교육과 어우러진 놀이마당을 개설해보는 것이 어떤가요?”

1997년 11월 ‘스타캠프’를 구성하고 연예인들을 데려다 2박 3일의 일정으로 아이들과의 만남을 주선했다. 젝스키스 등 내로라하는 연예인들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행사가 들쭉날쭉 비정기적이라는 데 있었다.

“세 번 하고 쫑(終) 했어요. 사실 꽃동네에서 가르치려는 사랑의 이미지가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연예인을 내세워 일시적인 놀이마당을 만들자는 것은 아니었거든요. ‘스타캠프’는 그런 의미에서 실패했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그 실패 후 서울로 올라와 사무실을 정리하고 1년간 꽃동네에서 봉사하라는 아내의 권유에 따라 꽃동네로 왔지요.”

이씨는 1998년 꽃동네로 와서 사랑의연수원 지도교사 팀 구성에 합류했다. 사회에서 많은 돈을 받고 오는 희열보다 꽃동네로부터 오는 희열은 더 컸다. 그리 큰 돈은 아니었지만 일정한 페이를 받고 사랑을 배우러 오는 학생들에게 꽃동네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주며 그들의 마음에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일은 그가 사회에서 견지했던 신바람보다 더욱 신바람나는 일이었다.

“정말 감당하기 힘들 만큼 벅찬 기쁨을 느꼈습니다. 가슴 속이 기쁨으로 가득 차 있으니 마음이 편해지고, 마음이 편해지니까 모든 일이 잘 되더군요. 사랑과 행복, 그것은 우리들에게서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옆자리에 있었습니다.”

이씨는 같이 일하자는 황 신부의 제의를 받아들여 1998년 11월 정식 직원이 됐다. 그러면서 생긴 첫 번째의 축복, 이씨는 그 일을 가리켜 기적이라고 말한다.

“첫째 아이를 갖고 전 불임수술을 했어요. 그런데 다 큰 아들녀석이 자꾸 동생을 보고 싶다는 거예요.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그런데 꽃동네에 들어오고 난 뒤에 기적이 생긴 겁니다. 아내가 아이를 갖게 된 거예요. 병원에 가서 상담을 했더니 의사가 말하길, 아주 드문 일이지만 묶였던 자리가 저절로 풀려 임신이 가능하게 됐다는 것이었어요. 수술도 받지 않았는데 자동적으로 풀린 게죠. 그 딸아이 비아가 태어난 날도 공교롭게 성모성탄축일이었어요.”

이씨가 꽃동네에서 하는 주된 일은 레크레이션 진행. 사회에 있을때부터 명 MC로 잘 나가던 이씨는 진행 방식을 이 곳에 와서는 완전히 바꾸어버렸다. 중고등학생의 눈높이에 맞추어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마음, 그들이 가려워하는 부분, 그들이 아파하는 부분을 어루만지자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여 그가 사회를 맡으면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는 ‘사랑’과 ‘행복’과 ‘감사’다. 그 세 가지의 말로 그는 아이들을 웃겼다 울렸다, 흥에 겨운 엑스타시로 이끌기도 한다.

“이 곳은 전문가도 필요하지만 만능인도 필요한 곳입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자신의 소임이 확연하게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행사 진행을 맡았다가 이튿날 운전 기사 노릇도 하고, 쓰레기도 치우고, 잔디밭에 잡초도 뽑고…… 모든 일을 내 일처럼 여기는 것이 이곳에서는 하나의 묵계처럼 돼 있죠. 왜냐하면 모든 일이 바로 내 일이요, 우리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씨가 진행을 하면서 터득한 노하우는 다름이 아니다. 정성과 사랑. 아이들에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가서지 않으면 되는 일이 없다는 것이 이씨의 설명이다. 아이들의 나쁜 면보다는 좋은 면을 먼저 보려 하고, 아이들을 가르치기보다는 그들에게서 먼저 무엇인가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 이씨의 지론이다.

다만 이씨에게도 안타까움 한 가지가 있다면 다름아닌 아들이다. 청소년에 대한 남다른 애착으로 나름대로 많은 준비를 하고 많은 일을 한다고 자부하고 있지만, 정작 자신의 아들에게 아비인 자신의 존재는 ‘빈자리’로 남아 있었다. 하여 이씨는 아들과의 시간을 좀 더 갖기 위해 노력한다. 아들도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고 흔들리던 예전의 모습을 버리고 밝고 건강한 청년으로 성장하고 있다.

“아내가 용기를 주었을 때, 꽃동네가 당신에게 줄 수 있는 행복이 얼마나 큰 것인지 깊이 생각해야 한다고, 꽃동네에서 활동하는 것 자체가 우리 가정에 얼마나 큰 기쁨이냐고 아내가 말했을 때 그런 생각을 했어요. 가끔은 이 곳 생활이 힘들기도 하지만, 가장 보람있는 내 몫의 삶이 이것이구나, 하는 그런 생각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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