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은 1929년 11월3일 전남 광주에서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을 기점으로 한 일제강점기 학생독립운동을 기념한 학생의 날이다.

1919년 3·1운동 이후 학생들은 사회계층과 민족운동의 주체로 성장하면서 1920년대 독립운동의 전위로 떠올랐다.

충북대 사학과 박걸순 교수는 저서 '충북의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에서 "1920년대 충북지방의 학생운동은 1925년 괴산 청안공보(청안공립보통학교), 괴산공보, 도안공보 학생들의 맹휴(盟休·동맹휴학) 투쟁으로부터 본격화했다"라고 밝혔다.

5월6일 청안공보 6년생 24명은 평소 불성실한 교사를 배척하고자 일본인 교장에게 4개 항의 진정서를 제출하고 만일 조건을 수용하지 않으면 전원이 맹휴에 돌입하기로 결의했다.

이에 당황한 학교 당국은 해당 교사의 사과와 함께 상당한 조치를 약속해 해결했다.

1929년 일제강점기 최대의 학생운동이었던 광주학생운동은 전국으로 확산했다.

조선총독부경무국 비밀문서의 광주항일학생사건 자료에 따르면 충북에서는 1930년 1월21일 청주고보 학생들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어깨동무를 하고 교문 밖으로 뛰쳐나왔고, 청주농업학교, 청주고녀(淸州高女) 학생들도 시위에 합류했다.

1925년 괴산에서 시작한 충북지역 학생운동은 1934년 10월22일 괴산공립농업실수학교 학생들의 맹휴 투쟁을 끝으로 종료했다.

일제 측 자료에 따르면 1920년대 맹휴 투쟁은 전국적으로 404회, 충북지역은 17회(4.2%) 발생했다.

학생운동은 그 사실이 밝혀지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실제 학생운동 횟수는 더 많을 것으로 짐작한다.

박 교수는 "충북지역 학생들의 맹휴 투쟁은 주로 일본인 교장과 교사 배척, 민족차별과 멸시에 대한 반발"이라며 "점차 학부모, 청년, 각계각층이 참여하는 양상으로 발전해 단순히 학생운동이 아닌 지역민 전체의 항일투쟁이었다"라고 평가했다.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따르면 충북 출신(본적) 학생운동 계열 독립유공자는 17명이다.

오용수(1922~?·영동)·윤병운(1927~1944·청주)·이상운(1927~1945·청주) 선생이 건국훈장 애국장을, 박선영(1925~2009·청주) 선생 등 4명이 건국훈장 애족장을, 안병구(1922~?·괴산)·이일신(1909~1988) 선생이 건국포장을, 권태응(1918~1951·충주) 선생 등 8명이 대통령표창을 각각 받았다.

이 가운데 이상운 선생은 이리농업학교에 재학하던 1943년 항일결사 화랑회를 조직해 대표로 활약했다.

무력봉기를 계획하던 중 1945년 4월 회원 전원이 일제 경찰에 붙잡혀 혹독한 고문에도 끝까지 항거하다 광복 한 달 전에 옥중에서 순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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