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충북대총학생회장 역임…학생운동 이유로 ‘제적’ 아픔
1994년 재입학후 학업매진…이후 KAIST‧KDI 연구자로 변신


학생운동 경력으로 2년간 수감생활을 해야했고 다니던 학교까지 제적 당했던 이현웅 한국문화정보원장의 스토리 있는 삶이 화제다.
다수의 386 운동권이 정치권으로 진출하거나 입장을 바꿔 뉴라이트로 변신했지만 이 원장은 재입학이라는 고난을 딛고 연구자로서의 삶의 기반을 닦았다.
KAIST‧KDI 연구원으로 일하며 도시정책의 전문성을 인정받았고 그 동안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지난 1월에는 문화체육관광부 산하기관인 한국문화정보원장에 발탁됐다.
도시정책 전문가인 이현웅 원장은 1988년 청주신흥고를 졸업하고 충북대학교 도시공학과에 입학했다.
전두환‧노태우 군사정권이 집권한 불의한 시기에 이 원장은 곧바로 민주화를 이루기위한 학생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91년 충북대학교 총학생회장에 당선됐고 곧바로 충북지구대학생협의회(이하 충북대협) 제5기 의장에 선출됐다.
충북대협의장을 맡았던 1991년은 혼란의 시기였다. 경찰 시위진압과정에서 당시 명지대학생이었던 강경대 군이 사망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어 성균관대 김귀정 씨도 시위 도중 사망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민주화를 갈망하는 학생사회의 분노는 치솟았고 그럴수록 노태우 정권의 탄압도 거세졌다.
충북지역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각종 시위를 주도한 이 원장에 대해 노태우 정부는 바로 수배조치를 취했다. 결국 이 원장은 구속됐고 2년이라는 긴 시간을 교도소에서 보내야 했다.
이 뿐만이 아니었다. 정부의 압박을 받은 충북대는 이 원장을 제적했다.
입학 8년만에 쓴 학사모
노태우 정권이 물러가고 세상은 문민정부로 바뀌었다. 하지만 군사정권이 내린 제적 조치는 철회되지 않았다. 그에게 주어진 것은 재입학. 1994년 재입학해서 1996년 학사모를 썼고 서울시립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개발연구원(KDI)에서 11년 동안 연구원 생활을 했다. 효율적인 도시운영, 도시경제정책 등이 이현웅 팀장의 연구분야였다. 2011년에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로 적을 옮겨 연구원으로 일하며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선 공공혁신전자정부연구센터 연구위원을 지냈고 (사)전자정부교류연구센터 전략기획본부장, (주)공공혁신플랫폼 이사장도 역임했다.
전문 연구분야는 도시정책이지만 빅데이터와 정보통신기술 등 4차 산업혁명 관련 분야와 공공 정보화, 전자정부 분야에서 연구 활동과 현장 경험을 쌓았다.
좌절하지 않고 연구자로서의 삶의 지켜온 이 원장의 행보는 또 다른 힘이 됐다. 이 원장의 연구자로서 이룬 성과를 높이 평가한 문화관광체육부(장관 도종환)은 올해 1월 전격적으로 한국문화정보원장으로 발탁하게 된 것.
이 원장은 취임하면서 “분권과 사람중심의 나라를 만들어나가는데 있어서 도시와 농촌이 동등한 문화생활을 향유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면서 “빅데이터나 정보통신기술의 측면은 물론이고, 찾아가는 박물관이나 이동식 극장 등의 콘텐츠로 문화 소외계층을 해소하겠다”고 했다.
“난 재개발의 아픔을 경험해본 사람”
고향 청주에 대한 이현웅 원장의 애정도 각별하다. 지난 2일 본보와 ‘와우팟매거진’이 제작하는 팟캐스트에 출연한 이 원장은 “청주는 나의 고향이기도 하고 언제 오더라도 따뜻함이 느껴지는 도시”라며 끈끈한 애정을 표시했다.
소외된 계층에 대한 애정도 표현했다. 이 원장은 “일찍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운천동 고인쇄박물관 터가 있는 곳이 어릴 적 살던 곳이었다”며 “그런데 동네가 개발되면서 그곳을 떠나게 됐다”고 말했다.
이 원장은 “도시정책 전문가이기도 하다”며 “도시는 그 안에 거주하는 주민들을 소외시키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한편 이현웅 원장은 이날 대농공원 내 다목적문화관에서 열리는 '반 고흐 미디어아트 청주전‘도 관람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