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직언직썰/ 오효진 소설가

오효진 소설가

한다하는 방송에서 한다하는 아나운서들이 말하는 소리를 여러 차례 귀담아 듣는다. 몇 번을 들어도 서로 다른 말을 똑 같이 발음한다. 세계(世界)-세개(三個)-세게(강하게)의 발음을 구분할 수 없다. 계-개-게는 분명히 서로 다른 글자고 당연히 다른 음가를 가지고 있어서 소리가 다르게 나와야 한다. 아나운서는 표준발음을 해서 국민들의 언어생활에 모범을 보여야 할 사람들이다.

나는 라디오 음악방송을 자주 듣는다. 거기서도 진행자인 아나운서는 비발디의 ‘사ː계(四季)’를 그냥 ‘사개’와 같이 발음해버리고 만다. 여기서는 또 한 가지 문제가 덧붙여진다. 길게 발음해야 하는 사(四)를 짧게 발음해버린 것이다.

아나운서가 이러니 다른 사람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어른들이 이러니 처음부터 우리말을 정확하게 배워야 할 어린이들도 당연히 따라 배우게 된다. 앞날이 어떻게 될지 쉽게 예측된다. 얼마 후엔 우리나라에서 예, 애, 에를 구분해서 발음하는 사람은 찾기 힘들 것이다. 장음과 단음을 구분해서 발음하는 사람도 거의 없을 것이다.

하긴 나도 오래 전에 실수를 범한 적이 있다. 1975년 우리나라를 방문할 수 없던 일본의 조총련 소속 재일교포들이, 한식(寒食)때 처음으로 성묘를 하러 조국 땅을 밟게 됐다. 이게 당시에 큰 뉴스였다. MBC 기자였던 나는 현장에 나가 마이크를 잡고, 오랜만에 고국 땅을 밟는 성묘단 소식을 전했다. 그날 밤 뉴스가 나간 다음에 나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나의 스승 이희승 선생님이 전화를 주셔서, 한식성묘단의 ‘한식’이 짧은 ‘한식’이 아니고 긴 ‘한ː식’이라고 가르쳐 주셨다. 참 민망했지만 고마운 일이었다.

에와 애의 발음상 문제와 장단음을 무시하는 현상은 이렇게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1971년, 이현복 전 서울대 교수는 서울을 비롯한 우리나라 중부지방에서 이런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고 발표했다. 또 1981년엔, 우메다히로유키 전 일본 도쿄대 교수도 같은 현상을 지적했다. 발표에는 단순한 현상만 적시됐다.

우선 이런 현상은 아주 좋게 볼 수도 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단순한 것이 분화해서 복잡해지기도 하고 반대로 복잡한 것이 단순해지기도 한다. 지금 우리말은 후자의 진행방향으로, 복잡한 것이 단순해져서 쓰기 편리한 쪽으로 나가는 것 같다. 즉 발전적 퇴보현상이 우리말에 일어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라는 프랑스 말도 이 발전적 퇴보를 거쳐 오늘날 유려한 프랑스 말이 됐다고 한다. 영어도 성(性)이 없어지고 수(數)도 단순화 되고 묵음화도 거쳐 발전했다. 우리말은 과거에도 이런 발전적 퇴보현상을 거쳤고 지금도 겪고 있다. 다른 한 편으론 복잡한 사회적 히스테리 때문에 일어나는 혼란의 산물로 볼 수도 있다.

어떻든 이런 문제를 정리한 뒤에 규범을 만들어서 국민들에게 방향을 제시해 주는 곳이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에 국립국어원이 있다. 어떤 정책적 제시를 하고 있는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얼마 전까지 KBS에 우리말을 바르게 쓰자고 계도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담당자가 은퇴한 뒤론 그 시간도 없어졌다고 한다.

우리말에 대한 정책적 결정을 내려야 할 것이 이것 말고도 많다. 남북정상회담 때 ‘리설주’와 ‘리수용’이 나왔는데, 북에서처럼 리설주 리수용이라고 해야 하는지, 우리 하는 대로 이설주 이수용이라고 해야 하는지. 북의 예를 인정한다면 북에 사는 이씨는 모두 리씨로 표기하고 불러야 하는지.

또 있다. 언제부턴가 개별적 성씨 문중에서 유(柳)를 류로 표기하고 있는데, 이걸 인정한다면 역사적 인물 유성룡도 류성룡으로 쓰고 불러야 하는지, 아니면 쓰기만 그렇게 쓰고 발음은 전처럼 유로 해야 하는지. 요즘 아나운서들도 유씨를 류씨로 발음하던데 이건 옳은 일인지. 가령 어디 김씨 문중에서 다른 김씨들과 구분하기 위해 우린 킴씨로 쓰겠다 하면, 그것도 온 국민이 따라야 하는지. 국어정책기관이 나서서 혼란을 정리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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