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나는 왜 그렇게 잘 우는지 모르겠다. 도심 한 가운데 쌓여있는 낙엽을 봐도 눈물이 나고 어느집 담장에 계절도 잊은체 피여있는 몇 송이의 넝쿨장미를 보면서도 운다. 어느날은 일곱번이나 운적이 있어 혹시 갱년기 우울증이 아닌가 문득 겁이 나기도 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정말 많이 울었다. 수술을 끝내고 병실로 옮겨오신 시어머님의 얼굴과 머리를 쓰다듬으며 소리없이 한참을 울다 식구들 한테는 간다온다 말도 없이 집으로 왔다. 그리고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운동화를 신고 모자를 쓰고 아침마다 오르던 산을 향해 혼자 천천히 걸었다.

산길로 접어들자 나무들은 앙상해져가고 산은 깊디깊은 생각에 싸여있어 바람많이 정적사이로 쉴새없이 돌아다니며 마른낙엽을 멀리 떠나보내고 있다. 쇠잔해진 들풀들 마저 옆으로 누워 쌓여가는 낙엽과 함께 긴잠을 자려하고 낙엽을 모두 떨군 나무 줄기 에서는 더 이상 물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며칠사이에 그리곱던 단풍잎들은 마른 낙엽으로 변해 있어 인생에 무슨 의미를 두려고 노력할수록 허무의 수렁에 빠지는 것처럼 고독하고 쓸쓸해진다. 숲속에 쌓여있는 낙엽을 밟으며 나를 뒤돌아본다.

이십대의 발랄함과 화려함을 접어두고 한집안의 며느리로 아내로 또한 두아이의 어머니로 살아온 지난날들이 내게 남겨준것은 무엇이며 내가 해야할일은 제대로 했는지..나는 올바르게 해놓은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며칠전 시어머님이 자궁과 난소절제수술을 받아야 해서 병원에 입원한다는 전화를 아버님이 하셨다. 마치 물기에 젖은 낙엽을 밟는 소리처럼 무겁고 갈아 앉은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면서 마음이 아팠다. 아침일찍 병원으로가 수술실 앞에서 다섯시간을 기다렸다가 나오시는 어머님을 봤다. 고통에 눌려 신음소리만 내시는 그분의 손을 잡으니 마른낙엽처럼 꺼칠하고 바스락 거린다.

나는 눈물이 쏟아졌다. 그동안 며느리 보다는 딸의 입장에 서서 이해하고 잘해드리려 내 나름대로 노력은 했지만 그것이 그리 쉬운일은 아니었다. 살아가면서 때로는 너무 힘들어 외면하고 싶을때도 있었고 너그럽지 못해 베풀줄도 모르는 오만과 그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사소한 일에도 마음을 닫을때도 있었다. 나는 통곡을 하고 싶었다. 가을풀잎처럼 시들어 가는줄도 모르고 내 아픔만 생각하고 살아온 회한 때문에 가슴이 미어진다.

생로병사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네가지 고통이라고 불교에서는 말한다. 늙고 병이 드는것은 당연하다고 하지만 어머님의 병이 깊어진 것은 전적으로 내 탓인것 같아 잘해 드리지 못하고 지나온 날들이 후회스럽고 부끄럽다.

산등성이에 오르니 해는 마지막 불꽃을 태우며 자취를 감추려하고 서녘하늘에는 노을이 잔영이 눈부시다. 나는 상처입고 빈가지만 흔들고 서 있는 상수리 나무를 끌어안고 살며시 얼굴을 대본다. 나무에서는 온기마저 감돌고 격해있던 마음까지도 갈아안혀주는듯해 마치 자식들 한테 모두 내어주고 빈껍데기로 남아있는 어머님을 보는것같이 또다시 눈물이 쏟아진다.

쌓여있는 낙엽위로 붉은 노을은 서성이고 바람은 마른낙엽을 몰고 산골짝으로 내려가 영원한 잠을 재우려한다. 그 모습은 우리 모두의 황혼을 보는듯하다..
낙엽을 밟으며 사람이 살아가야하는 길을 되세겨보며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떠나버리는 이 가을이 마냥 허허롭지많은 않을것이리는 기대는 봄이되면 새싺이 돋는 풋풋함이 낙엽속에서 숨쉬고 있기 때문일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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