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격외도리/ 한덕현 충청리뷰 발행인

한덕현 충청리뷰 발행인

지난 19일 유엔총회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의 세계시민상 수상 연설에서 유독 귀를 자극했던 말이다.

이날 문 대통령은 한국의 민주주의 과정을 언급하던 중 “국민의 마음속에 뿌리내린 민주주의가 광장을 열었고 그 광장에서 국민은 시대의 흐름을 독재에서 민주로 바꿔냈다”며 “소수의 저항에서 다수의 참여로 도약한 한국민주주의는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힘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소수의 저항에서 다수의 참여로’라는 말의 원전(原典)이 어디 따로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심야에 생중계로 이를 듣는 순간 참 많은 생각들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좀 과장되게 말하면 이 말의 의미속에는 지금 우리가 누리는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모든 것이 녹아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우리나라 민주주의 과정이 소수의 저항을 거쳐 다수의 참여로 진화했다는 논리는 백번이고도 맞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 소수의 저항으로 인해 참으로 많은 사람들을 죽게 하고 또 다치게 했다. 4.19를 거쳐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6월 항쟁에 이르기까지 이를 이끌었던 힘의 근원은 다름아닌 깨어있는 양심, 행동하는 양심으로 무장한 ‘소수의 저항’이었고 그럼으로써 그들은 죽음과 시련, 고난이라는 업보를 스스로 자처하며 한많은 삶을 감수했던 것이다. 숱하게 얻어맞고 죽어나갔다.

이렇듯 물리적 체제에서 ‘소수(少數)라는 단어는 숙명적으로 상대적 박탈감을 안게 된다. 우선 시민사회 의사결정의 가장 요체인 다수결 원칙을 준용한다면 소수의견의 입지는 극도로 좁아진다. 사안의 결정권에서 소외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법적인 전원합의체 구조에선 아예 무시되거나 폐기되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그동안의 숱한 역사는 이러한 소수를 다수로 포장된 기득권의 희생양으로 삼아 유지돼 왔다. 그 기득권이라는 것은 국가권력이 될 수도 있고 작은 이익집단의 이른바 주류일 수도 있다. 하지만 소수의견이라고 해서 그 것이 인류문명과 사회의 보편적 가치에 역행한다고 보면 큰 오산이다. 다수의견에 대척하는 현 시점에서의 상대적인 고립일 뿐이지 그 존립자체를 말살당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도 종종 논란이 되는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의 심리에서 판결의 최종 주문과는 상반되는 소수의견, 즉 반대의견을 당사자와 함께 반드시 표시토록 관련법에 명시한 것도 여기에 근거한다. 소수의견은 현재를 기준해 다수의 지지를 얻지 못할 뿐이지 그 것이 궁극적으로 틀리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쉽게 말해 서로 다를 뿐이지 그릇된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언젠가는 소수의견이 다수의 견해로 교체될 수 있다. 예를 들어 혼인빙자간음죄에 대해 2002년 헌법소원에선 단 한 명의 재판관만이 반대의견을 냈지만 7년 뒤에는 재판관 다수가 헌법불합치 판정을 내리는 바람에 폐지됐다. 헌법재판소 판례에서 소수의견이 다수의견으로 바뀌는 시간은 평균 7.3년이라는 조사까지 나았다.
 

국정농단에 항의하는 광화문 촛불시위 장면

언론취재와 보도에서도 소수의견과 소수의 목소리는 마지막까지 존중된다. 만약 100명의 사람중에 99명이 이득을 보고 단 한명이 손해를 본다고 한다면 언론은 이 한 명의 외침과 입장을 간과해선 안 되는 것이다. 그가 약자라서기보다는 그 소수의견이 사회적 가치에 원초적으로 반한다고 단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가권력은 이같은 소수의 의견과 소수의 저항에 항상 배타적이다. 그러면서 철저하게 탄압한다. 기득권을 침탈당하기 때문이다. 노벨평화상에 빛나는 아웅산 수치여사가 소수민족 탄압으로 세계로부터 미움을 받는 이유도 바로 이 것이다. 우리나라에선 실로 오랫동안 이같은 소수의 저항을 총칼로써 다스렸다. 소수의 주장은 무조건 불온한 사상으로 매도해 친일 기득권층의 빨갱이몰이에 악용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남북한 평화를 말하는 대통령조차 그들은 김정은의 기쁨조라고 상처를 내려 안간힘이다.

‘소수의 저항에서 다수의 참여로’라는 말은 이러한 악순환을 끊는 단초가 된다는 점에서 귀가 번쩍 뜨인다. 그 구체적 실현을 우리는 지난 번 촛불혁명에서 분명히 확인했다. 국민들이 다수의 참여로 민주주의를 외침으로써 거꾸로 가던 역사의 수레바퀴를 정상으로 되돌려 놓을 수가 있었다.

그런데도 수구세력들은 이를 거부하며 자신들이 과거에 누렸던 영화를 되찾고자 끊임없이 국민들을 현혹하고 이간질시킨다. 자신들의 견해를 다수의 의견으로 위장하면서 작금엔 북한과의 전쟁불사를 외치면서 다시 과거로 회귀하려 안달이다.

하지만 소수의 저항이 다수의 참여로 변천해가는 21세기형 한국적(?) 민주주의를 경험한 국민들은 더 이상 속지 않을 것이다. 여차하면 오히려 더 광장과 거리로 나설 것을 벼르고 있고, 스마트폰을 눌러대면서 저들의 모든 것을 감시하려 한다. 지난날에는 그들이 소수의 저항을 압제와 폭력으로 짓밟으며 국가권력을 독점, 향유했지만 지금은 국민들의 다수가 참여정치를 생활화하며 국가권력을 국민의 것으로 되돌려놓고 있는 것이다.

소수의 의견, 소수의 저항은 이제까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일구고 또 이를 지켜왔다. 하지만 앞으로는 어렵다. 우리는 그 이유를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과 광화문의 촛불혁명으로 확실하게 깨우쳤다. 소수의 저항에서 다수의 참여로 발전되어가는 우리의 민주주의는 내년 지방선거에서 또 한 번 불을 지필 것이다. 이번에는 반드시 사이비·가짜 정치인과 친일잔재, 부도덕한 X들을 심판하는 것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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