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식의 ‘톡톡 튀는 청주史’

불편한 기억들

조선시대 읍치에서는 3단 1묘가 기본으로 운영됐다. 문묘文廟는 향교의 대성전을 일컫는 것으로, 현재도 온존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사직단社稷壇·성황단城隍壇·여단?壇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사직단은 지금의 사직동 충혼탑이 자리하는 곳으로 동명洞名에도 남아있다. 성황단은 현재의 와우산 자락이거나 당산공원으로 추정되며, 여단은 내덕동 성당 자리가 아닐까 한다. 왕조의 상징이었던 이들 시설들은 조선의 멸망과 함께 자취를 감췄다.

그 터전에 왕조의 멸망과 함께 새로운 시설이 들어섰다. 지금의 사직동 충혼탑 자리는 옛 사직단이 있던 곳이다. 당시 지방관은 왕을 대신에 토지신과 곡식을 맡은 신에게 매년 두 차례 제사를 올렸다, 그리고 가뭄이 들거나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도 때때로 올렸다. 그곳이 해방 후 현충顯忠의 공간이 됐다.

얼핏 제향의 공간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사직단이 농본주의를 지향한다는 점에서는 충혼탑과는 차이를 보인다. 그런 이곳이 청일, 러일전쟁 당시의 전몰장병을 추모하던 공간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옛 사직단 자리에 들어선 현재의 충혼탑. 일제는 사직단을 없앤 후 이곳에 일본 전몰군인을 추앙하는 공간으로 바꿨다.

『청주연혁지』(1923)에 따르면 지금의 사직동 충혼탑 자리에는 과거 청일·러일전쟁 당시 전사한 일본군을 위한 위령탑이 위치했다. 일제는 전통시대 사직단이 있던 곳에 식민지 침략군을 위한 위령 시설을 세웠다. 그곳이 해방 후에도 전몰장병을 추앙하는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편 충북학생도서관에서 충혼탑으로 오르는 계단 옆에는 ‘천지신단天地神壇’ 비가 있다. 이 비는 일제가 1930년대 농촌진흥운동의 일환으로 세운 건조물이라는 사실을 최근 밝혔다. 이 비는 수탈과 압제로 상징되는 일제 식민지 정책의 산물이다.

천지신단비의 원형은 충북대학교 교정에 자리한다. 그런데 이 비는 사직단이나 전통시대의 신앙과 관련된 유물로 잘못 알려져 왔다. 충북 영동군의 사례를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일제는 신단神壇을 중심으로 촌락민 신앙심 유도, 민심 통제, 내선인 융화, 농민정신의 작흥훈련, 생산개량증산 등의 정책을 추진했다.

또한 <부산일보釜山日報> 1935년 7월 31일 자에는 구체적으로 신단 건립의 목적 및 제원 등의 내용이 상세히 실려 있다. 이를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 충북대학교 내에 위치하는 천지신단비다.
 

충혼탑에 오르는 계단 옆의 천지신단비와 상석. 단순히 천지신 단비가 우리의 전통이라 잘못 이해한 지역 유지들이 1990년대 다시 만들어 세웠다.
충북대학교 박물관 앞 잔디밭에 옮겨놓은 천지신단비. 학교에서 만든 안내판에도 우리의 전통 문화유산이라 하였다.

신문 기사는 비의 제원을 높이 3척尺이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지금 남아있는 천지신단비의 실제 크기는 훼손된 이수 부분을 제외하면 높이 109cm이다. 비면 크기는 77×42cm이다. 비문의 앞면에는 ‘천지신단’, 뒷면에는 ‘을해구월오일乙亥九月五日…’이라 하였다. 을해년은 <부산일보>의 기사에 보이는 1935년이다.

해방 후 이 비 또한 훼손되어 방치되다가 충북대학교로 옮겨졌다. 이런 정황을 알 수 없었던 지역 유지들은 얼마 전 충혼탑을 오르는 계단 옆에 새롭게 천지신단비를 세웠다.

식민정책의 정수, 신사神社

한때 신사, 대신궁이 일본 전몰장병의 추모지인 지금의 충혼탑에 자리하기도 했다. 청주신사는 건립 이후 여러 차례 자리를 옮기게 되나 건립 연대와 이전시기에 대해서는 자료에 따라 다소의 차이를 보인다. 처음 신사가 들어선 곳은 당산이다.

일제 식민정책 중의 하나는 조선의 상징적인 공간 안에 공원을 만드는 일이었다. 이같은 정책에 따라 청주읍성을 헐고 감영과 병영 자리에 중앙공원을 만들었다. 그리고 당산에 동공원東公園, 사직단에는 서공원을 만들었다.

일제는 앞서 1909년 당산에 신사神祠를 건립하였다. 청주신사는 일본인들의 ‘경신숭조敬神崇祖’와 식민정책의 사상적 기반으로 자리하였다. 그런데 신사에 세워지기 이전 이곳에는 이미 모충단慕忠壇이 있었다. 모충단은 갑오농민전쟁 당시의 전몰장병을 모시기 위해 1894년 남석교 밖에 단壇을 만들면서 비롯됐다.
 

지금의 명장사 자리에 있었던 1920, 30년대 청주신사. 일왕의 생일을 맞아 기념행사 후의 모습이다. ⓒ강전섭

이후 모충단은 1903년 당산으로 옮겼고, 1914년에 사우를 갖춰 모충사라 하였다. 따라서 당산에는 모충사와 신사가 한동안 공존했다. 한때 신사는 1915년 서공원인 사직단 근처로 옮겨졌다가 1918년 다시 당산 정상부로 이전했다.

이후 당산의 신사는 다시 지금의 대한불교천태종 명장사 자리로 옮겨졌다. 신사가 가파른 정상에 위치하면서 참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신사는 1922년(혹은 1923년) 당산 아래에 터를 마련했고, 1926년에는 지목이 임야에서 사사지社寺地로 변경됐으며, 소유를 충청북도지방비忠淸北道地方費라고 했다.

소유주는 1936년 민영은閔泳殷을 거쳐 1982년 대한불교천태종(명장사)으로 바뀌었다. 1936년 신사터의 소유주가 바뀐 것은 신사가 지금의 대한불교수도원 자리로 이전하였기 때문이다. 청주신사는 1935년 민영은 소유의 수도원터로 옮겨 가면서 민영은은 옛 신사터를 매입하였다.
 

최근 명장사는 이 자리에 새로이 건물을 세웠다. 중앙 계단을 통해 신사에 오르던 그대로다. 사진으로 남아있는 신사의 자취를 이제 찾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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