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운전석’에서 펼치는 대리 사회학, 김민섭의 <대리사회>

나는 읽는다 고로 존재한다
류정환 시인, 충북작가회의

대리사회 김민섭 지음 와이즈베리 펴냄

“대리 불렀어. 곧 갈게.”, “대리 기사님 오셨어. 곧 갈게.” ― 음주 때문에 대리기사를 요청하고, 기사가 도착해 출발하면서 집으로 전화하는 풍경은 대한민국 사회에서 아주 낯익은 것이다. 운전자라면 누구나 겪어보았을 법한 ‘실제상황’이다. 그렇다면 두 발화에 사회적 의미가 담겨 있을까? 있다면 어떤 의미가 있을까?

<대리사회>의 저자는 두 발화의 차이를 ‘타인의 주체화’ 여부에서 찾았다. 전자는 주체와 타자의 선을 엄밀하게 긋는 말이고, 후자는 자신의 공간에 들어온 타자를 주체화 하여 동등해지는 발화라는 것. 어느 쪽이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춘 말인지는 삼척동자도 알 만한 것이지만, 우리는 전자의 화법에 익숙하다.

저자는 대학원에서 현대소설을 공부하던 사람이다. 하지만 세상이 그를 알아준 건 ‘309동 1201호’라는 필명으로 펴낸 책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때문이었다. 그는 시간강사로서 또 연구자로서 강의실과 연구실이 세계의 전부임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8년 동안 살았다. 그러나 그 일을 ‘직업’이라고 할 수 없고 자신을 ‘노동자’라고 할 수도 없음을 깨닫고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라는 글을 쓰며 자신의 삶을 성찰했는데. 들여다보면 볼수록 신성하고 숭고한 공간이었던 대학은 신자유주의 시스템을 통해 노동력을 착취하는 ‘괴물’이었다.

“지식을 만드는 공간이 햄버거를 만드는 공간보다 사람을 더 위하지 못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 맥도날드에서 1년 3개월을 일한 끝에 얻은 문장은 몸으로 쓴 글의 미학이 어떤 것인지 잘 보여준다. 절체절명의 선택, 그는 SNS에 발표한 <나는 오늘 대학을 그만둡니다>라는 글과 함께 대학을 탈출했다. 세상의 관심을 한껏 받으며.

<대리사회>는 대학에서 걸어 나온 저자가 대리기사로 일하며 거리에서 사유하고 기록한 결과물이다. 그는 우리 사회를 ‘거대한 타인의 운전석’으로 규정한다. 그 누구도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서 행동하고 말하고 사유하지 못하게 하는 공간, 한 개인의 주체성을 완벽하게 검열하고 통제하는 공간이 대리기사가 앉은 ‘타인의 운전석’이다. 누구나 한번쯤 대리기사에게 운전석을 맡겨본 경험이 있을 테니 그 미묘한 상황을 떠올리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노동·통제·소외·빈곤에 관한 사유

대리는 운전석에 앉았지만 아무런 권한이 없다. 침묵이 어색하다고 라디오를 켤 수 없고, 더워도 에어컨을 켤 수 없으며, 술냄새가 역해도 창문을 열 수 없다. 그저 액셀과 브레이크를 밟고 깜빡이를 점멸하며 운전을 할 뿐, 그 무엇도 허락 없이 할 수가 없다. 손님(차의 주인)에게 먼저 말을 건넬 수도 없다. 차의 주인이 먼저 말을 걸어와도 웬만해선 내 의견을 피력할 수 없고, “예. 그렇죠. 맞습니다.” 정도로 화답하며 웃을 뿐이다. 마음대로 말하고 행동할 수 없는데 판단하고 사유할 필요가 있을까? 적어도 대리로 운전석에 앉아 있는 동안은 영혼이 필요 없는 것이다. 없으면서 있는 사람으로서 로봇처럼 주어진 일만 정확하게 해내면 그만이다.

운전을 마치고 ‘타인의 운전석’에서 빠져나오면 자유인이며 온전한 주체인 나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 일을 반복하다 보면 익숙해진 몸이 돌아오지 않고 ‘대리’라는 말에 붙들려 있다. 그렇게 ‘타인의 운전석’에 순응해 버린 몸과 영혼은 다른 어떤 공간에서도 주체적으로 행동하고 말하고 사유하지 못한다. 존재 자체로써 대리를 완벽하게 통제하는 손님 또한 어느 공간에서 대리노동에 길들여진 사람이며, 가장 높은 곳에서 이 사회를 통제고 있다고 믿는 사람 역시 사회의 욕망을 대리하는 존재일 뿐이다. 결국 우리는 너나없이 대리인간으로 존재하며 주체자로서 운전석에 앉아 있다는 착각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음을, 저자는 조곤조곤 들려준다.

얼치기로 배운 사람이 쉬운 걸 어렵게 설명하는 반면 공부가 깊은 사람은 어려운 걸 쉽게 설명한다. 머리에 의존해 이해한 지식과 노동으로써 몸에 새긴 지혜는 그렇게 천양지차로 다르다. 저자는 햄버거 가게에서 노동하며 대학 밖에 더 큰 강의실과 연구실이 있음을 깨달았다고 고백한바 있다.

그래서일까, <대리사회>의 미덕은 무엇보다 쉽다는 것이다. 저자가 대리기사로 입문하여 좌충우돌 적응하고 노하우를 축적해 가는 이야기도 뭉클하고, 천태만상 손님 이야기를 읽으며 함께 웃으며 혀를 찰 수도 있다. 냉혹하면서도 때때로 따뜻한 대리 업계의 생태계를 엿보는 흥미진진함은 또 어떤가. 그렇게 담담하고 고요한 문장 속에 노동, 통제, 소외, 빈곤, 시스템에 관한 사유를 절묘하게 녹여 놓았다. ‘나는 여기서 무엇인가!’ 스스로 묻지 않으면 이 사회에서 주체성을 상실하고 유령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역설이 자꾸 가슴을 두드리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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