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순창 사무금융노조충북본부 지도위원

홍순창 사무금융노조충북본부 지도위원

 

2005년 12월 17일, 홍콩 빅토리아 공원 앞. ‘비아 캄페시나’(번역 : 농민의길. 농민운동가들의 세계조직)가 선두에 서고 구호를 외치며 행진이 시작됐다. 선두 ‘비아 캄페시나’ 뒤에는 한국에서 온 농민들과 노동자들이 뒤를 이었다. 이들이 외치는 구호는 “NO TO WTO, 다운 다운 WTO" 그리고 ”공이사이모“였다.

그들은 WTO 각료회의가 열리는 컨벤션 센터로 한 걸음 한걸음 행진을 시작했다. 홍콩경찰은 바리케이트를 치고 행진대열을 막았다. 일부 농민들은 행진대열을 바꿔 완차이 항구로 향했고 이어 차가운 겨울바다로 뛰어들었다.

행진대열에 있는 사람들은 분노를 품고 있었다. 홍콩 경찰이 최루액을 뿌려수록 시위대열의 저항은 더 거세졌다. 바리케이드가 무너지고 컨벤션센터로 가는 길이 뚫렸다.

경찰의 반격도 거세졌다. 길가에는 피가 뿌려졌다. 전농충북도연맹 사무처장이었던 이상정 씨의 머리에서 피가 솟구쳤다. 농협 노동자 홍순창씨의 머리에서도 붉은 액체가 쏟아졌다.

홍콩경찰은 고무총탄을 쏘며 사람들을 하나 둘 연행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잔인했다. 건설현장에서 쓰이는 케이블타이로 사람들의 손을 등 뒤로 묶어 끌고 갔다. 홍순창, 이상정, 김원만, 김상열... 그들은 낮선 이국의 경찰서 유치장에 감금됐다.

곡 12년 전의 일이다. 흐른 시간의 깊이 만큼 그때 그 사람들의 모습도 변했다. 농민운동가 이상정 씨는 음성군의원이 됐다. 케이블타이에 묶였던 김상열씨는 시골 중학교 교장선생님이 됐다.

수감번호 'SAF000001' 홍순창(남보은농협 근무‧56)씨도 이제 정년을 생각하는 나이가 됐다. 그만큼 시간이 흘렀다.

홍순창 전국농협노조 제2‧3대충북지역본부장. 그는 항상 선두에 섰다. 2001년 충북지역 농협에 노동조합 바람이 불었다. 보은분회에서 제일먼저 노조가 만들어지고 청주, 옥천, 진천에서 들불처럼 노조가 만들어졌다. 홍 전 본부장이 있었던 탄부농협에도 바람이 전해졌다. 그는 탄부농협분회 초대 사무국장이 됐다.

2002년 흩어져 있던 각 농협 노조가 모여 충북본부가 결성됐다. 홍 전 본부장은 농협노조 충북본부의 사무국장이 됐다. 1년도 안돼 깃발을 들었던 본부장이 다른 선택을 했다. 누군가는 그 자리를 메워야 했다. 홍 본부장은 기꺼이 그 자리를 채웠다.

그에게 농협의 노조란 무엇일까? 홍 전 본부장은 편하게 말했다. “노조는 직장 생활의 (모범) 정답이다.” 이게 무슨 말일까?

홍 전 본부장은 “만약 노조가 없다고 생각해보라”고 말했다. 그는 “ 노조가 없었다면 임금피크제도 이미 도입됐을 것이다. 인원 감축하는데 노조가 없었다면 (사측이 원하는) 그대로 됐을 것이다”며 “노조가 있으니 잘못된 것에 대해 항의라도 하지 않냐”고 말했다.

최근 분회에서 한 일을 언급했다. 그는 “비수기, 성수기 가리지 않고 토요일과 일요일에 당직 근무를 강제로 시킨다. 직원을 줄여놓고 당직을 돌리니 직원들은 토요일과 일요일이 없다. 농민들은 조금 편하겠지만 우리도 사람이다”고 말했다.

그는 “쉴 때 쉬어야 하는데 쉬지 못했다. 그래서 노조가 협상을 통해 4월과 5월 바쁜 기간에만 주말에 근무를 하기로 했다”며 “노조는 직장생활에서 내 고충을 해결하고 힘이 돼주는 좋은 친구같다”고 말했다.

홍 전 본부장은 14일 ‘지도위원’이 된다. 농협노조에서 이름을 바꾼 사무금융노조 후배들이 그의 활동을 기려 ‘지도위원’으로 위촉한다. 그는 지도위원이 조금 부담스럽다. 홍 전 본부장은 “난 능력도 안 되고 자격도 없다”며 “아직 정년도 6년이나 남았는데...”라고 말을 흐렸다.

지도위원으로 위촉되는 것이 부담스럽다고 했지만 결코 싫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가 농협노조와 함께 한 지난 시간을 회상했다. 이 과정에서 다자간 무역협상이 진행된 2005년 홍콩 WTO 각료회의 저지 투쟁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노동조합을 통해 제일 먼저 했던 것은 위에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직장내 풍토를 바꾼 일이라고 했다.

홍 전 본부장은 “노조를 통해 개선한 것이 많다. 노조가 있기에 임금인상도 더 했다”고 말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 지난해 진행한 상임이사 퇴진 투쟁을 꼽았다. 지난해 남보은농협 노조분회는 직위를 이용해 자신의 아들을 더 좋은 곳으로 전적시킨 모 상임이사의 퇴진을 요구하며 투쟁을 벌였고 결국 농협대의원총회서 해임이 가결됐다. 이 일은 지역 언론에 대서 특필됐고 ‘금수저 흙수저 ’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홍 전 본부장은 노조를 떠난 동료들을 이야기 할 때는 허공을 응시하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한숨을 들이 쉰 후 그가 말을 꺼냈다.

“친구가 얼마 전 목욕탕에서 쓰려져 죽었어. 인생 참 허무해. 그날 술도 많이 먹었어. 난 노조를 하든 안하든 즐기고 살자는 주의야. 맘 터놓고 사는 친구도 필요하고 집에서 부인하고 애들하고 즐겁게 살아야 되잖아. 직장동료, 학교 친구 주변 모두와 즐겁게 사는 게 가장 큰 진리라고 생각해.”

후배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말하고 노조에도 더 적극적이었으면 하는 바램도 드러냈다. 홍 전 본부장은 “여러 어려움을 겪으면서 충북본부와 분회 모두 많이 단단해졌다고 생각한다”며 “농협과 노조가 잘 되려면 젊은 후배들이 많이 가입해야 한다. 그리고 더 많은 목소리를 내야한다”고 강조했다.

1987년 농협노조에 입사해 받은 첫 월급이 10만원이 안됐다는 그는 “지금 당장 퇴직해도 여한 없다”고 말했다. 14일 그런 그에게 후배들이 ‘지도위원’란 의미있는 직함을 선물한다.

김구 선생은 말했다. “눈길을 걸어갈 때 어지럽게 걷지 않기를! 오늘 내가 걸어간 길이 훗날 다른 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홍 전 본부장이 걸어온 길이 꼭 그랬다. 백지장처럼 하얀 눈 밭에 농협노조란 족적을 남겼다. 비록 그의 발자욱이 잠시 흔들릴때도 있었지만 그의 발걸음은 늘 앞을 향했다.

홍순창 사무금융노조충북본부 지도위원

홍순창 사무금융노조충북본부 지도위원

1963년 출생

보은중‧보은농고 졸업

1987년 탄부농협 입사

2001년 농협노조 탄부농협분회 사무국장

2002년 농협노조 충북본부 사무국장

2003년 농협노조 충북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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