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착하고 발랄, 학교에서는 과분한 대접받아
나의 현지어 실력과 학생들 학습태도 때문 고민

안남영의 赤道일기(8)
전 HCN충북방송 대표

“안녕하세요?”
참 정겨운 말이다. 근데 예전엔 미처 몰랐다. 국내에선 그저 의례적 인사말일 뿐 호감의 표시로 읽히지 않아서이리라. 그러나 인도네시아에서 듣는 이 말은 지순한 호감을 전하려는 웅숭깊은 신호다. 설사 재미삼아 던진 말이라도 정겹다. 만면에 미소 띤 표정까지 읽고 나면 ‘국뽕’을 맞는 기분이랄까?
 

아이들은 한지에 붓글씨를 써 보는 체험을 참 좋아했다. 더러 한글로 자기 이름을 쓸 줄 모르는 아이들에게는 내가 이름을 적어 줘야 했다.

그래서 이곳 전통대로 손을 내밀어 내 손을 가져다가 자기 코에 맞추는 예를 갖추거나, 먼발치에서 큰소리로 하는 인사를 받을라치면 바닥난 원기가 급속 충전된다. 한국어를 어디서 접했는지 그 인사말을 배워갖고는 반가이 건네는 게, 아주 기특하기도 하고 사랑스럽다. 흐뭇하고 뿌듯하지 않을 수 없다. 해외봉사를 자원한 보람이 이런 건가 싶다.

아이들은 대부분 착하고 순박하고 발랄하다. 그런 아이들에게 내가 어떤 의미 있는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는 게 감사해야 할 일이고 보답해야 할 짐이라 기꺼이 여겼다. 교사들도 내게 각별한 예우로 호의를 베풀려고 하는 게 역력하다. 눈인사로 그치는 법 없이 늘 이를 드러낸 미소가 말해준다.

학교에서는 외부에서 단체 손님이 오거나 하면 굳이 나를 앞세워 영접하고 장황하게 소개를 한다. 물론 일종의 학교 홍보 수단으로 활용하는 측면도 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교내 행사 때면 상석을 권한다. 대부분 사양지심을 발휘하지만 가끔 거북하고 불편할 때도 있다. 자원봉사자로서는 과분한 노릇이기에. 어쨌든 나에 대한 관심은 곧 한국에 대한 호감이려니 여기며 가능한 한 밝은 표정을 짓고 허리를 숙이는 등 되도록 조신한 몸가짐에 신경 써 왔다. ‘한류 전도사’의 본분에 맞게 말이다.

낮은 학업 성취도, 어째야 하나

“그런데 정말 나는 한류 전도사가 맞을까?” 한국어 수업이 있는 날마다 나는 이 말을 떠올리며 내 머리를 쥐어박기 일쑤다. 한국어 교습을 통해 한국문화를 알리고 한류 확산에 일조한다는 것은 이곳에 오기 전부터 나의 목표이자 실천과제였다. 그러나 막상 당면한 현실은 달랐다. 즐겁지만 힘겨워서 회의가 들 때도 없지 않았다. 아이들의 호기심과 실제 학습 태도는 전혀 별개였다. 한국어 학습의 목표가 없어서일까, 한국어가 워낙 어려워서일까, 아니면 한국어 교사의 자질이 부족한 때문일까?
 

작년 여름방학 특강에 참가한 아이들 중 한국어에 대한 관심이 가장 많고 똑똑한 아이들. 나중에 한국으로 초청하면 이들이 얼마나 좋아할까?

이유는 나의 현지어 실력과 아이들 학습 태도 두 가지. 어쩌면 모든 게 나의 부족한 현지어 구사 능력 때문인지도 모른다. 더듬거리는 실력으로는 수업 진행에 요령부득을 면치 못하고 결과적으로 ‘교실장악’도 불가능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당연히 아이들의 학업 성취도가 기대에 턱없이 못 미쳤다.

실제로 한 학기가 지나도록 한글 자모를 깨우치지 못한 아이들이 약 70%에 달했다. 물론 한국어교재를 사용하지 못해 학습 효율을 기하기 어려웠던 탓도 있겠다. 하지만 현지어로 쉽게 설명하지 못하는 능력 한계로 자괴감과 후회가 밀려드는 건 도리 없다. 대학교 때 한국말을 전혀 못하는 프랑스인의 회화 수업이 어려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현지어는 몰라도 목적언어 교습엔 문제없다는 교수(敎授) 이론도 우스웠다. 또 한글이 알파벳 쓰는 외국인한테는 ‘외계문자’나 다름없이 아주 어려운 글자인 줄 미처 몰랐다.

한글 자모음은 겨우 40개에 불과하다, 정신 차리고 외우면 한 나절에 다 깨우칠 수 있다잖는가? “자모음 형상은 교실 등 어디에서든 찾아볼 수 있다”, “중국이나 일본 글자에 비하면 훨씬 쉽다” 등을 강조해 본들 별무소용이었다.

아이들은 한글 자모가 비슷비슷하게 생긴 것을 어려워했다. 영문 알파벳처럼 자모음을 나란히 이어 쓰는 것과 달리, 한글의 음절구성 방식이 낯설기는 하겠지만 이해하려고 좀처럼 두뇌 쓸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받침은 반드시 밑에 써야 한다는 말도 허투루 듣고는 그예 옆에다 쓰는 아이들이 의외로 많다. 수없이 연습시켰는데도 한 학기가 다 되도록 자음 밑에 써야 할 ‘ㅗ,ㅜ,ㅡ’ 같은 수평모음을 ‘ㄱㅗ, ㄴㅜ’ 식으로 자음 옆에 버젓이 쓴다. 자음 ‘ㅇ’은 모음 앞에서 음절 형태를 갖추기 위해 쓰이고 이땐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설명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예를 들어 한글로 이름을 써 보라 하면 ‘아프릴(April)’이어야 할 것을 ‘ㅏㅍㅡ리ㄹ’로 적는 식이다. 그뿐인가, 이 나라 말에 없는 조사의 기능을 설명하고 받침에 따라 ‘은/는’, ‘이/가’를 가려 써야 한다는 걸 몇 차례씩 설명하고 반복 연습시키다 보면 목이 아플 정도다. 발음 교육은 의외로 모음 ‘ㅗ’에서 애 먹었다. 이들에게 발음시켜 보면 대부분 ‘ㅜ’에 가깝게 발음한다. 입술을 모으고 혀와 턱을 ‘ㅜ’보다 더 내리라고 해도 그때뿐이다.
 

작년 수업분위기가 그 중 괜찮았던 요리3반 아이들. 행사 때문에 교복 대신 예쁜 사복을 차려입고 등교한 날 일부러 기념촬영을 했다. 예닐곱 명은 빠졌다.

초등학교 교실 같은 분위기

물론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처음 배우는 아이들에겐 어려울 수 있겠다. 머리에 쏙쏙 집어넣는 설명도 못되는 데다, 행사다 뭐다 해서 휴강과 결석이 잦으니 아이들 머릿속에 남아 있을 게 뭔가? 답답한 아이들을 볼 때마다 미안함이 앞서기도 한다.

그러나 뭐 때문에 앉아 있는지 모르는 애들을 보는 건 괴로울 일이다. 수업 중 먼산바라기도 많지만, 어떤 기본자세를 갖춰야 하는지조차 모르는 학생들이 수두룩하다. 떠드는 건 기본이고 제멋대로 자리를 옮기는 아이들, 화장 고치는 아이들, 휴대폰에 얼굴을 박고 있는 아이들까지 거슬리긴 마찬가지다. 수업이 시작됐는데 공책조차 펼 생각을 않고 있는 아이들도 적지 않다. 초등학교 교실이 그럴까? 한국도 교실이 붕괴됐다는데, 과연 어떤지가 궁금하다.

수업 시작 전 화장실 간다, 쓰레기를 버린다며 우르르 몰려 나가서는 안 들어오는 일도 많다. 허락을 구하는 아이들은 그래도 양반. 판서하다 보면 슬며시 말도 않고 나가 버리는 학생도 이따금 있다. 처음 한 학기 동안 10학급 중 전원이 출석했던 반을 본 적이 없다. 비가 몹시 많이 내린 어느 날 호텔반. 3분의 1이 결석했다. 또 한 번은 30명이 넘어야 할 교실에 10명도 안 됐다. 나머지는 복도 끝의 기도실에 기도하러 갔다는 것이다. 의심스러워 기도실로 일부러 찾아가 봤다. 기도하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전부는 아니었다. 상당수가 땡땡이 친 것이다. 어느새 내가 ‘꼰대’가 돼 가고 있었다. 수업분위기 잡는다는 이유로 엄격해지고 재미와 담을 쌓아가는….

이러니 제대로 진도를 나갈 수가 없었다. 한 학기 동안 가르친 게 인사말을 제외하고 문형 열댓 가지, 단어 백 개 안팎이 고작이다. 그나마 반에서 아주 똑똑한 아이들 네댓 정도가 있어 위안을 삼을 수 있었다. 또 태도가 불량하던 아이들도 언제 그랬느냐는 듯 교실 밖에서 마주치면 한결같다. 정답게, 깍듯이 인사를 하는 모습이 참 사랑스럽다.

이 모두 수업을 재미있게, 쉽게 끌어가지 못하는 내 책임이 아닐 수 없다. 수업분위기가 좀 엉망인 날은 그래서 현지어 단어공부에 더 집착한다. ‘말문을 더 틔우자’는 반성과 인내력 단련에 대한 감사와 함께.

*방학 직전에야, 태도 해이에 대한 궁금증이 조금 풀렸는데, 한국어는 성적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학기 초엔 성적처리를 해야 한다더니만, 나만 모르고 있었던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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