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옹은 고향이라는 부담감 때문인지 취재진에게 충북지역의 반민자 또는 조사대상자를 밝히는데 주저하는 모습이었다. 이러한 부담감 때문에 충북 대상자들은 서울 반민특위에서 소환하기 보다는 도사무분국으로 이첩한 경우가 많았다는 것.


주목할만한 인사는 지역 경제인으로 해방후 청석학원을 설립한 김원근씨와 충북지사를 지낸 이명구씨다. 김원근씨는 일제 당시 조치원에서 석유판매업 등으로 돈을 벌어 청주 이정골에서 금광을 운영하는등 도내 최대 거부가 됐다.

김씨는 24년 대성보통학교를 설립하고 청주상업학교, 여자상업학교를 잇따라 설립하는등 육영사업에 힘을 쏟았다. 또한 일제의 요청에 따라 37년 군용기 헌납운동에 참여해 32명의 지역유지로부터 6만500원을 모아 ‘충북호’를 헌납했다. 이때 김씨가 5000원을 내 가장 큰 액수를 기부했으며 이같은 행적 때문에 반민특위의 조사대상에 올랐다.


이명구씨는 경성의학전문학교 출신의 외과의사로 공의(公醫)로 활동하다 21년 청주에서 신명의원을 개원했다. 적극적인 지역사회 활동으로 일제하 도회의원에 2차례 당선됐으며 38세의 나이로 충추원 참의로 임명되기도 했다.

 김원근, 민영은 등 지역유지와 함께 청주여자중학교 등 학교설립에 적극 참여했다. 해방직후에는 충북도 건국준비위원장으로 피선되기도 했으나 중추원 참의 이력 때문에 조사대상이 됐다. 불기소로 풀려난 이씨는 50년 제3대 충북지사를 지내기도 했다.


이밖에 영동출신의 손재하씨도 중추원 참의를 지냈으며 군용기 헌납운동 때도 1000원을 낸 것으로 나타났다. 옥천의 정석용씨도 지역의 재력가로 일제에 부응한 인물로 손꼽혀 조사를 받았다. 아들은 검사출신으로 64년 민주공화당 의장을 지낸 정구영이며 유신헌법이 등장하자 74년 민주공화당을 탈당했고 같은 해 민주회복국민회의 고문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손자인 정진영은 한국전쟁 당시 홍명희의 손자 홍기윤과 함께 월북한 것으로 알려져 3대에 걸친 엇갈린 인생역정이 흥미롭다.


또한 영동출신의 최난수는 고등계 형사 출신으로 반민특위 위원 암살계획에도 연루된 인물이다. 반민특위가 악질 일경출신들에 대한 포위망을 좁혀오자 불안감을 느껴 48년 10월경 당시 서울시경 수사과장이었던 최난수와 전 수사과정 노덕술 등이 공모해 테러리스트를 고용해 반민특위의 핵심 국회의원 15명을 살해하려한 사건이었다. 고용된 테러리스트가 사전에 폭로하면서 사건전모가 드러났고 기소된 최난수는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최난수의 아들은 검찰 고위간부 출신으로 몇해전 영동지역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청주 한정석은 일제 경찰의 경시 출신으로 조선인이 오를 수 있는 경찰 최고직이었다. 반민특위 서울본부에서 직접 연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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