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당 정권 부정선거 극성…헌병 관제시위 까지 벌여
4·19 혁명 에너지 7·29선거 이어져…민주당 70% 당선

▲ 4·19혁명 자체가 정권 퇴진 이라는 큰 승리였지만 실질적인 정권의 교체는 국회세력의 교체였다. 이러한 4·19 혁명의 에너지는 그대로 7·29 국회의원 선거로 전달됐다. (사진 제5대 민의원·참의원 투표 모습, 출처 : 충북100년)

1960년 자유당 정권의 붕괴를 불러온 3·15 대통령 및 부통령 선거. 선거 뿐만 아니라 투·개표 과정에서 온갖 형태의 부정행위가 발생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3인조 및 9인조 선거다. 선거의 기본 원칙 중 하나는 비밀선거지만 투표장에 유권자가 3인이나 9인이 집단으로 입장해 조장에게 기표한 투표용지를 공개적으로 보여주고 투표함에 표를 집어넣는 공개투표다.

3.15 선거 당시 자유당 정권은 이와 함께 자유당지지 투표용지를 투표함에 미리 넣는 ‘4할(40%) 사전투표’를 진행했다. 또한 시내 곳곳에서는 헌병이나 군인이 트럭에 나눠 타고 관제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개표장에서는 민주당 참관인을 폭행하고, 심지어 입장 자체를 막는 불법행위를 저지르기도 했다.

이러니 투표는 하나마나한 것이었다. 결국 이승만과 이기붕은 압도적 지지로 대통령과 부통령에 선출되었다. 하지만 학생과 시민들은 이 선거를 부정선거로 규정하고, 마침내 이승만 사퇴라는 정치적 승리를 거두었다. 이런 4월 혁명의 성과를 기반으로 제5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지게 되었다. 1960년 7월 29일 실시된 이 선거를 흔히들 7.29선거라 명명한다.

 

4·19의 에너지, 민주당 정권 창출

4·19혁명을 통해 확인된 민초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제5대 국회의원 선거(당시 참의원·민의원 선거)로 고스란히 이어진다. 4·19혁명 자체가 정권 퇴진 이라는 큰 승리였지만 실질적인 정권의 교체는 국회세력의 교체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4·19 혁명의 에너지는 그대로 7·29 선거로 전달됐다.

1960년 7.29 선거에서 민주당은 민의원 171석과 참의원 31석으로 전체 291석의 69%인 202석을 획득했다. 자유당은 민의원 선거에서 2석을 얻는데 그쳤고, 대신 무소속은 민의원 53석과 참의원 20석을 얻는 무소속의 시대를 열기도 했다.

물론 무소속의 대부분은 과거 자유당 소속의 정치인들이 위장 전입한 것이나, 결국 자유당의 깃발로는 당선 자체가 불가능함을 스스로 인식한 결과였다.

당시 우리 충북지역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전국적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다.

민주당은 충북지역 13개 선거구 중 8석을 얻어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승리했다. 이는 전체 의석의 69.2%를 얻은 것이다. 무소속이 3석, 헌정동지회가 1석인데 이들은 모두 자유당 계열이라고 볼 수 있다. 참의원 선거결과는 아래와 같다.
 


충북지역 4석의 참의원은 민주당 3석, 자유당 1석으로 민주당이 압승했다. 전국적으로는 참의원 총 58석 중 민주당이 31석을 차지했고, 무소속이 20석을 차지했다.

결국 제5대 국회의원 선거는 자유당 정권이 붕괴하고 민주당 정권이 출범하는 결과를 낳았다. 자유당 후보자나 자유당 경력을 가진 무소속 후보들은 반혁명세력 논란을 일으키며, 낙천·낙선운동의 대가를 호되게 치뤄야만 했다.

선거혁명이라 불릴만한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진보진영의 정치세력화는 실패했다. 민의원 선거에서 사회대중당은 4석, 한국사회당은 1석에 그쳤고, 충북지역에서는 7명의 후보가 출마했으나, 대부분 5% 미만의 득표율에 그쳤다.


반혁명 규탄운동 이어져

7·29 선거에서 자유당 세력의 몰락은 거져 얻은 것이 아니었다. 4·19 혁명을 주도했던 학생들은 7·29 선거를 전후 해 4·19의 완성을 위한 또 다른 투쟁에 나섰다.

4·19 혁명을 주도했던 세력들은 다시 7.29 선거 당시 부적격자 낙천·낙선운동과 당선 무효투쟁을 진행하며 반혁명세력 규탄운동을 진행했다.

7.29 선거 이전에는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반혁명세력 낙천·낙선운동을 진행했다. 단양 중·고등학생 600여명은 7월 1일 자유당 출신 조종호 의원 출마반대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은 10시 20분경 교실을 뛰어나와, 쏟아지는 폭우를 무릅쓰고 시내 일원과 역전 등지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조종호 의원의 재출마를 반대했다.

보은중학생 800여명은 7월 19일 9시경부터 교문을 뛰어나와 가두시위를 전개했다. 학생들은 ‘공명한 선거를 이루어 4.19혁명을 완수하자’는 플래카드를 들고 “부정선거 원흉을 엄단하라”, “2.4파동 시에 거수기를 엄단하라”, “기성세력 물러가라”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시위대는 보은 농고생들과 합세하려 했으나 농고생들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보은에서 출마한 김선우 후보는 4월 혁명 당시 자유당 보은군당 위원장을 맡았다. 7.29 선거에서 자유당으로 출마해 낙선했다. 이외에도 음성과 괴산에서 학생들이 반혁명세력 규탄데모를 일으켰다.

1960년도의 반혁명세력 규탄운동을 기억하는 시민들은 아직도 7.29난동(亂動)이라고 부른다. 예전에 동학농민혁명을 동학난(東學亂)이라 부른 것과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7.29선거 결과는 대한민국 선거 역사상 야당이 낙승한 최초의 선거였고, 4월 혁명을 계승하는 선거혁명이었다. 또한 반혁명세력 규탄운동은 시민이 중심이 된 아래로부터의 민주화운동이었다. 1960년 4월 혁명이 학생 중심의 미완(未完)의 혁명이었다면, 7.29 선거는 시민이 중심이 된 시민혁명이었다고 볼 수 있다.

 

취재 김남균 기자·박만순(함께사는우리 대표)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기금을 지원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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