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남 식 대중문화 평론 <나의 문화편력기>

나는 읽는다 고로 존재한다
이연호 꿈꾸는책방 대표

▲ 이연호 꿈꾸는책방 대표

아들아 소주나 한잔 하자. 내 하소연도 좀 들어주라. 뭐 이렇게 시작해야겠습니다. 그러고 마주앉아 내미는 책이 김창남 선생의 <나의 문화편력기>라면 제법 그럴싸하겠습니다.

요즘 ‘응팔이’가 유행이라지요. 질풍노도의 80년대를 보내고 나서 문학이 후일담으로 채워지던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의 문화편력기>를 그런 류의 이야기로 접어두지는 마세요. 노찾사를 만들고 지금까지도 문화현장과 가까운 곳에서 삶의 파장을 만들고 있는 김창남 선생은 문화가 지닌 일상성의 힘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사람입니다. 일상의 기록이 담고 있는 미시적 의미와 그것들이 역사를 이루어가는 장엄한 풍경을 상상할 줄 아는 문화인이기도 합니다. 이 책이 단절된 세대 간의 이해와 소통을 돕는 도구로 쓰일 가능성은 그의 삶과 이력 안에 내재된 문화적 힘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합니다.

그는 “일상 속에서 반복적으로 경험되는 까닭에 그것을 의식하기 어려운 것, 즉 의식되지 않는 사이에 경험되고 따라서 내 무의식의 공간에 나도 모르게 자리 잡는"것이 문화라고 이야기합니다. 어쩌면 초라한 40~50대를 위한 구차한 변명(?)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젊은 세대들이 우리 세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바탕이기도 합니다.

저를 포함해서 지금의 40~50대들은 답답할 만큼 견고한 이분법적 사고를 지니고 있습니다. 김창남이 기록하는 청소년기의 문화 저변에는 언제나 “부자 악당 대 가난한 주인공이라는, 당대의 수 많은 동화와 소설, 영화와 만화에서 되풀이되는 대립 관계의 전형”이 곳곳에 들어있습니다. 이것을 듣고, 보고, 익히면서 선이 아니면 모두가 악이고 아군이 아니면 모두가 적군이라는 단순 대립이 소시민의 삶에서 자주 반복되고 확장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구축된 단 하나의 시선이 초라해진 우리 시대의 빈약한 상상력을 만드는 연원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니 “아들아! 너는 이 찌질하고 빈약한 우리 시대의 경험을 딛고 다양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사유하라”는 건배사를 전하게 됩니다.

김창남의 목소리는 담담하다

대통령은 오로지 박대통령 하나여야만 했었습니다. 야당 지도자의 존재조차 하나의 대통령을 구조화시키는 정치적 장치 이상의 것이었는지를 되묻게 됩니다. 모든 드라마와 영화에서 ‘좋은 나라'는 언제나 이겼고 ‘나쁜 나라'가 지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습니다. 패배한 모든 것은 악이었습니다. 제2의, 제3의 선이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지금 40~50대의 쪼그라들고 왜소해진 뇌구조는 이렇게 심어지고 키워졌습니다. 부끄럽지만 사실이 그랬습니다.

그의 기억에 의하면 ‘바니걸스’가 ‘토끼소녀’로 이름을 바꿔야 했고, ‘어니언스’가 ‘양파들’이 되어야 했던 유신의 시대를 살아왔습니다. 정치적 폭압 앞에서 한 없이 초라해지고 쪼그라져야 하는 시대를 견뎠습니다. 그가 말한 ‘디아스포라'는 그런 엄혹한 시대를 견디는 방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일제 강점기의 디아스포라가 식민지의 현실로부터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면, 60년대의 그것은 근대화와 산업화로 인한 이농과 농촌 파괴의 현실에 닿아 있다”고 적었습니다. 그렇다면 2016년의 ‘디아스포라'는 어떻게 설명이 가능할까요? 경계 밖으로 밀려 난 삶들, 버려진 삶들, 모두가 아감벤이 지적한 호모 사케르들은 아닐까요? 이 책이 그것들의 탄생 과정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고 굴종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저항의 몸짓도 없지 않았습니다. 나름 진지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습을 전하는 김창남의 목소리는 그저 담담할 뿐 과장된 너스레를 늘어놓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후일담이 가지는 너저분함과 치사함을 담아두지 않았습니다. 다만, 흔들림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도종환의 ‘흔들리며 피는 꽃’과 ‘흔들리며 흔들리며 사막을 건너 온’ 류시화의 성찰이 닿은 존재, 그 실존을 가감 없이 보여줄 뿐입니다.

그래서 내 아이에게 이 책을 권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누군지 알려면 이 책을 좀 읽어보란 말이야"를 당당하게 외치고 싶었습니다. 좀 ‘비장한 허세’ 같았나요? 아이들이 우리 안에 쌓인 것들을 들춰보며 한 동안은 키득키득 거리겠지요. 그러는 사이 우리는 좀 더 가까운 도반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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