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엔 남지않은 일제·해방기의 스토리텔링 주인공들을 만나다

본 글은 청주문화원이 발간한 청주문화 30호에 실린 ‘청주이야기 열마당’ 가운데 박청홍님의 기고문을 전재한 것이다. 전재를 허락해 주신 필자와 청주문화원측에 감사드린다.

박청홍 시인, 수필가

 

▲ 청주 우시장

1. 우시장에서 벌어진 명장면

청주의 장날은 2일과 7일이다. 장날은 남주동 시장 통이 인산인해를 이룬다. 그 중에도 소를 팔고 사는 우시장이 단연 성황을 이룬다. 여기에 청주군 교서리 쪽산골(지금의 수동)근처에 사는 채꾼의 두목격인 임상기(林相基)는 경기도 방면 장호원에 붙어 있는 감곡 우시장과 청주 우시장을 오고가던 소몰이꾼으로 유명세를 떨쳤다. 그도 때로는 강도를 만나 돈을 탈취당할 뻔하거나 금전을 도둑 맞기도 한 경력이 있다. 그래서 언제나 서너 명이 합작하여 규모가 크게 소몰이꾼이 되기도 하고 또는 소를 매매하는 반출상인과 직접 거래도 했다. 소를 잡아서 파는 도축상인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우시장에서는 마당발의 역할을 기꺼이 했다.

그러다보니 한양 근처의 시국 소식을 자주 접하고 뜻있는 우국지사들의 말을 귀동냥으로 얻어 들어 자연스럽게 상해 임시정부 군자금 조달 조직책과 급기야 선이 닿게 된 경우도 있다. 은밀히 신속하게 자금을 모아 인편으로 군자금을 틈틈이 조달하기도 했다.

내일이 2일 청주장날이다. 쇠내(금천동) 어구 벌뜸(지금의 효성병원근처) 마방 주인집에서 소에 먹이를 주고 체중을 늘리며 채꾼 임상기는 하룻 밤을 쉬고 있었다. 이에 낌새를 아는 일경 고등계 형사도 하루를 기다리고 있었다. 장날이 되어 우시장은 소와 소장수 또는 소를 구입하려는 농부들과 맥장꾼(목적 없이 장거리를 배회하는 장꾼)까지 한창 어울려 매매와 흥정이 진행 되는 사시(巳時)쯤 되었다. 우시장 어귀에 정장한 순사(일본 경찰) 2명과 칼 총을 휴대한 사복한 형사가 나타나 순찰, 검거를 실시하려고 했다. 그들이 찾는 사람은 임상기였다.

그때 임상기는 6마리 소를 흥정하여 매매가 완료, 소값까지 건네고 난 뒤 기분 좋게 한잔 술을 마실 때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피해라 임상기! 도망가라 임상기! 순사가 잡으러 왔다. 피해라 임상기!”임상기는 소판 돈을 전대에 차고 뒷길 개구멍을 뚫고 넒은 길로 빠져 쏜살 같이 사라졌다. 그러자 우시장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순사들이 임상기를 잡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 수색하고 있을 때, 누구의 짓인지는 모르지만 소고삐를 풀고 등가죽을 힘 있게 때린다. 놀란 소는 일본순사가 달려가는 쪽으로 뛰다가 그 순사와 강하게 부딪치고 만다. 먼저 간 순사가 넘어지자 뒤따라 가는 다른 사람들도 너나 할 것 없이 소가 풀려 있어 소 때문에 막혀 일순간 아수라장이 되고 만다. 넘어져 깔리고 밟힌 장꾼들이나 일본 순사나 진흙탕과 소똥에 범벅이 되고 만다. 화가 잔뜩 난 순사 하나가 총으로 하늘을 향하여 공포탄을 발사하자 주위는 일시 조용해진다. 하지만 온 몸이 오물로 범벅이 된 순사들 아니 일경들의 모습은 말이 아니었다. 이 일로 인하여 청주에서는 한동안 ‘임상기’라는 소몰이꾼의 이야기가 회자됐다. 그 후 임상기를 보았다는 이는 한사람도 없었다.

당시 우시장 소장수들도 장사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위하는 마음도 품고 있었음을 감지할 수 있는 일화다. 시대를 떠나, 계층을 떠나 애국충정의 마음은 항상 있었던 것임을 알게 하는 이야기다. 청주 우시장은 석교동에서 병오(1905)년의 물난리 이후 남주동으로 이전했다. 남주동에서 영운동으로, 다시 개신동, 그리고 현재는 신봉동 무심천변에 있다.

 

▲ 청주공단

2. 기인 무당이 일제 경찰서장을 혼내주다

나라를 빼앗기고 주권과 민족혼이 사라지는 일제하에 우리 고장에서는 어떻게 살아 왔을까. 피압박 민족의 설움은 겪어 보지 못한 세대가 그 고통을 실감하기 어렵다. 그러는 가운데 막강한 권력과 무소불위의 힘을 가지고 있는 일제 경찰서장을 통쾌하게 골려주고 혼을 빼게 만든 사건이 청주에서 벌어졌다. 일제는 민간 신앙으로 자리를 잡은 무속인들의 독경과 굿 그리고 푸닥거리를 금지, 단속하고 있었다. 혹세무민하고 비과학적이라는 이유로 굿, 살풀이, 안택 등 무당과 경객(經客)들이 하던 무속 행위 일체를 단속했다. 적발이 되면 구속하고 벌금형을 내렸다. 청주면 내외의 많은 무당들이 단속에 걸려 피신처로 도망가고 감금되거나 벌금을 물어 고통을 겪게 되었다.

청주 용박골(오늘의 용암동) 원봉마을에 사는 오희명(吳熙明)이라는 무속인이 바로 사건의 주인공이다. 남모르게 자주 굿거리를 하다가 일경에게 얻어 걸렸다. 벌금과 주의를 자주 받은 관계로 경찰서에서는 안면이 많았다. 그래서 일인 경찰서장의 눈에 자주 띄는 단골 불법자가 된 상태였다. 서장은 은근히 심술이 발동하여 이 무속인의 능력이 어떠한가를 시험하고 싶었다. 일본 말로 물었다.

“네가 귀신을 불러 네 마음대로 나쁜 귀신을 쫓아내고 좋은 조상의 혼백을 구별한다니 어디 한번 해 볼 수 있느냐?” 통역을 하던 조선순사가 무속인 오희명에게 전했다. 겁에 질린 오희명은 모기소리로 “어떻게 시험을 합니까?” “네가 나를 움직여 나의 조상을 불러내 보란 말이다”무당은 귀가 번쩍 띄었다. 그러나 안도할 수는 없었다.

서장을 시험대상으로 굿거리를 한다는 것이 위험하기도 하지만, 신묘가 그 자에게 통 할런지 불안했다. 하지만 여기서 주저하고 망설이며 머뭇거리다가는 큰 화를 당할 것만 같았다.

“네가 나를 움직이면 널 놔주고 그렇지 않으면 징역을 되게 보낸다. 어쩔 것이냐?” 이판사판 죽기 아니면 까물치기니 한번 해보기로 마음을 다 잡아 용기를 냈다. 무당 오희명은 조선 순사에게 압수당한 신장대를 비롯하여 징과 북을 가져오도록 청했다. “신장대를 꽉잡아야 합니다. 놓으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오희명은 사방을 둘러보고 징과 북을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보신경(保身經)을 낭낭하게 읊조리다가 서서히 톤을 높여가기 시작했다. 일인 서장은 신장대를 가볍게 잡고 야유를 보내면서 한편으로는 거만하고, 한편으로는 얕잡아 보는 투로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다시 한 단계를 높여 천지팔양경(天地八陽經)으로 들어가려니 벌써 서장은 고개를 갸웃둥하면서 신장대를 두 손으로 당겨 잡는 것이다.

오희명은 “옳거니 통하는구나 어디보자”하면서 독경은 유유 청랑하게 높은 음으로 이어 갔다. 신장대가 움직이는 대로 따라 일어나서 주위 사방을 가볍게 오고가더니 앉았다가 일어나서 요동을 치기 시작한다. 천지팔양경으로 자신을 얻은 무녀는 눈을 지그시 감고 대담하게 힘 있는 옥추경(玉樞經)을 소리 내여 독경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서장은 신에게 붙들려 미친놈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무녀의 지시대로 노는 꼴이 가관이었다. 서장은 눈에 있어야 할 안경도, 금테 모자도 어디에 있는지 벗겨져 나갔고 머리카락은 산발이 되고 그야말로 꼴불견이었다. 신장대를 잡은 서장은 혼비백산한 모양을 하고 서장실을 종횡무진 돌아다닌다.

이를 보고 있던 조선순사는 말한다. “이제 그만하라”“죽으라고 고만합니까? 지금 조상 만나서 좋아서 그러는데 어떻게 고만합니까?" 숨을 헐떡 벌떡 가쁘게 쉬면서 날뛰는 일인 서장 신장대를 죽자 사자 붙잡고 춤을 추다가 마침내 쓰러져 흰 눈동자만 드러낸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겁에 질린 조선순사는 재빠르게 양동이의 찬물을 서장에게 좌르르 쏟아 부어 정신을 차리도록 했다. 그러나 서장은 일어서 제자리로 가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제 의지대로 말을 듣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 모습이 더욱 우스쾅스러워 한 장면의 희극, 그대로였다.

다음날 늦은 시간에서야 혼이 났던 경찰서장 앞에 끌려 간 조희명은 벌벌 떨고 있었다. 조선순사가 통역으로 “무서운 조선굿은 내 평생 한번으로 끝이다. 다시는 신장대는 잡지 않으리, 그리고 너만은 독경을 하여도 좋다” 서장의 관인이 찍힌 한 장의 종이를 전하면서 “너에게 특혜를 주니 단속을 할 때, 이것을 보여 주라”하고는 풀어주었다. 그 후 그는 마당굿을 하다가 단속에 걸리면 그 종이를 보이고는 계속 마음대로 독경을 하는 경객(經客)이 됐다는 기인(奇人)의 이야기다.

일인들이 청주를 두려워하고 어려워했던 이야기도 있다. 상세히 알 수가 없지만 도청 서문 직선거리 구 무심천 다리를 향하는 길거리 중간 지점 쯤이다. 옛날 청주경찰서와 무덕관, 그리고 그 앞 청주소방서 자리에 고명한 도학자(道學者)가 있었다. 지금의 쥬네쓰 상가 건너 쯤 될 것이다. 청주와 조치원으로 통하는 길을 만들 때 이곳 도로 길 근처에 하나의 사당, 도학자가 은거하고 있었다. 기록을 담당하는 고위 일본 관리였던 사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양간의 병졸을 거느리고 여기를 통과 할 때다. 도민들로부터 고명하고 덕망 높은 도학자가 있다는 여론을 듣고 그 나름대로 경의를 표하려 했다. 토호 유지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행동으로 말에서 내려 걸어서 통과했다는 당시의 사실을 지방 유생들은 상당한 긍지와 자부심으로 피압박 민족의 설움을 달래는 위안으로 삼았다고 한다.

▲ 청주 연초제조창

3. 일해여관, 팔푼이의 러브스토리

청주극장 뒤로 유명한 일해여관이 있었다. 성안길 중심가에 있는 여관으로서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고 위치가 좋은, 그 당시 읍내서 몇째 안 가는 큰 여관이다. 특히 청주극장과 현대극장에서 가까워 무대에서 공연하는 배우들과 연극인, 그리고 부서에서 일하는 외래인이 자주 묵어가는 곳이었다. 일해여관에서는 사득이란 잡일을 하는 팔푼이 쯤 되는 일꾼이 있었다. 동네 심부름을 전담하는 잡꾼이다. 더 상세히 말하면 부엌일을 하던 벙어리 아주머니도 있었지만, 여기서는 사득이에 대한 이야기만을 하겠다.

그는 모자라는 팔푼이로 보면 무난하다. 정신연령이 어린이 정도밖에 안 되어서 그런지 동네 꼬마들과 곧잘 어울리기도 하지만 항상 놀림을 당했다. 그러나 주인의 말이면 절대 복종이며 성실해서 여관의 궂은일을 도맡았다. 음식을 나르고 손님이 원하는 대로 담배를 사다 주는 갖은 고된 심부름을 우직하게 잘 했다. 하지만 그도 건장한 남자로서의 생리를 억제하지 못했는지 여관에서 묵던 연극 여배우와의 염문이 좁은 읍내에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한번 여자를 본 사득이는 시도 때도 없이 여배우를 따라다니는 촌극이 벌어졌다. 그 여인은 소문에 소문이 줄을 잇는 바람에 그곳에 있을 수가 없어 야밤에 줄행랑을 치는 신세가 되었다. 꿩 잡는 것이 매라지만 숙맥 팔푼이도 나름의 재주를 가졌다고 호사가들의 입줄에 올랐다.

▲ 청주 육거리

4. 서부 카우보이 ‘날라리’와 신선부채

명인(名人)은 아니다. 기인(奇人)도 아니다. 어쩌면 명물(名物)이라고 여기는 것이 편하다. 6.25 한국전쟁이 끝난 후의 이야기다. 해방 후와 6.25 한국전쟁의 사이 6년간은 청주의 정치 현실과 사회 상황은 어눅했다. 그러다보니 주먹 세계에서 주름을 잡고 있을 무렵이다. 그때는 사상과 이념관계도 힘의 주도권이 주먹에 있었던 때다. 한국전쟁으로 나라는 폐허가 되고 국민은 그 후유증으로 엄청난 트라우마를 앓고 있을 때다. 경제는 바닥에 가라앉고 초근목피 암울한 세계만이 우리의 환경이었다. 청주라고 전후의 냉랭한 회오리가 비켜가기만 하겠는가?

전쟁, 가난, 폭력, 주먹, 그리고 건달과 깡패, 당시가 바로 이런 단어들을 연상케 하는 암울한 시대였다. 먹고 사는 일에 여력이라곤 없던 우울한 그 시절 시민을 웃기던 한 기인이 청주 거리에 나타났다. 그가 바로 ‘날라리’라는 1인 쑈의 창시자 장씨다. 일찍이 영화에 관한 이론과 실기를 일본에서 전공한 인텔리로 알려졌다. 서부영화의 카우보이 의상을 완벽하게 갖춰 입고, 쌍권총을 차고, 거리를 종횡무진 활보하며 멋을 한껏 부리던 장씨.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서는 유창한 영어로 가상 악당을 향하여 경고를 하면서 쌍권총을 뽑아 사정없이 속사포를 발사하는 원맨 쑈는 장안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였다. 수려한 미모와 콧날이 오똑해서 서양인에 가깝고 화려한 의상에서 풍기는 모습은 이국적 신비감마저 풍기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랄라라, 랄라라, 랄라라……라고 연실 혼자 중얼거리며 이 거리 저 거리 매일 활보, 재담과 몸짓을 자유자재로 연출하던 시대의 기인이었다. 청주시민들은 그가 정말 영어를 유창히 잘하는지, 엉터리로 중얼거리는지 분간을 못했다. 또한 영화에나 나오는 정의의 사나이 카우보이지만 낯설고 흥미로왔다. 우울하던 당시의 거리문화를 한 단계 격상시킨 인물임에 틀림이 없다.

그를 아주 유명하게 만든 일이 있었다. 청주역 내 뒤쪽 구석에는 미군부대가 있었다. 소대 아니면 중대에 해당되는 미군들이 열차 여객실을 숙소로 정해서 그 곳에서 먹고 자기를 오랫동안 했다. 자기들의 의상과 미국 본토 문화를 재현하는 날라리를 그냥 흥미있게만 볼 자유분망한 미군들이 아니었다. 날라리 원맨쑈의 주인공 장씨를 불러 시험하기로 하고 대화를 전개하였다. 양쪽 허리춤에 쌍권총을 양손으로 뽑아 과녁을 누가 빨리 적중시키는가 하는 위험한 사격 솜씨를 시험하였다. 결과, 청주의 명물 ‘랄라리’는 0.6초로 그의 솜씨를 뽐냈다. 바른 손을 권총집에서 쏜살같이 순간적으로 꺼내 10M 밖의 있는 캉통을 적중시키는 기염을 토해 속사 권총잡이로 인정받게 됐다.

그 후 그는 더 신명이 나서 청주 시내는 물론 전국의 유명인이 되어갔다. 처음에는 앞 가슴과 등 뒤에 단순한 선전만 하다가 날로 인기를 더해 작은 수레를 끌고 영화 포스터 벽보와 선전에 열을 올리며 성업했다. 드디어 5.16 세계무역박람회 진출을 계기로 중앙 서울에도 진출하였다. 이후 대구에서 말년을 보냈다는 소식이 전해질 뿐이었다.

또 청주에는 ‘신선부채’가 있었다. 이 신선부채는 청주시내를 제 맘대로 활보하던 장애자다. 손님을 부르는 슬픈 목소리가 그의 상품이다. 묘하게 호소하는 듯, 긴 여운을 남기며 부르짖는 “신선∼부∼채∼나…”하고는 힘없이 주저앉는 듯 한 소리를 반복하고 있다. 지붕까지 포장한 리어카 손수레를 잡고 질질 끌려가 듯 끌고 다닌다. 절룩 절룩거리며 빨리도 아니고, 멈춘 것도 아닌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시내를 이 거리 저 거리 걸어 다니는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던 것이다.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신선∼부∼채∼나∼∼∼”의 심금 울리는 호소력의 일면은 청주시내를 차분하게 만들고 만다. 처음은 문구와 잡화를 가지고 다니다가 그의 유명세가 붙고, 발이 넓어지자, 극장프로 포스터도 부착, 점포상호까지 광고 선전을 전담하면서 수입도 짭짤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오랫동안 청주시내 명물로 지내다가 시대의 변천과 기력의 쇠잔으로 그의 광고는 자연스럽게 사라지면서 선전의 효과가 점점 떨어져 그의 마지막 생은 생계까지 어려워졌다는 풍문이 나돌고 있었다.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