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대 청주시의원 13명 중 3명이 헌병 경찰출신

정치권이 과거사 규명을 놓고 공방을 벌이고 있다. 여야의원 171명의 발의로 국회에 제출된 친일진상규명법 개정안을 시작으로, 정권안보 차원에서 이뤄진 용공조작 사건에 대한 국가기관의 자체조사 방침이 정해졌다. 열린우리당은 일제 36년과 해방이후 60년의 굴절된 현대사를 다시 정리하는 ‘역사 바로세우기’로 주장하고 있다. 한나라당은 ‘정치적 음모론’ ‘경제 위기론’을 내세워 정치쟁점화하고 있다.

지난 대선, 총선에서 드러났듯 우리 사회는 진보-보수진영으로 갈려 참여정부의 과거사 규명작업을 극단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충청리뷰>는 자료와 증언을 통해 확인한 충북인의 친일행적을 다시금 정리해본다. 아울러 광복절 60주년을 한해 앞둔 시점에서 이같은 친일의 흔적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 생각해보고자 한다. (편집자주)

1910년 한일합방 당시 청주에 거주하던 일본인은 300여명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일본거류민단을 조직하더니 뒤에 일본인회로 개칭했고 1911년 당감산에 신사를 세우고 참배하기 시작했다. 얼마후 경사가 심하다는 이유로 신사를 청주사직단 위쪽으로 옮겨 일제의 지배의식을 노골화했다. 사직단은 국가와 왕실의 태평을 기원하는 곳임으로 이 사직단 위에 신사를 세우는 것은 한국민의 정신을 말살하려는 의도였다.

1915년 신사규정이 제정돼 한국인의 신사참배가 강제되자 지역에서 1만여원의 기부금을 억지로 징수해 우암산 자락에 웅장한 청주신사를 짓고 학생 시민들의 참배를 강요했다. 지금의 용화사 자리였으며 해방직후 철거됐다. 당시 청주신사의 관리책임자는 이례적으로 한국인이었으며 그 아버지도 청주 경찰서장을 할 정도로 두드러진 친일인사였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는 물질적 수탈과 정신적 말살정책이 병행됐다. 1940년 1월 당시 청주지역 한 언론인이 겪은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그 실례다. 당시 일장기 아래에서 천황폐하만세를 부르면서 숨을 거둔 애국노인 이원하의 비석이 제막된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청주군 사주면 사창리(현 충청일보사 뒤편 옛도로)에서 도지사 군수까지 참석한 가운데 성대한 제막식이 열렸다. 많은 보도진과 뉴스촬영반까지 동원돼 취재가 이뤄졌고 큰 기사로 다뤄졌다.

하지만 며칠뒤 당시 조선신문청주지국장 모씨는 청주의 관선도회의원인 일본인 마쓰기(松本彬)로부터 은밀하게 만나자는 제안을 받는다. 마쓰기가 털어놓은 사건의 진상은 기가 막힌 내용이었다. “이원하는 원래 청주감영의 이속(吏屬)이었는데 가정불화와 신병 때문에 자식들이 불효하자 분통을 터트리고 밤중에 집을 나가 동리 공터에서 쓰러져 죽었을 뿐이다. 애국노인이란 당치고 않은 조작극이다. 학교 교과서에까지 수록한단 말을 듣고 총독부에 가서 그것만은 절대로 하지말라고 항변하고 왔다. 더 이상 떠들어서는 안된다” 결국 조작극 소문이 나돌다가 해방직후 비석은 소리도 없이 사라졌다. <이상 ‘청주근세 60년사화’ 참조>

일본의 패망소식이 알려지면서 일반 주민들의 억눌렸던 심정은 경찰에 대한 적대감으로 드러났다. 해방 다음날인 8월 16일 북일주재소 순사부장(북일지서장) 김모씨가 지서로 몰려든 지역 사람들에게 타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로인해 겁에 질린 경찰관들이 뿔뿔이 피신하는 바람에 치안상태가 불안했다. 하지만 주민들에게 특별한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던 조선인 경찰들은 얼마후 돌아와 원직복귀했다.

특히 48년 정부수립후 실시된 지방의회 선거에서 청주시의회 13명의 2대 의원 가운데 3명이 일제의 헌병, 경찰 출신으로 알려졌다. 초대 시의원을 지낸 박학래옹(83)은 “일제 당시 헌병보 출신인사 2명이 시의원에 당선됐다. 헌병보는 지원시험을 거쳐 선발됐었고 그같은 이력이 선거전에서 별 시비거리가 되지 않았다. 심지어 신의주에서 고등계 경찰관(공안담당) 출신으로 친일의 앞잡이 역할을 했던 사람도 시의원에 선출됐다. 당시 반민특위가 무력화되면서 일반 주민들도 친일문제를 쉽게 잊었고 해방된 국가의 민족의식이 살아나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박옹은 43년께 일제의 창씨개명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헌병대에 끌려가 갖은 고초끝에 교도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당시 도내에서 5명이 청주 헌병대로 끌려왔고 2명은 창씨개명을 하고 풀려났으나 박옹은 괴산 출신 박모씨와 함께 교도소로 넘겨져 3개월간 수감생활을 하기도 했다. 박옹은 “그때 괴산에서 오신 분이 머리에 상투를 튼 선비셨는데, 나중에 박동기씨(전 충북도 부교육감)로부터 자신의 아버님이란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일제말 경찰관은 한국인이 30%에 불과했지만 행정관료는 70%가 한국인이었다. 태평양전쟁의 전세가 악화되면서 한국에 거주하던 일본인 관리들까지 징집대상이 되자 그 빈자리를 한국인으로 채우는 상황이 벌어졌다. 행정관료 가운데 고등문관시험(행정고시)에 합격한 한국인은 일본관리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들은 대부분 식민통치하의 상류층으로 분류되는 재력가 명망가 집안의 자식들로 일제의 체제강화에 일조한 측면이 있다.

이승우씨(전 도공무원연수원장)가 발간한 <도정 반세기>에는 일제말기 청주시내 관계(官界) 3총사가 소개됐다. 인태식 세무서장(자유당 정권의 국회 재정위원장 역임)은 일본 동북대 출신으로 발탁됐고 김선태 청주지방법원 판사(국민당 국회의원 역임) 김영선 도청 지방과(민주당 정권때 재무부장관)는 고등문관시험 출신이었다. 이밖에 최장홍 광공부장, 김희덕 농상부장, 정진동 근로과장, 조병우 청주군수, 정진영씨 등이 고등문관시험 출신으로 해방후에도 관료사회의 중추역할을 맡게 됐다.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