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생각한다/ 김승환 충북대 교수

‘궁형에 처한다.’ 진노한 황제가 사마천(司馬遷)에게 내린 징벌은 궁형이었다. 생식기를 잘라 버리는 궁형(宮刑)은 당시 가장 치욕스러운 형벌이었다. 그래서 궁형에 처해지면 죽음을 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마천이 한무제로부터 궁형을 받은 것은 흉노와 싸우다가 항복한 장수 이릉(李陵)을 비호했기 때문이다. 사마천이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한 이유는 역사서 편찬 때문이다. 그는 궁형을 받고 환관(宦官)으로 살면서 부친 사마담이 시작한 역사 편찬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이렇게 하여 길이 빛나는 명저 [사기(史記)], 정확하게 말하면 [태사공서](BC 91)가 완성되었다.
사마천의 예에서 보듯이 역사는 사관(史官)이 쓰는 것이다. 역사편찬자이자 집필자인 사관은 역사에 대한 관점인 사관(史觀)을 바탕으로 역사를 기록한다. 그 역사는 다른 사관(史觀)을 가진 사관(史官)에 의하여 다시 기록된다. 그러므로 역사는 기억의 전쟁이고, 위정자들은 그 기억전쟁에서 승리하고자 심혈을 기울인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국정교과서 논쟁도 기억전쟁이다. 가령 ‘5·16이 쿠테타라는 기록’은 민중사관이 승리한 결과다. 반면 ‘박정희 전 대통령이 근대화에 크게 공헌했다는 기록’은 발전사관이 승리한 결과다.
역사편찬자들은 자신의 사관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나 일생을 바치는 일도 허다하다. 그 이유는 역사란 단지 서적이 아니라, 정신이고 영혼이며 과거이자 미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가는 역사가의 사관을 지배할 수 없다. 그랬기 때문에 전제군주시대의 조선에서 왕일지라도 역사의 초록인 사초(史草)를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연산군은 사초를 보고 대노하여 수많은 사람을 죽이거나 삭탈관직을 하다가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또한 영남(嶺南)의 사림파도 이 사건으로 몰락한다. 이처럼 절대군주인 왕도 쫓겨나는 것이 역사이고 권력도 눈처럼 녹이는 것이 역사다.
사마천은 춘추필법(春秋筆法)의 추상같은 기록을 남기기 위하여 구차한 목숨을 유지했다. 반면 영남사림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은 전제군주 연산군이 왕위에서 쫓겨나는 계기가 되었다. 영명한 군주였던 연산군은 현재의 정치가 아닌 과거의 정치를 하려하다가 쫓겨났다. 이처럼 역사는 현실보다 더 엄중하고 법보다 더 추상같다. 그러므로 역사는 역사기록에 목숨을 건 사관들의 평가와 기록에 따라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보수진영이 주장하듯이 역사학자의 대다수가 편향적 사관을 가졌다면 그것이 바로 현실이고 사실(史實)이라는 점이다.
역사학교수, 역사연구자, 역사관련 교사 등은 모두 사관을 가진 분들이다. 이분들 대다수가 국가사와 민족사를 보는 관점이 일치한다면 그 일치하는 지점이 바로 국가사와 민족사의 정설인 것이다. 그런데 2015년 국정교과서 논쟁은 정치가가 역사가를 지배하고 정치가 사관을 지배하겠다는 망상이다. 국민이 민주적으로 선택한 결과가 국가사(國家史)가 되어야 한다. 처음부터 국가가 선택의 여지가 없는 국가사를 국민에게 강요하면 그것은 역사가 아니라 국민교육헌장을 역사로 각색한 연극대본이다.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는 국정교과서 논쟁은 매우 부끄러운 현상이다. 한반도의 분단 특수성을 들어 국정교과서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OECD와 같은 선진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모든 국가와 민족은 다 특수한 것이지 한국만 특수한 것이 아니다. 더구나 한국에 국정교과서로 회귀하려는 복벽주의(復?主義) 사상이 지나치다는 것은 세계적인 웃음거리다. 민주사회에서는 결코 이런 논쟁이 벌어질 수가 없다. 그러므로 당연히 국사교과서도 국정교과서가 아닌 검인정 2종으로 해야 한다. 21세기의 대한민국이 필요한 것은 국가주도의 단일한 국가사가 아니라 다양성과 다원성 속에서 민족의 정신을 지키는 국가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