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의 친일파, 도지사‧군수 옆 참사(參事)가 주도…일제강점 35년 내내 호의호식
전국구 친일파의 대표 관직 ‘중추관 참의’…거물 이근택‧이범익은 ‘참의’ 넘어 ‘고문’ 승진

영화 ‘암살’ 속 이정재가 연기한 염석진. 한때 독립운동가였던 그는 변절해 일본의 밀정 노릇을 했다. 친일파인 염석진은 광복 후에도 경찰간부로 편안한 생활을 이어가다 반민특위를 통해 법정에 세워지지만 증거불충분으로 또 다시 죗값을 치르지 않고 유유히 빠져 나간다. 법정을 나서는 순간, 모든 것을 덮고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겠지만 그의 죗값은 옛 동료 전지현(안옥윤 역)에 의해 마무리된다. 전지현의 총구 앞에 선 이정재(염석진)는 “몰랐으니까. 해방될 줄 몰랐으니까. 알았으면 그랬겠나”라고 마지막 변명을 내뱉고 죽음을 맞는다.

현실에서도 그랬다. 춘원 이광수는 자신의 친일 행각에 대해 “일본이 패망할 줄 몰랐다”고 변명했다. 이광수 뿐만 아니다. 많은 친일인사들이 그렇게 변명했다. 그들 또한 영화의 한 장면처럼 반민특위에 의해 법정에 세워지지만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

지울 수 없는 사실은 그들의 행위가 친일이었고, 반민족 행위였다는 것이다. 해방 직후 청산됐어야 할 문제는 정치적 이해관계로 해결되지 못한 채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고, 그 배경에는 여전히 기득권층으로 살아가는 친일파 후손이 있다. 어떤 이유에서도 친일은 덮어둘 수 없는 문제이며 정리하고 청산해야 할 과거다. 2009년 10월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을 출간했다. 3권으로 구성된 사전에는 107명의 충북 출신 친일파의 행적이 담겨 있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충북 출신 인사들의 친일 행각을 다시 꺼내보았다.

 

 

▲ 1935년 4월 조선총독부 청사에서 열린중추원 회의 모습.

굵은 글씨로 처리한 인물은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이다. 거론된 인물 중 일부는 친일 행적이 있지만 그 정도가 약하거나 증거가 불충분해 친일인명사전에는 오르지 않은 인물로 이들의 이름은 굵은 글씨로 처리하지 않았다.

관직의 꽃 중추원 '참의'

관계, 예술계, 학계, 종교계 할 것 없이 친일파는 존재했다. 그 가운데 시민들에게 직접적이고 중대한 영향을 끼친 부류가 관계다. 충북 관계의 친일 역사 중심에는 참사(參事)가 있다. 참사란 1910년 한일강제병합이 이뤄진 후 조선총독부 지방관 관제 규정에 의해 설치된 제도로 1920년 지방제도 개정에 의해 폐지되고 평의원제로 대신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자문기구였다.

이 규정에 따르면 도지사와 군수들은 2명씩의 참사를 두도록 돼 있는데 ‘참사는 도·부·군 관할 안에 거주하는 학식 명망 있는 자에 대해서 조선총독의 인가를 얻어서 도장관이 이를 임명한다’고 명시돼 있다.

 

군참사 거쳐 중추원 참의 ‘엘리트 코스’

1910년 한일강제병합과 함께 조선총독부가 개설되면서 청주군 신창휴 군수, 충주군 서회보 군수 등 도내 18군 군수는 조선총독부 군수로 승계됐다. 하지만 18명의 군수 가운데 누구도 조선총독부에 관직을 거절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충북에 부임해 온 것이지 충북 출신은 아니다.

주목할 점은 이들이 거느린 참사들이다. 이 이름들이 중요한 것은 친일파를 분류하는데 있어서 적극적 친일에 속하고, 변절이 아닌 일제강점기 시작 때부터 친일파로 민족을 등진 이들이기 때문이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광복될 때까지 주요 관직에 이름을 올리며 일제강점기 35년을 호위호식한 인물들이다.

친일 연구의 선구자 격인 임종국(1929~1989·시인·평론가·사학자) 선생이 작고한 후 발표된 ‘친일, 그 과거와 현재(1994·아세아문학사)’에 따르면 1919년 3·1운동 무렵 확인된 참사는 다음과 같다.

도참사 민영은 권도상, 청주군참사 방인혁 한춘동, 충주군참사 이학기 정철모, 보은군참사 정태노 최종수, 옥천군참사 정석용 송영순, 영동군참사 오기정, 진천군참사 남상익 이상직, 괴산군참사 이탁응 이종악, 음성군참사 권태형 정찬모, 제천군참사 박종원 이관의, 단양군참사 오병숙 원용갑이다.

낯익은 이름들이 있다. 잘 알려진 인물은 민영은과 방인혁이다. 상대적으로 정석용 남상익 이탁응 등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친일 행적은 그들에 못지않다.

다시 언급하겠지만 민영은(1870~1944)은 중추원 참의를 지냈고, 거액의 국방금품을 헌납하기도 한 대표적인 친일파다. 4776명의 행적을 다룬 친일인명사전도 꼬박 2면을 할애했다. 1902년 이미 괴산군수에 오른 그는 한일강제병합 전부터 대동학회 등 친일조직에 몸담았다. 1944년 1월 사망하기 직전까지 일본에 충성을 다해 각종 포장을 받았다.

청주군참사 방인혁(1877~1935)도 민영은에 못지않다. 민영은이 누린 거의 모든 관직을 뒤이어 받았다.

방인혁과 같은 해 태어난 정석용(1877~1951)은 이들 중 유일하게 광복을 경험한 인물이다. 옥천에서 태어난 정석용은 1903년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참위로 임관, 육군군법회 판사를 거쳐 1906년 헌병 부위(副尉)로 진급했다. 1907년 일본이 한국군을 강제 해산시킬 때 솔선해서 사표를 제출하고 군대해산을 반대하는 군인들을 설득한 후 귀향했다. 정석용이 옥천군참사를 맡은 것은 1911년부터로 1920년까지로 이 기간 중 지방토지조사위원회 위원을 맡아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에 협력했고, 1915년 다이쇼(大正)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18년에는 옥천금융조합이라는 것을 설립해 본인이 초대 조합장을 맡아 해방 때까지 재직했다.

그의 친일행적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3·1운동의 확산을 막기 위해 옥천자제단을 조직했고, 1924년 도평의회원에 당선된 뒤 3선을 했다. 1933년에는도회의원에 선출, 1935년에는 중추원의 주임관 대우 참의에 임명돼 1939년 6월까지 재임하면서 매년 600원의 수당을 받았다. 1939년에는 유림의 전쟁협력을 이끌기 위한 조선유도연합회 평의원으로 활동했다.

 

정석용, 3‧1운동 확산 막으려 조직 결성

진천군참사 남상익(1878~?)은 진천 출신으로 정석용과 무관학교 입학 동기다. 정석용보다 1년 늦게 졸업한 남상익은 1909년 군대해산과 함께 전역하고, 1919년 진천군참사를 맡는다. 1920년 도평의회원에 선출됐고, 1928년까지 진천금융조합장과 진천연초경작조합장을 맡았다.

특히 1937년 남상철(경기도 안성· 광복 때까지 충북 도회의원 재임)과 함께 시국강연반 연사로 참여했다. 남상익은 또 매일신보 진천지국장과 1940년 창씨후원회 부회장을 맡았고, 1941년 조선총독부 직속기구인 경학원 강사로 임명돼 활동했다. 경학원은 일제 강점기 때의 유교 교육 기관으로 성균관을 개칭한 것이다,

남상익은 1941년 10월 이츠쿠시마 신사를 참배하고 “수정처럼 깨끗한 신사의 전각에 깃든 차가운 가을 / 천년만년동안 일본을 보호하리라”라며 일본의 무궁을 기원하는 시문을 남겼다. 또 1942년 조선인에 대한 징병제 실시가 결정되자 “반도 청년 또한 의무병으로 참가하니 / 충성과 무용으로 간성이 되리라 / 내선일체 이로부터 완성하리니 / 황은에 감격해 받들기를 민중들 하나같이 한다네”라는 선동 시를 짓기도 했다.

해방 후에도 충북도 미군정청 고문으로 지냈고, 1948년 진천군수로 임명돼 1949년 10월까지 재직했다.

순창에서 관직을 하다 고향 청안으로 돌아온 이탁응(1862~1934)은 1914년까지 청안군수로 재직하다가 퇴임 후인 1915년부터 1920년까지 괴산군참사를 지냈다. 1923년 청안면장에 임명돼 11년간 면장을 하다가 재직 중이던 1934년에 사망했다.

 

충북 최초 중추원 부찬의 ‘서회보’

초대 군수 가운데에는 서회보(1849~1919) 충주군수의 행적이 눈에 띈다. 충주 출신의 서회보는1907년 충주군수로 임명된 서회보는 한일강제병합 후에도 군수를 맡았고, 공립 충주보통학교 교장과 기호흥학회 충주군지회 감독을 겸했다. 1912년 한국병합기념장을, 1915년 다이쇼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사망하기 두해 전인 1917년 69세의 나이로 중추원 부찬의에 오르고 죽을 때까지 부찬의로 재임했다.

서회보는 충북 출신 최초의 부찬의로 알려졌다. 찬의와 부찬의로 나눠졌던 직위는 후에 참의로 통합된다. 도참사 군참사가 지역을 대표하는 친일파 관직이었다면 중추원 참의는 전국구 친일파를 대표하는 관직이다.

중추원은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던 관제로 왕명이 출납과 군사기무를 담당하던 중앙관청이지만 후에는 기능이 사라져 일종의 원로원과 같은 개념을 띠었다. 일제강점기 중추원도 명목상은 조선총독부 자문기구지만 사실상 친일세력을 챙기기 위한 허울뿐인 조직이었다. 하지만 대외적으로는 대단한 조직이었다. 실권은 없지만 유력자 행세를 할 수 있는 자리로 광복 후 진행된 반민특위에서도 중추원 참의는 당연범으로 취급됐다.

이러한 중추원 참의(찬의·부찬의)에 충북 출신도 여럿 이름을 올렸다. 앞서 거론한 민영은 방인혁 정석용을 비롯해 손재하 홍승목 이경식 한정석 김원근 등이다. 참의보다 높은 고문을 지낸 을사오적 가운데 한명인 이근택(1865~1919)은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거물 친일파다. 이근택과 함께 이범익(1883~?·강원도지사, 만주국 참의부 참의, 젠다오성 성장) 또한 참의로 시작해 1945년 고문에 오른 인물이다.

▲ 만주국 젠다오성장 이범익이 재만조선인의 생활을 미화한 글 '간도에 와서'-'삼천리' 1938년 10월호

영동출신의 손재하(1888~1952)는 곡물상으로 부를 축적해 1926년 영동상공회의소 의장, 영동곡물상조합장에 선출됐다. 쌀 한가마니에 20원 가량 하던 시절 5만원 상당의 부동산을 영동실업학교 건립을 위해 내놓고, 이후에도 다시 5만원 상당의 토지를 기부했다. 충북도청사 신축비비 5000원을 기부했고, 애국기 충북호 제작비 1000원도 기부했다. 엄청난 기부로 1939년 감수포장을 받은 손재하는 1939년 드디어(?) 중추원 참의라는 결실을 맺는다. 해방 후 1949년 8월 반민족행위처벌법 4조 2항과 8항을 위반한 죄목으로 반민특위에 체포돼 송치됐으나 불기소 처분됐다.

이경식(1883~1945)은 제천 출신으로 1930년 옥천군수를 퇴직하면서 중추원 참의에 임명돼 해방될 때까지 5차례나 연임했다. 1945년 6월까지 주임관 대우(옛 부찬의)를 이후에는 칙임관 대우(옛 찬의)를 받았다.

 

한정석, 지나사변공적조서에 이름 올려

경학원 사성(1941년)을 지내기도 한 이경식은 1944년 4월호 ‘경학원 잡지’에 학도병 지원제 실시에 대해 “조선에서는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영광스런 청년시대가 왔다. 펜 대신 총을 들고 열정과 교양과 체력, 일체를 바쳐 국가의 위기에 부응하는 청년학도들이 군대가는 것을 충심으로 축복한다”고 학도병 지원을 찬양했다. 해방 후 1945년 11월 3일 참의에서 파면된 이경식은 다음날 사망했다.

청주 출신의 한정석(1883~1953)은 1908년 경시청 동부서 경부로 임명돼 활동하다 1921년 고등관 8등의 경시로 승진해 충북도 경찰부에서 근무했다. 1922년에는 순사교습소 소장을 맡기도 한 그는 1924년 충북도 경찰부 보안과장을 끝으로 사직했다. 이후 가덕면장으로 임명됐고, 1928년 쇼와(昭和)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군용물자 공출과 전상자 위문 등 업무를 적극 수행해 ‘지나사변공적조서’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고, 1941년 민간 최대 전쟁협력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이 결성될 때 충북 지역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또한 1943년 야마모토 이소로쿠 원수를 추모하는 한시를 기고하기도 했고, 광복될 때까지 중추원 참의로 재임했다.

1949년 한정석은 반민특위 충청북도조사부에 의해 체포돼 검찰로 송치됐다. 복역 중 2개월 만에 병보석으로 석방된 한정석은 3년 뒤 사망했다.

이 밖에 중추원 참의를 지낸 인물 중 벽초 홍명희의 조부이자 경술국치 때 자결한 홍범식(금산군수)의 아버지로 더 유명한 홍승목(1843~1942)과 청주대학교 설립자인 김원근(1886~1965)의 친일행적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밖에도 괴산 출신으로 고창군수를 지내다 조선총독부 재무국 사무관으로 광복을 맞은 김태동(1918~1982)은 1964년 교통부 차관, 1968년 체신부 장관, 1969년 보건복지부 장관 등 정부 요직을 거치고 1971년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에는 한국알루미늄 사장, 코리아헤럴드 사장, 한국신문협회 이사 등 경제계와 언론계까지 활동하다 1982년 사망했다.

보은 출신으로 1923년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광복 때까지 전남 보성군수로 재직한 신철균(1899~?), 고등경찰을 지낸 괴산 출신의 연성희(1913~?), 매일신보 논설부장 출신 언론인 홍승구(1891~1961), 진천 출신의 관동군 헌병 임달수(1911~?) 등 자신의 안위와 부귀를 위해 민족을 등진 충북 출신 친일파의 행적은 세월이 흘러도 더욱 선명하게 새겨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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