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허장무 글·이은정 그림

거리에는 모밀내가 났다
부처를 위하는 정갈한 노친네의 내음새 같은 모밀내가 났다

어쩐지 향산(香山) 부처님이 가까웁다는 거린데
국수집에서는 농짝 같은 도야지를 잡아 걸고 국수에 치는
도야지고기는 돗바늘 같은 털이 드문드문 박혔다
나는 이 털도 안 뽑은 도야지고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또 털도 안 뽑은 고기를 시꺼먼 맨모밀국수에 얹어서 한입에 꿀꺽 삼키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나는 문득 가슴에 뜨끈한 것을 느끼며
소수림왕(小獸林王)을 생각한다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을 생각한다
(조선일보 1939년)

 

백석 시인이 ‘조선일보’에 재입사하던 해에 평안도 지방을 여행하면서 ‘서행시초(西行詩抄)’ 4편의 연작시를 발표합니다. ‘북신(北新)’은 평북 향산군 북신면의 어느 거리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요. 3행에 나오는 ‘향산(香山)’은 묘향산이고요. 이 시는 처음부터 ‘부처를 위하는 정갈한 노친네의 내음새 가튼 메밀내’ 라는 표현을 통해 강열하고 간절하게 우리의 오래된 감각을 깨웁니다. ‘돗바늘(돗자리나 이불을 꿰매는데 쓰는 큰 바늘)’ 같은 털이 드문드문 박힌 농짝만한 도야지를 잡아 걸고 국수를 치는 ‘국수집’ 풍경도 단원의 풍속화에서나 본 듯한 정감어린 모습입니다.

백석 시의 백미는 절절한 북쪽 토속어의 복원과 함께, 이처럼 애잔스럽게 우리의 옛 풍속을 담아낸 일이지요. ‘털도 안 뽑은 고기를 시꺼먼 맨모밀국수에 얹어서 한입에 꿀꺽 삼키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시인은 ‘문득 가슴에 뜨끈한 것을’ 느낍니다. 그들에게서 고대국가의 기틀을 세우고 불교를 받아들인 소수림왕이나, 요동 땅에서 연해주까지 크게 영토를 확장한 광개토대왕의 기상을 연상한 까닭입니다. 우리 민족의 구성을 부여, 예, 옥저를 포함하는 고구려 중심의 북방계와 마한, 변한, 진한의 남방계 부족의 통합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지요. 그렇게 강성했던 과거의 역사를 돌이켜보며, 지금은 비록 식민 치하의 현실이지만 변함없이 투박한 백성의 건강한 생명력에서 뜨거운 민족애와 나라의 앞날에 대한 끈질긴 박명을 생각합니다. 이 시를 읽을 때마다 시인처럼 가슴이 뜨겁게 차오르는 것은, 지금도 국토의 북쪽에서 겨레의 소중한 가치들이 반짝이는 기억을 깨우며 세세년년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지요.

해방 후 시인은 고향인 정주로 낙향해서 문총일도 좀 보고 번역도 하고 시도 몇 편 쓰는데요, 말년엔 어찌어찌 협동농장에서 양치기 일을 하다가 안타깝게도 오십 조금 넘은 나이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남북으로 갈라져 평생 백석 시인만을 오매불망 그리워하다 서울에서 8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권번 출신의 연인 ‘자야(子夜, 시인이 지어준 아호)’ 김진향 할머니는 돌아가시면서 천억 원이 넘는 재산을 법정 스님에게 남겨 유명한 ‘길상사’가 세워졌지요. 그 자야 할머니가 죽기 전에 남긴 말씀, “그깟 돈 천억은 그 사람 시 한 줄만도 못해” 아, 시 한 소절이 이렇게 비싼 가치로 새겨진 시인은 세상에 없을 것, 누가 뭐래도 백석 시인은 이래저래 지상에서 가장 반짝이는 시인으로 오래 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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