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대책위, 현장조사·표지판 설치·법제정 운동 앞장
진실화해위 피해조사 신청 528건, 전국 2위 진상규명 메카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운동 10년사 <하>

▲ 박만순 충북역사문화연대 대표
2002년 6월 18일 충북도청 소회의실에서 ‘전쟁’, ‘역사’, ‘인권’이라는 단어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청주도시산업선교회 정진동 목사님이 좌장을 맡았다. 젊은 활동가 이은규, 이효신, 장민경, 이정호, 박만순 등이 참여했다.

모임의 명칭은 ‘충북지역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간담회’였다. 성공희대 사회학과 김동춘 교수와 경상대 국문학과 신경득 교수가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운동을 위한 제안을 했고, 참석자들이 뜻을 모았다. 한국전쟁을 전후해 대한민국의 군경과 미군에 의해 불법적으로 학살된 민간인희생자에 대한 충북지역 진실규명운동을 처음으로 시작한 날이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났다. 진실규명 10년의 역사를 돌이켜본다.

지역 종교사회단체, 진상규명 충북대책위 구성

엄밀히 말하면 충북지역에서 민간인학살 문제가 제기된 것은 20년 전이다. 1992년 동양일보에서 「6·25 비극의 현장」이라는 기사를 실었고, 1994년 6월 월간 충청리뷰에서 「도내 보도연맹원 2천여명 피살」이라는 심층기사를 보도했다. 같은 해 청주기독교방송국은 「보도연맹을 기억하십니까」라는 제목의 3부작 다큐를 제작했다.

2001년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프로그램의 ‘보도연맹’편에 오창창고와 옥녀봉 사건이 자세히 소개되었다. 또한 노근리사건이 1999년 AP통신 보도를 계기로 전 세계에 전파를 탔다.('노근리사건'은 월간 충청리뷰가 94년 6월 전국에서 처음으로 심층보도했다) 전국의 유족과 시민사회단체, 학계에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운동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마침내 2000년도에 진상규명 전국조직인 ‘범국민위원회’가 출범했다.

▲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기본법’이 제정되면서 지난 2009년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해자 청주청원 합동위령제가 처음으로 열렸다. / 충청리뷰DB

충북에서는 몇 차례의 준비모임을 거쳐 2002년 10월 10일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충북대책위원회’(이하 충북대책위)를 결성했다. 괴산군 사리면 보도연맹유족회와 천주교 청주교구 정의평화위원회(이하 정평위), 사회교육센터 일하는사람들, 민주노총 충북본부, 청주통일청년회, 청주도시산업선교회 등 18개 단체가 참여했다.

곽동철 신부, 정진동 목사, 곽태영 유족이 상임대표를 맡았다. 운영위원으로는 이은규, 권혁상, 조순형, 허석열, 이제관 등이 참여했고, 박만순이 운영위원장을 맡았다. 충북대책위 초기 실무는 정평위의 이효신이 도맡았고, 박영길과 장민경 등이 일거리를 나누었다. 진실규명운동은 3개의 주체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충북대책위, 유족회, 그리고 언론사의 취재가 그것이다. 이 3주체의 핵심은 충북대책위였다.

자체 조사, 표지판 설치, 법제정 지원 활동

▲ 충북대학교 내 임시 추모관의 '플라스틱 박스'에 안치된 민간인 피해자 유골을 발굴책임자인 박선주 교수가 정리하고 있다.
충북대책위는 준비위원회 단계부터 피해신고센터를 운영했다. 괴산군 사리면 유족들을 만나 옥녀봉 사건을 확인했다. 청주시 사천동 유족들은 보은군 내북면 아곡리에서 당신들의 아버지와 형과 오빠가 학살되었다는 증언을 했다. 노근리사건 보다 희생규모가 큰 곡계굴 사건 유족들을 만났다.

4개월의 준비기간을 거쳐 2002년 10월 10일 충북대책위 결성식을 충북도청에서 가졌다. 결성식에서는 유족들의 피맺힌 사연이 토로되었고, 언론사들의 취재 열기 또한 뜨거웠다. 2002년부터 거의 매년 유족증언대회와 합동위령제, 피해실태 조사 작업이 이루어졌다. 또한 유족들과 청소년,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을 대상으로 충북도내 학살지 탐방을 진행했다.

특히 2003년도에는 3차례의 답사를 진행하면서 6개 장소에 학살지 안내표지판을 설치했다. 3월 23일에 청원군 북이면 옥녀봉과 보은군 내북면 아곡리에, 7월 6일에는 단양군 영춘면 곡계굴에, 11월 16일에는 옥천군 동이면 평산리와 영동군 영동읍 어서실과 석쟁이재에 표지판을 세워, 역사현장을 보존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충북대책위는 전국의 유족회 및 시민사회단체와 공동으로 ‘과거사법’ 제정을 위한 운동을 전개했다. 과거사법 제정을 위한 서울역 켐페인에 참여하고, 청주시내 성안길에서 서명운동을 전개했다. 과거사법 제정을 촉구하는 국회청원서를 발송했고, 2003년 2월 28일에는 국가인권위원회에 집단진정을 냈다. 2004년 2월 17일에는 과거사법 제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한나라당 충북도당사 앞에서 가졌다.

농촌지역 돌며 진실화해위 조사신청 지원

충북을 포함한 전국의 유족과 시민사회단체, 학계의 노력으로 2005년 5월 31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이하 과거사법)’이 제정되었다. 한나라당의 발목잡기로 ‘누더기법’이라는 오명을 썼지만 한국전쟁 발발 55년 만에 진실규명을 위한 법적 장치가 확보된 것이다.

같은 해 12월 1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가 출범했다. 진실화해위원회 출범은 민간인학살사건 진실규명운동이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즉 국가에 의한 조사와 진상규명, 명예회복이 진행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진실화해위원회의 출범을 알리고, 유족들에게 진실규명 신청서를 작성하게끔 하는 것이 당면과제로 대두되었다.

2004년과 2005년도에 침체기에 접어들었던 충북대책위는 진실화해위원회 출범을 기점으로 새롭게 출발했다. “과거사법 제정이 진실규명운동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라는 각오로 새롭게 출발하자는 뜻을 모았다. 2005년 12월 23일 청주시 영운동성당에서 모임을 가진 충북대책위는 박만순 운영위원장과 한귀자 간사가 상근을 하는 시스템을 갖추었다. 최현지가 영상기록을 맡아 반상근 활동을 했고, 김순애가 후발주자로 상근활동에 참여했다.

2006년은 충북대책위가 활동의 정점에 있던 해였다. 충북도내 마을 곳곳을 다니며 유족들을 만났다. ‘진실규명 신청서’ 작성을 도왔다. 마을 경로당에서, 시골집에서, 고추밭에서, 모내기 하는 들판에서, 영동군의 포도밭으로 유족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다. 도지사와 시장·군수를 만나 과거사법 홍보를 요청하고, 읍·면사무소로의 출장접수를 요청했다.

하지만 관료사회는 쉽게 변화하지 않는다라는 사실을 절감했다. 결국 6·25때 많이 죽었다는 소문이 나는 마을을 집중적으로 찾아다녔다. 청원군 강내면과 북이면, 오창을 내 집 드나들듯이 다녔다. 단양군 단양읍 노동리와 마조리를 열 번 이상 찾아갔다. 언론사를 대동하고 옥천군 청산면과 영동군 양강면 일대를 찾아다녔다.

이장단 회의에 참여하고 읍·면사무소에서 진실규명 신청서 작성을 도왔다. 이러한 발품팔이 결과는 진실화해위원회 보도연맹사건 접수현황에 반영되었다. 경상남도가 929건으로 38%를 차지했는데, 그 다음이 충북으로 528건으로 전체 신청 건수의 21%를 차지했다. 민간차원의 진상규명운동과 진실화해위원회 활동의 최고 협력자로 충북지역(충북대책위)이 각광(?)을 받았다.

분터골 발굴작업, 조사보고서 작성 성과

충북대책위의 조사활동은 민간인학살 실태조사 보고서로 또 하나의 결실을 맺었다. 2004년 2월 12일 『2003 충북지역 민간인학살 실태조사보고서』가 나왔고, 2006년 12월 19일 『기억여행: 탑연리에서 노동리까지』를 출간했다.

2006년부터 2008년까지는 진실화해위원회 지원을 받아 『청원군 한국전쟁기 민간인피해자 실태보고서』와 『영동군 민간인희생자 보고서』가 나왔다. 또한 ‘충북도내 유해매장지 조사사업’과 청원군 분터골 유해발굴 사업단에 인문사회연구팀으로 참여했다. 즉 충북대책위는 2006년 하반기부터 2008년까지 민간차원의 진상규명운동과 더불어 국가차원의 진실규명운동에도 참여하는 성과를 낳았다.

청원군 남일면 고은리 분터골 유해발굴은 과거사 진상규명운동을 유족회와 몇몇 시민사회단체의 관심에서 충북도민 전체의 관심사로 끌어올린 계기였다. 2007~8년 2년간 진행된 분터골 유해발굴은 도내 모든 언론사의 관심을 받았고, 많은 유족과 시민들이 발굴현장을 찾았다.

발굴은 충북대학교 박선주 교수가 책임을 맡아 2년간 총 337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발굴을 통해 가해자가 대한민국 군인과 경찰임이 확인되었고, 피해자가 비무장한 민간인으로 드러났다. 발굴된 유해는 현재 다른 9개 지역의 유해와 함께 충북대학교에 안치되어 있다. 총 1,600여 구의 유해가 임시로 안치되어 있는 것이다.

도내 지역단위·학살현장 따라 유족회 구성
9개 유족회 870명 회원 명예회복·피해보상 소송 진행중

진실규명운동의 또 다른 주체인 유족회는 10년간 커다란 변화와 발전이 있었다. 2002년 10월 3일 결성한 괴산군 사리면 보도연맹유족회는 도내 유족회의 맏형이다. 회장 이제관과 고문 윤갑진은 진실규명운동의 척박한 시기였던 2003년도에 이미 ‘위령비’를 유족들의 자비로 건립했다.

이후 충북도내 뿐만 아니라 전국의 유족회 관련 행사에 모두 참가하는 열정을 보였다. 사리면 유족회의 뒤를 이어 곡계굴유족회, 오창유족회가 탄생했다. 2006년 10월 25일에는 청주·청원 지역의 유족 160여명이 충북대 개신문화관에서 ‘청주·청원 보도연맹 유족회’를 결성했다.

2012년 현재 도내 유족회는 앞의 유족회 이외에도 충주, 보은, 영동, 분터골 보도연맹 유족회가 있으며, 단양군 노동리·마조리 유족회가 있다. 충북도내에는 총 9개 유족회에 870여명의 회원이 있다. 충북은 2002년에는 진실규명 운동의 불모지였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2012년 현재는 진실규명 운동의 메카로 불린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오창보도연맹사건, 곡계굴 사건, 청주·청원 보도연맹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2009년 11월에는 ‘충북지역 국민보도연맹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진실화해위원회는 한국전쟁을 전후해 발생한 민간인학살사건에 대해 가해자의 책임을 밝히고 역사와의 화해를 제안했다.

하지만 진정한 역사와의 화해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해결되어야 할 과제들이 남아있다. 과거사법 개정을 통한 추가접수와 추가조사가 핵심사항이다.

이외에도 지속적인 유해발굴과 배·보상에 관한 종합대책안 수립도 절실하다. 유족들만의 위령사업으로 그치지 않고, 전 국민이 한국전쟁의 아픔을 기억할 수 있는 추모사업이 기획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국적 추모관이 시급히 건립되고, 추모관 운영에 대해 전 국민의 지혜를 모아야 한다.

▲ 후퇴하는 군경에 의해 청주형무소 수감중이던 사상범들이 청원군 낭성면 도장골로 끌려가 집단학살 당했다. 61년만에 일부 유가족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된 현장 위령제./ 충청리뷰DB

민간인 희생자 국가위령시설 청원 1순위
남일면 분터골 현장성·접근성 경쟁지역보다 뛰어나

지난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발족해 본격적인 민간인 피해조사와 함께 학살현장에 대한 발굴작업이 시작됐다. 이후 3년간 전국 10곳에서 유해발굴 작업을 벌여 1618구의 유해와 4690점의 유품을 수습했다.

유해발굴 작업은 충북대 유해감식센터(소장 박선주 교수)가 맡았고 충북 청원 분터골(남일면)을 포함한 충남 공주 상황동, 대전 산내 골령골, 전남 구례 봉성산, 전남 함평 광암리, 전남 진도 갈명도, 경북 경산 코발트광산, 경남 산청 원리(외공리 포함), 경남 진주 진성고개, 전남 순천 매곡동 등 10곳을 마쳤다.

박선주 교수는 “현재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가 묻힌 곳으로 신고된 현장이 32곳 이지만 12곳만 유해를 발굴했을 뿐, 이직도 발굴이 미흡한 실정이다” 며”결코 많은 돈이 필요한 사업이 아닌데 결국 정부 의지의 문제”라고 말했다. 이명박 정부이후 진실화해위의 예산확보가 여의치않아 사실상 손을 놓고 있는 셈이다. 반면 국군전사자에 대해서는 유전자(DNA) 감식을 통힌 신원확인 사업을 진행 중이다.

박 교수는 언론인터뷰를 통해”국방부가 이미 시설과 인력을 갖춰 진행 중인 유해발굴사업의 폭을 민간으로까지 넓혀 군이 발굴분야를 전담하고, 감식분야는 민간에서 맡아 진행하는 방안이 논의되기도 했으나 결국 최종단계에서 무산됐다”고 털어놨다.

충북대 발굴팀이 수습한 유해는 지난 2009년 3월 충북대 전산정보원 3층에 개관한 추모관에 보존하고 있다. 하지만 임시 안치소이며 공간이 비좁아 2017년에 사용기한이 만료된다.

이에따라 정부는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를 위한 국가위령시설물 건립 후보지를 물색하고 있다. 행정안전부가 서울대사회발전연구소에 용역의뢰해 국가위령시설물 건립 타당성 조사와 적합한 지역을 찾고 있다. 현재 청원 분터골과 함께 충남 공주와 전남 함평이 후보지로 검토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청원 분터골은 2009년 약 150여구의 유해와 430여점 이상의 유품이 발굴된 유해발굴 현장이라는 역사성이 큰 장점이다. 또한 국토의 중심이라는 지리적 입지와 함께 다른 후보지에 비해 큰 도로와 인접한 교통 접근성도 장점이다.

이에대해 박 교수는 “개인적으로 발굴이 진행됐던 충북 청원군 분터골과 공주 상황동을 행안부에 추천했다. 청원 분터골은 현장성과 접근성이 좋으면서 외부에 노출되지 않는 장점이 있다. 반면에 공주 상황동은 그늘이 짙은 것이 단점”이라고 말했다.

청원 분터골에 국가위령시설물이 건립될 경우 약 200억원의 국비가 투입돼 위령탑과 추모관 등 부대 시설물이 건립될 예정이다. 국립현충원과 같은 대규모 매장시설이 아니기 때문에 주변의 민원 발생 소지도 적다. 일차적으로 전국의 참배객을 비롯한 외부 방문객을 끌어들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또한 인권과 평화의 상징으로 교육 현장과 관광 유적지로 활용가치가 높은 컨텐츠인프라가 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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