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 아곡리 보도연맹학살 A여교사의 마지막 유언 확인돼
정부, 150여명 학살됐지만 진상규명 회피…“유해 발굴해야” 지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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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0월 23일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충북연합 회원들이 보은군 내북면 아곡리에서 발굴된 민간인 희생자 유골을 들고 이시종 충북지사 면담을 요구하며 본관 계단에 올라서자 이를 막는 도청 직원들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사진 충북인뉴스 DB)
한국전쟁당시 보도연맹사건으로 희생된 유가족 단체가 기자회견을 진행하는 모습(사진 충북인뉴스 DB)

“군인아저씨, 마지막 부탁입니다. 우리 친정 어머니는 보통 분이 아니니 나를 꼭 찾으러 오실겁니다. 나를 따로 혼자 묻어주세요”

1950년 7월 한국 전쟁 당시 보은군 아곡리에서 벌어진 보도연맹원 학살 사건의 처참했던 실상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7월경으로만 추정됐던 아곡리 학살사건은 7월 12일 오전 10시경으로 확인됐다. 남편의 전력 때문에 보도연맹에 가입된 한 여교사는 처형당하기 직전에 남긴 유언 덕택에 가족이 시신을 수습 할 수 있었다.

아곡리에서 학살된 3명의 여성은 150명의 남성 사망자와는 별로도 매장돼 유전자 감식만 진행된다면 가족에게 시신을 인도 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2011년 11월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청주‧청원국민보도연맹 희생자의 유족이었던 A씨가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청주‧청원 국민보도연맹 사건은 전시에 국가권력이 전국적으로 대규모의 학살을 자행한 반인권적인 중대범죄행위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또 “구금된 청주‧청원 지역 국민보도연맹원 등 예비 검속자들은 상부의 지시를 받은 청주경찰서 사찰계 소속 경찰들과 CIC 대원 등에 의해 1950년 7월 초순경부터 7월 중순경까지 충북 청원군 남일면 고은리 분터골, 같은 면 쌍수리 야산, 보은군 아곡면 아곡리 아치실 등으로 이송된 후 재판 절차 등에 의하지 않고 집단 총살되었다”고 기초 사실을 적시했다.

보은군 내북면 아곡리 학살 사건은 법원까지도 사실관계를 인정했지만 그동안 정부 차원의 유해 발굴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2005년 참여정부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과거사위)를 발족하고 2008년 청원군 남이면 분터골에서 유해발굴 작업을 실시했지만 보은 아곡리는 제외됐다. 당시 과거사위는 청원 분터골 이외에 낭성면 도장골, 남일면 지경골, 보은 아곡리 등 도내 4곳의 현장에 대한 유해 발굴을 권고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와 자치단체는 발굴예산을 확보하지 않았다. 한국전쟁에서 숨진 군인들의 유해발굴만 진행할 뿐 민간인 학살자는 외면해 온 셈이다.

결국 이를 보다 못해 2014년 보도연맹 희생자 단체와 시민단체가 나서 유해 시굴작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당시 아곡리 학살현장에서 포크레인으로 시굴작업을 벌인 지 30분도 채 안돼 팔·다리뼈, 두개골 등 유골 20여점이 나왔다.

1950 한국전쟁당시 보도연맹사건으로 보은군 아곡리에서 희생된 박정순씨(사진 우측). 그는 교사로 재직하고 있던 중 보도연맹 사건으로 끌려가 보은 아곡리에서 무참히 학살됐다

“친정 어머니가 나를 꼭 찾으로 오실 거에요”

정부차원의 진상규명과 유해발굴 노력이 지체되면서 내북면 아곡리 학살 사건의 진상은 제대로 규명되지 못했다. 정확한 피살 인원과 신원, 학살 일시 조차도 파악이 안돼 7월 초순경으로만 알려졌다.

이런 가운데 학살 일시를 추정 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확보됐다. 당시 아곡리 학살 당시 희생된 故 박정순(1923~1950,당시 청주중앙공립초등학교 교사)씨의 장녀 최계자씨가 확보한 가족관계증명서 제적 문서에는 사망시점이 1950년 7월 12일 오전 10시경으로 기재됐다.

아곡리에서 함께 희생된 박정순 씨의 올케 B씨도 같은 시간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됐다. 사망 장소는 보은군 내북면 아곡리로 기재됐다.

그동안 아곡리 학살일시는 7월 초순 혹은 7월 10일로 전해졌지만 이에 따르면 학살은 7월 12일 이뤄진 것으로 볼수 있다.

박정순 씨의 유족들은 그가 학살 직전 남긴 눈물겨운 마지막 유언도 공개했다. 박 씨의 조카 C씨는 “작은 어머니가 마지막 유언하시길 ‘우리친정 어머니는 보통 분이 아니오니 나를 꼭 찾으로 오실겁니다. 나 혼자 따로 묻어주시길 부탁합니다’라는 유언 때문에 동네분 들이 혼자 묻어 주셔서 그 이듬해 선산으로 모셔와 이장했다”고 말했다.

학살 당시 현장을 목격한 아곡리 주민 신덕호(89)씨도 “청주보도연맹 회원 총살 현장을 보았는데 사망자 중 여자는 3명이었다. 한분은 유언하기를 ‘우리 친정 어머니는 보통 분이 아니니 꼭 나를 따로 묻어달라’고 말했다”며 “나중에 여자 이므로 따로 매장했는데 1951년 경 박정순 씨 친정어머니가 딸을 이장하기 위해 오셨고 청주 선산으로 이장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밝혔다.

 

평범했던 교사는 왜 보도연맹원이 됐나?

학살 당시 박정순 씨는 8살, 5살 두 자녀를 둔 어머니이자 청주중앙공립초등학교 교사였다. 박 씨는 일제강점기시절 천재나 입학할 수 있다는 경성사범(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의 전신)대를 나와 교편을 잡고 있던 중 국민보도연맹에 가입됐다.

그렇다면 그는 왜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하게 됐을까? 박 씨의 장녀 최계자씨는 “아버지는 당국으로부터 좌익 활동을 한 것으로 의심 받았다. 아버지는 어느 날 행방 불명 됐고 당시 경찰은 아버지 대신에 어머니와 고모 B씨를 국민 보도연맹에 가입시켰다는 말을 친척으로부터 들었다”고 밝혔다.

박만순 충북역사문화연대 대표는 “박정순씨는 공무원 신분에 아이 둘을 키워야 하는 상황에서 국민보도연맹을 안전한 은신처로 믿었을 것”이라며 “좌익 활동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박 씨가 단지 가족이었다는 이유만으로 보도연맹에 가입돼 학살 당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만순 대표는 “당시 경찰은 박정순과 함께 트럭에 실린 보도연맹원 들에게 ‘속리산 구경시켜 줄 테니 음식 싸 갖고 오라’는 거짓말을 했다”며 “미원초등학교에서 하룻밤을 지낸 이들은 보은군 내북면 아곡리 아치실에서 1950년 7월 12일 오전 10시경 집단 학살됐다”고 밝혔다.

당시 현장을 목격한 마을 주민 신덕호씨도 “그때 군인·경찰이 논밭에서 일하던 주민들을 전부 집에 들어가게 했다. 산골짜기 쪽에서 총소리가 나고 비명이 들렸다. 트럭이 3~4 왔으니까 한 100명쯤 되는 것 같다. 총살 한 뒤에 마을 사람들 부른 뒤 ‘빨갱이 잡아놨으니 장례 치르라’고 해서 우리가 가까운 야산 3곳에 시신을 매장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주민 E씨는 “여성 보도연맹원 3명은 별도로 학살됐다, 시신수습과정에서 속옷 속주머니에서 돈이 나왔다. 그 돈으로 시신을 수습했던 사람들이 술을 받아먹었다”고 밝혔다.

박정순씨 장녀가 공개한 가족관계부 제적 문서. 여기에는 박 씨의 사망일씨가 1950년 5월 12일 오전 10시라고 적혀있다.

 

2014진 민간단체에 의해 진행된 보은국 내북면 아곡리 보도연맹 학살사건 유해 시굴 장면(사진 충북인뉴스 DB)

“유전자 감식해서 유족에게 시신 인도해야”

박만순 충북역사문화연대 대표는 2002년 결성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충북대책위원회’ 활동으로 잔뼈가 굵은 인물이다. 2014년 보은 아곡리 학살 시굴조사에도 직접 참여했다.

박 대표는 “아곡리 학살 현장에 대한 유해 발굴 조사가 시급히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국군을 비롯해 중공군과 북한군 병사에 대해선 유전자 감식을 통해 신원 확인을 하고 있다. 하지만 민간인 희생자는 이런 저런 이유로 유전자 감식을 하지 않고 있다. 이런 결과 학살당안 민간인 중 정부에 의해 유가족에게 시신이 인도된 경우는 하나도 없다”고 지적했다.

박 대표는 “보은 아곡리 현장에는 100여구의 시신이 묻힌 곳과 50구의 시신이 묻혀 있는 곳이 있다. 그리고 이번 증언으로 3명의 여성이 따로 묻혀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며 “시신이 집단 매장돼 있는 곳은 기술상의 어려움이 있지만 여성이 묻혀 있는 곳은 남아있는 시신이 2구인 만큼 유전자 감식만 하면 신원을 확인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박정순 씨의 장녀 최계자씨는 “하루 속히 과거사법이 개정되어 어머니의 죽음이 밝혀지고 명예회복 되길 바란다. 또한 아곡리 유해발굴이 진행되어 고모 유해를 되찾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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