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일면 매방골 5일동안 1천여명 사살
청주교도소 재소자 낭성면 골짜기서 총살

해방을 맞아 청주에서도 사회주의를 표방한 좌익계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현재 북문로 중앙극장 맞은편 건물에는 좌익계의 총본산인 민족전선 충북지부가 자리잡아 연일 집회와 행사가 열렸다. 신탁통치안에 대한 찬반대립 때는 시내 중심가에서 좌 · 우익단체의 청년대원들이 시위도중 집단 난투극을 벌이기도 했다. 심지어 3 ·1절 기념행사를 중앙공원과 무심천에서 따로 진행할 정도로 대립양상은 심각했다.

48년 이승만 정권 수립과 함께 반공법이 제정돼 일체의 좌익단체를 불법단체로 규정 하고 활동을 금지시켰다. 더이상 좌익사상을 논하는 것은 금기였다. 그러나 이념대립으로 인한 양측의 정신적 간극에도 불구하고 당시 지식층의 사적모임에서는 공공연히 이념 논쟁이 벌이지곤 했다.

당시 충청일보 편집국 기자로 재직 했던 송경호씨(98년 작고)는 지난 94년 본지 취재과정에서 “우리 신문사에도 소수의 좌익성향 기자들이 있었고 별 거리낌없이 자기 발언을 했었다. 해방이후 3년간 사상논쟁이 자유스러웠기 때문에 그때 풍조로는 별로 어색하지 않았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이같은 시대상황 속에서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해방직후 활동상으로 보아 청주에도 상당수의 사람들이 보도연맹에 가입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도내 어떤 기관에서도 보도연맹 관련자료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다만 그때 당시 지역인사들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군 · 경찰 정보부서에서 좌익단체 회원명단을 확보하고 있었고 최소한 수천명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청주지역 보도연맹 학살현장은 미원, 보은 방면의 국도변에 산재한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청원군 남일면 고은3구 매방골 골짜기에서 1천명 이상이 총살돼 도내 최대 규모일 것으로 추정된다.

고은리 뒤흔든 5일간 총성
97년 봄, 미국에 살고있다는 70대 할아버지가 남일면 고은3구를 찾아왔다. 교포노인은 마을내력을 잘알고 있는 사람을 수소문을 했고 토박이인 임모씨(73)를 만나게 됐다.
교포노인은 한국전쟁때 숨진 여동생의 흔적을 찾기위해 일시 귀국한 것이었다. "그 양반 여동생이 자꾸 꿈에 나타나 서 ‘나는 원귀가 돼서 구천을 떠돌고 있는데 오빠만 잘살고 있느냐’고 원망을 해서 괴롭다는 거여. 그래서 죽은 자리라도 확인해 볼라고 남일면까지 찾아온 거였어” 임씨가 전해들은 교포노인의 사연은 애절했다.

노인의 고향은 진천이었고 해방 직후 고등학교를 졸업한 여동생이 청주에서 좌익단체 활동을 하다가 보도연맹원이 됐다는 것. 하지만 전쟁발발과 함께 여동생은 경찰에 연행된 뒤 소식이 끊어졌고 한참뒤에야 남일면 쪽에서 총살당했다는 얘기를 전해들었다는 것이다.

당시 남북간의 살벌한 냉전 시대에 여동생의 존재를 입밖에 조차 올리지 못한채 세월이 흘러갔고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까지 가게됐다. 결국 백발의 나이가 되도록 가슴에 박힌 평생의 한을 지우지 못해 뒤늦게 태평앙을 건너온 것이었다.

 
“여동생이 고등학교까지 나온 똑똑한 수재였는데, 억울하게 죽었다고 엄청 아쉬워했어. 그때 연거푸 찾아와서 보도연 맹원들이 죽은 매봉골 골짜기 사진도 찍고 그랬어. 미국가서도 고맙다고 나한테 편지까지 보냈는데, 그뒤로는 연락이 끊어졌어. 6 · 25때 얘기 자꾸 묻지마, 거 뭐 좋은 일이라고”

임씨 이외에 다른 주민들도"여자들도 간혹 있는데, 누구는 애를 업은 여자도 봤다 그러더만. 처음엔 형무소 최수복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많이 실려왔었어. 매봉골 논두렁가에 작은 골에다가 시체를 잔뜩 쌓아놓는 바람에 냄새가 엄청났지. 그쪽에서 논농사 짓던 동네 사람들이 한 여름에 송장 거두느라고 엄청 애을 먹었어"  "그때 그 사건"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말하기를 꺼려했다.

시체 너무 많아 손도 못대
지난 12일 해질녘, 취재진이 두 번째로 마을을 찾았을 때 마침 동네노인들이 가게에서 소주잔을 나누고 있었다. 기자는 ‘충청리뷰‘의 국민보도 연맹 학살기사를 보여주면서 관심을 유도했고 한두명씩 입을 열기 시작했다.

"한 닷새에서 일주일 동안 매일처럼 트럭에다 사람들을 실어와서 죽였어. 매봉골 앞에 트럭이 죽 서면 보도연맹들이 줄줄이 묶여서 내린 다음에 골짜기로 들어갔어. 그러면 총소리가 한참 나다가 다음 사람들이 끌려가구, 가구 하더라구. 보도연맹 총살할 때는 경찰들이 길 양쪽을 막고 다른 차는 다니지도 못하게 했고 동네사람들도 밖을 내다보면 큰일난다고 총을 쏘면서 겁주고 그랬지’'

“여자들도 간혹 있는데, 누구는 애를 업은 여자도 봤다 그러더만. 처음엔 형무소 죄수복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많이 실려왔었어. 매봉골 논두렁가에 작은 골에다가 시체를 잔뜩 쌓아놓는 바람에 냄새가 엄
청났지. 그쪽에서 논농사 짓던 동네 사람들이 한 여름에 송장 거두느라고 엄청 애를 먹었어” “여기하고 분터골하고 합치면 한 1천명 정도는 죽었을 거여.

그런데 시신을 찾아간 경우는 한 사람밖에 없었어. 용케 찾아서 옆뎅이에다 임시로 매장 했다가 나중에 전쟁끝나고 이장했대. 여름에 날씨가 덥다보니 시체가 얼굴이 뚱뚱 부어서 그냥 봐서는 찾을 수도 없구 옷이나 신발같은거 보고 분간을 해야 하는데 나중에 온 서너명은 그냥 포기하고 가더라구"

신경통 약으로 人骨 줍기도
분터골은 고은3구와 인접한 두산2구의 작은 골짜기다. 이 곳은 여름 장마철이면 물에 씻겨내린 사람뼈가 무더기로 발견되곤 했다. 실제로 일부 주민들은 인골(八骨)이 신경통에 효험이 있다는 속설 때문에 이 뼈를 가져가기도 했다고. 청주 지역 보도연맹들이 학살당한 또다른 장소는 지난 94년 충청리뷰가 확인한 보은군 내북면 이곡리 국도변이다. 당시 군인들이 트럭 4~5대를 길가에 세우고 100명 이상의 보도연맹원를 총살했다고 주민들은 증언하고 있다.

“그때가 한낮인데, 군인들이 큰길에 트럭을 세워놓고 마을로 오더니만 주민들은 빨리 뒷 산으로 올라가라는겨. 빨갱이 노릇한 보도연맹들을 총살시킨다고 그러더만. 다들 놀라서 산에 올라갔는데 갑자기 총소리가 요란하더라구. 내려다보니 길가 논두렁하구 산아래쪽 두군데에서 사람들을 세워놓고 총을 쏘는겨. 그때 두세명은 산으로 막 도망을 치는데 결국엔 뒤에서 총알을 맞고 쓰러지더만” 당시 10대 중반이 었던 김학수(67) · 신원호(65) 씨의 목격담이다.

군인들이 떠나자 마을 주민들이 시체 수습에 나섰고 두 군데에 웅덩이를 파고 살짝 가매장시키는 정도였다. 아곡리에서 숨진 보도연맹원 가운데 유일하게 가족들이 시신을 찾아 위령비를 세운 사례가 있다.
이름은 강해규, 사망 당시 30세, 1남2녀의 자식을 둔 "가까스로 남편을 찾았는데 왜 이제서야 오느냐고 물었어요. 미안한 마음에 빵하고 쓰고 있던 우산을 건네줬더니 '당신 비맞으면 안된다'면서 그냥 비를 맞구 떠났는데…"

이씨가 다시 남편을 만난 것은 그로부터 4~5일 뒤. 학살 소문을 들은 전갈을 해주는 바람에 용케 아곡리까지 찾아나선 것이다.
두 사람은 이승과 저승의 사람으로 재회했고 어수선한 난리통에 경황도 없이 끔찍한 그 자리에 묘를 쓰게된 것이다.

청주상고 교사였다. 94년 취재과정에서 서울에 살고있는 고인의 미망인과 어렵사리 연락이 닿았다.
“전쟁나고 얼마 안 지났을 땐데, 전날밤에 학교에 숙직 하러 간 애들 아빠가 다음날 낮이 됐는데도 안오길래 걱정을 했어요. 근데 친구분이 부리나케 찾아와서 경찰에 붙잡혀 갔다고 그러더라구요. 얼른 경찰서로 가보라고 하길래 음식 준비할 새도 없이 빵을 사가지고 달려갔어요" 미망인 이숙용씨(77)의 기억은 생생했다.

학살현장의 유일한 묘비
이씨가 청주경찰서 앞에 도착하자 이미 많은 사람들이 군용트럭 4~5대를 둘러싸고 가족을 찾느라 아우성이었다.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는 가운데 트럭안에는 한참 젊은 나이의 보도연맹원들이 힘없이 앉아 있었다. 남쪽으로 먼저 피난시켜 준다는 헌병들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은 가족들은 이들어게 음식, 옷등이 담긴 보퉁이를 건네주며 안부를 빌었다.

"가까스로 남편을 찾았는데 왜 이제서야 오느냐구 물었어요. 미안한 마음에 빵하고 쓰고 있던 우산을 건네줬더니 '당신 비맞으면 안된다’ 면서 그냥 비를 맞구 떠났는데…"
이씨가 다시 남편을 만난 것은 그로부터 4-5일 뒤. 학살 소문을 들은 보은 친정집에서 전갈을 해주는 바람에 용케 아곡리까지 찾아나선 것이다. 두 사람은 이승과 저승의 사람으로 재회했고 어수선한 난리통에 경황도 없이 끔찍한 그 자리에 묘를 쓰게된 것이다.

취재결과 특히 관심을 끄는 현장를 발견했다. 청주 산성동과 미원국도가 갈라지는 삼거리 인근 골짜기에서 청주교도소의 사상범으로 추정되는 죄수들이 집단사살 당한 것이다. 청원 낭성면 관정리 신풍우(86) · 이광선(79)는 지난 94년 1차 취재당시 자신들의 경험담을 전해주었다.

"마을옆에 구천 고갯마루에서 미원에서 끌려온 보도연맹 사람들이 총살을 당하구 난 다음날이여, 지서 순사가 젊은 사람들 모이라구 하길래 가봤더니 거기 도장골에 송장이 쫙 깔렸더라구. 보니까 도망가다 뒤에서 총을 맞고 죽은 것 같은데 전부다 손에 수갑을 찼더라구. 죄수복을 입고 두 사람이 한팔씩 수갑을 찬겨”

수갑찬 시신, 재소자 추정
두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이들은 청주교도소의 수감자일 가능성이 높다. 보도연맹원은 대부분 경찰서, 학교, 창고 등에 임시수용된 뒤 새끼줄이나 오랏줄에 묶여 이동했다. 하지만 수갑을 채웠다는 것은 특별한 관리를 요하는 한정된 사람들로 짐작된다.

미원면의 경우 당시 면장과 지서장이 상당수의 보도연맹원들를 구제해준 것으로 알려 졌다.
청원군 문화원장 오윤환씨는 “보도연맹원의 숫자가 꽤 많았는데 그때 당시 한상대면장이 지서장에게 ‘이 사람들을 다 보낼 수는 없지 않느냐' 고 설득해서 주동자로 나선 몇사람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사람들은 경위서만 받고 돌려보내 주었답니다. 끌려간 사람들은 추정리쪽에서 죽었는데 미원하고 거리가 가까워서 소문을 듣고 시신을 찾아온 집들이 많았어요’’라고 설명했다.

좌익선별 작업도 벌어져
보은군 마로면은 해방직후 좌익 농민단체의 활동이 가장 왕성했던 곳으로 꼽힌다. 전쟁전 상주농업학교를 다녔던 김경수씨(70)는 고향인 마로면 관기리의 대동청년단에서 활약한 우익인사였다.

“그때 마을 전체 300호 가운데 우익은 7호에 불과할 정도였어요. 좌익들이 기세가 대단했지만 내가 검도선수 출신이고 해서 만만히 보지는 못했죠. 전쟁이 터지고 보도연맹에 대해 소집령이 내렸지만 지서장이 유한 분이라서 많이 구제가 됐어요. 보도연맹 명단철이 두툼했는데 대충 넘기면서 한 장에 두세명씩만 이름을 불렀어요.

그래서 다른 곳보다 상한 사람은 별로 없어요. 진짜 빨갱이 노릇한 사람만 죽였기 때문에 보도연맹은 양민학살 이라고 할 수가 없지요” 김씨는 관기1구의 일명 강찡골에 서서너명의 보도연맹 주동자들이 총살을 당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취재결과 마로면 세중리의 경우 한 마을에서 15명이 집단학살 당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마을 구장회씨(70)는 “그때 20명이 지서로 끌려 갔는데 5명은 용케 풀려났어요. 그러니 살아난 집하고 죽은 집하고 전쟁이 끝나고도 영 찜찜한 거여. 사실상 도장 찍으면 나중에 토지 무상으로 준 다니까, 우매한 농촌사람들이 시키는데로 손도장 찍은 건데, 이게 총살당할 일입니까? 관기리 솔고개 골짜기에서 죽였는데 당장 찾아나서기도 겁나고 10여일 뒤에야 시신 찾으러 갔어요. 그냥은 분간도 안되고 허리빵, 옷, 신발보고 간신히 찾기는 했어요”라며 답답한 심정을 가누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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