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 사고 이후 당뇨합병증, 세균 감염으로 다리 절단
산재 인정, 민사소송서 승소했지만 보상금 한 푼도 못 받아
이주민인권센터 도움으로 치료했지만 병원비 2000만원 걱정

[기획] 우리 곁에 이주노동자가 있다 

 

이주노동자 100만 시대. 언제부터인가 이주노동자들은 우리사회 산업현장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축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농업현장에서, 건설현장에서 그들은 오늘도 말없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없다면, 산업현장이 멈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들의 목소리를 듣지도, 기억하지도 못합니다. 내국인의 산재사고가 줄어드는 반면, 외국인들의 산재사고는 오히려 증가하고 있음에도 그들의 이야기는 어찌된 일인지 들리지 않습니다.

충북인뉴스는 다시 이주노동자들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그들의 삶과 죽음, 눈물과 웃음을 알리고 이제라도 ‘건강한 동행’을 하자고 제안하려 합니다.

 

스리랑카 국적 이주노동자 시란 씨.
스리랑카 국적 이주노동자 시란 씨.

 

인도 남해안에 위치한 열대 섬 국가 스리랑카, 천혜의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나라지만 그곳에도 생계를 걱정하는 노동자들은 있다. 그들은 자신의 노동을 팔아 돈을 벌기 위해 다른 나라를 찾는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올해 우리나라에 입국한 스리랑카 노동자는 2만 1000여 명에 이른다. 지난해 대비 28.5% 늘었다.

2003년 20대 초반 나이에 ‘돈을 벌고 싶다’는 생각 하나로 한국을 찾았던 시란 씨(43)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스리랑카에서 부모와 함께 작은 가게를 운영하던 그는 ‘한국에는 좋은 회사가 많다’는 말을 듣고 고용허가제로 한국에 입국했다.

일단 터를 잡은 곳은 공단이 밀집해 있는 경기도 안산시였다. CNC파이브 만드는 공장, 자동차 부품 만드는 공장, 후라이팬·냄비 만드는 공장 등 그가 거쳐 간 곳은 5~6곳이 넘는다.

하지만 그래도 그때는 제법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시란 씨는 회상한다. 몸은 고되었지만 안산에 있는 외국인노동자 인권단체의 도움으로 한국말도 배웠고, 친구도 사귀었으며, 돈도 제법 모았다고 했다. 잠시지만 스리랑카에 있는 부모에게 생활비를 드리는 기쁨도 느낄 수 있었다고 전했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충북 진천으로 오면서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키 190㎝, 몸무게 100㎏에 육박하던 건장했던 20대 청년은 이제 손가락 세 개는 감각이 없고, 한쪽 다리는 절단된 40대 장애인으로 변해 버렸다. 병원비 2000여 만 원을 걱정하는, 오도 가도 못하는 불법 외국인 노동자가 되었다.

그에겐 어떤 사연이 있었던 걸까?

 

민사소송서 승소했지만 단 한 푼의 보상금도 못 받아

벌써 10여 년 전 일이다. 몸서리쳐지던 그 날의 사고를 시란 씨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센서가 잘못되었는지 몰랐어요. 딩~ 소리가 나는데 손이 프레스에 눌려 있더라고요. 뼈가 밖으로 튀어나오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장갑으로 감았는데 피가 많이 났어요. 사장은 나를 바로 병원에 안 데리고 가고 앉아있으라고 했어요. 한참 있다가 병원에 갔어요.”

 

그날 의사는 손가락 세 개가 절단될 수 있다고 했다. 아픔도 아픔이지만, 설움이 북받쳐 올라왔고 속절없이 눈물만 흘렀다. 우여곡절 끝에 접합수술은 성공했지만 그날 이후 세 손가락에는 감각이 없다. 실제 기자가 시란 씨의 손을 만져보니 차갑고 싸늘한 느낌이다. 시란 씨는 신경이 끊어져서 피가 안도는 것이라고 했다.

인생의 내리막길은 그때부터였는지도 모른다. 사고는 산재 신청을 인정 받았지만 회사 사장을 상대로 한 민사소송은 승소를 했음에도 단 한 푼의 보상금도 받지 못했다. 두유 한 박스만을 건넨 채 사장은 폐업 신고를 하고 다른 지역으로 가버렸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아들 이름으로 회사를 다시 설립해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변한 것은 손가락 이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스리랑카에 있는 부모와 가족이 교통사고를 당해 사망했다는 소식도 듣게 되었다. 불법체류자 신분이다 보니 장례식장에도 가보지 못하는 신세를 한탄하며 술을 가까이 한 것이 또 화근이 되었다.

젊은 나이에 너무 빨리 찾아온 당뇨병. 시란 씨는 당뇨 진단을 받았지만 이 또한 병원비와 약값이 무서워 제대로 된 관리를 할 수 없었다. 급기야 당뇨 합병증으로 발 감각이 무뎌졌고 화상을 입은 이후에는 세균 감염, 그리고 무릎까지 절단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청주이주민노동인권센터의 도움으로 청주의료원과 충북대병원을 전전하며 치료를 받아 이제는 어느덧 회복단계에 이르렀다. 하지만 다리 절단보다 더 무서운 병원비가 또다시 그를 기다리고 있다.

그는 아픔과 눈물로 얼룩진 한국생활 20여 년을 이렇게 회상한다.

 

“한국에 와서 힘든 것도 있었지만 좋은 사람도 많이 만나고 행복한 시간도 있었어요. 혼자 살아도 괜찮았는데 이제 이런 일이 생겨서 저는 인생이 끝났어요. 재활을 하고 돈을 다시 벌고 싶지만 힘들어요.”

 

한국에서의 행복은 ‘노동력’이 있을 때만 누릴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이제 와서 깨닫는다.

그럼에도 그는 아직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절망과 희망을 수도 없이 오고 가지만 다시 행복해지고 싶다고 말한다.

이제 우리는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걸까?

“그러니까 너의 나라에서 살지 왜 한국에 왔냐”, “그러니까 당뇨 관리를 잘했어야지”, “그러니까 돈을 좀 모아뒀어야지”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최소한 이런 말은 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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