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오신정란(청주여성의전화 대표)

1987년 6월 10일은 민주화 항쟁이 일어난 날이다.

박종철 학생 고문치사사건으로 시작된 민주화 투쟁은 매일매일 거리를 시민들로 채워나갔다. 1987년 6월 10일은 전국적으로 시위가 이루어진 날이다.

그 어느 해보다 뜨거웠던 그해 6월, 결국 시민들은 군사 독재정권에서 대통령 직선제를 얻어냈다.

민주주의를 향한 첫 승리였다. 518년 광주시민 학살로 정권을 세운 쿠데타의 주범들도 더는 많은 시민의 민주화를 향한 열망을 꺾을 수 없었다.

‘박근혜 탄핵’을 외치며 2017년 봄여름 가을 겨울까지 들었던 촛불도 6월 민주항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려는 시민의 힘은 1987년 뜨거웠던 그 여름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평화는 그냥 오지 않는다.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당연한 것은 없다. 수없이 많은 사람의 피와 땀으로 끝없는 투쟁으로 크나큰 희생을 전제로 이루어낸 것이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것들을 당연하다 여기는 것이 누군가의 끝없는 수고로움, 희생과 헌신으로 얻어진 것임을 기억하는가?

학생들을 비롯해 젊은 세대들은 역사 교과서로 영화로 6월 민주화 항쟁을 배운다.

아이들은 영상으로 그날을 경험한다.

간혹 유명 배우와 레트로 감성으로 그날을 말하는 것을 보면 나는 바로 그 시절 거리에서 마신 최루가스, 백골단의 곤봉 매질이 떠올려진다. 공포로, 두려움으로 내 몸은 기억을 불러낸다.

 

1987년 6월, 나는 서울에 있었다.

 

삼수생 신분이었다. 당시 내가 다녔던 학원은 서울역 맞은편에 있었다.

점심시간마다 불명확한 구호 소리가 들렸지만 그건 남의 이야기였다.

6월 어느 날, 점심을 먹으러 나섰다가 그만 시위대 무리에 합류하게 되었다.

오도 가지도 못하게 되어 군중의 무리에 휩쓸려 나는 대오에 떠밀려 가고 있었다.

흰 와이셔츠에 양복바지를 입은 사람들(넥타이 부대)이 대부분을 차지한 시위대는 한 손에는 신문을 말아 들고서 시청을 향해 행진하고 있었다. 그들은 공 ᐧ 정ᐧ 보ᐧ 도, 00 일보 폐간을 외치고 있었다.

그날이 어쩌면 내 인생을 바꿔났는지 모른다.

 

그날을 기점으로 나는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엇이 진실인지를,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누구는 청춘의 피의 뜨거움으로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낭만적으로 묘사하기도 했지만 단지 피가 뜨거워서 외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나 역시 무엇을 목적하고 나간 시위가 아니었다. 어느 조직에 가입된 활동가도 아니었다.

나 역시 도저히 넘어갈 수 없는 지점들이 공통분모로 이어져 터져 나온 외침에 각계각층 시민들의 목소리의 하나였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일들이 신문 지상을 떠돌았으며, 우리가 배운 사회 교과서와는 다른 현실을 그대로 수용할 수는 없었다.

국가의 주권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보편적 합의는 지켜져야 하기기에, 무고한 시민을 학살한 주범과 공범들이 처벌받지 않으며, ‘패스~’ 되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 시절 학생 운동은 전체 운동의 중심이었고, 이해관계가 없는 학생들은 부정의하고 부조리한 세상에 순응하며 살기를 거부하며, 강의실과 도서관이 아닌 거리로 나섰다.

그렇게 서로의 어깨를 걸었다. 적어도 무고한 학생을 시민을 노동자를 그리고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진보적 성향의 인사들을 잡아들이며 사상의 자유를 탄압하는 것에 대한 항의였다,

나는 아직 그날의 뜨거운 함성을 기억한다.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으로 함께 하며, 역사적 순간에 참여했던 가슴 벅참을 기억한다.

그날이 바로 오늘이다. 잊지 말기를 그리고 오래오래 기억하기를.

오신정란 청주여성의 전화 대표
오신정란 청주여성의 전화 대표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