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연맹 학살, 피해 유가족 제보 잇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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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연맹 학살, 피해 유가족 제보 잇따라
  • 충청리뷰
  • 승인 2002.08.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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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민간인학살대책위 7건 접수, 연내 백서 발간·특별법 제정 추진

한국전쟁 발발당시 퇴각하는 국군과 경찰에 의해 저질러진 민간인 학살사건에 대한 피해자 유가족들의 증언이 잇따르고 있다. 지난 6월말 발족된 충북지역민간인학살진상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준)가 피해 제보 및 신고센터를 운영한 결과 지금까지 7건의 제보가 접수됐다. 최근에는 청원군 남일면의 보도연맹원 학살현장에서 총상을 입고 기적적으로 살아난 생존자가 청주에 거주하고 있다는 제보가 접수돼 대책위가 증언채록을 준비하고 있다. 특히 괴산군 사리면 피해 유가족들은 지난 7월 모임을 갖고 위령비 건립등을 활발하게 논의, 미군양민학살사건이 벌어진 영동군 노근리에 이어 도내 두 번째로 민간인학살자에 대한 위령비 건립이 가능하게 됐다.
이번 제보내용 가운데는 지난 94년 5월 <월간 충청리뷰>와 99년 10월 <주간 충청리뷰>에서 집중보도한 보도연맹원 학살현장을 재확인하는 사례가 많았다. 우부원씨(67)의 경우 한국전쟁 직후 경찰에 끌려간 아버지의 시신을 청원군 북이면 내추리 옥녀봉 학살현장에서 가까스로 수습했다. 전쟁당시 괴산군 사리면 사담리에 거주했던 우씨는 “아버님은 보도연맹원으로 경찰에 끌려가 증평 양조장 건물에 갇히셨고 급한대로 미원으로 피난을 갔던 가족들은 증평을 오가며 옥수발을 했다. 그런데 며칠뒤 전부 다 옥녀봉에 끌고가서 총살시켰다는 얘길듣고 할머니가 그곳까지 찾아갔다. 학살현장에는 사체들이 셀 수도 없이 많았고 알아 보기도 힘들었다고 한다. 다행히 아버님은 할머니가 웃저고리의 바느질 표시를 보고 그나마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어렵사리 학살현장까지 찾아갔지만 부패된 시신들 속에서 가족을 찾지 못한 딱한 경우도 있었다. 전쟁당시 청주시 사주면 사천리1구(현 사천동) 질구지마을에 살았던 김모씨는 자신의 아버지를 포함, 12명의 주민이 보도연맹원으로 한날 한시에 끌려갔다고 증언했다. “친척들의 말씀에 의하면 음력 5월 21일(양력 7월 5일)에 우리 마을에서 12명, 인근 새터마을에서 5명이 끌려갔다고 한다. 청주에서 보은쪽으로 가다가 내북면 아곡리에서 청주사람들이 많이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현장까지 찾아갔는데, 시신들이 너무 부패해 알아볼 수도 없고해서 그냥 돌아왔다는 것이다. 가족들이 학살현장이라도 알 수만 있다면 위령비라도 세워드릴 텐데, 장소조차 모르니 답답하고 죄스런 심정”이라고 덧붙였다.
충청리뷰 취재결과 아곡리의 희생자 수는 100여명으로 추정됐다. 마을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군인들이 트럭 4∼5대를 길가에 세우고 주민들을 뒷산으로 올려보낸 뒤 보도연맹원들을 끌어내리고 총살시켰다는 것. 이때 몇몇 사람은 산으로 도망을 치다가 결국 뒤에서 총알을 맞고 쓰려졌다는 것이다. 아곡리 희생자 가운데 당시 청주상고 교사였던 강해규씨의 경우 가족들이 뒤늦게 시신을 수습하고 현장 산자락에 고인의 위령비를 세운 것이 확인됐었다. 고인의 미망인인 이숙용씨(94년 취재당시 72세)의 기억은 생생했다. “전쟁나고 얼마 안 지났을 땐데. 전날 밤에 학교에 숙직하러 간 애들 아빠가 다음날 낮이 됐는데도 안오길래 걱정이 됐어요. 근데 친구분이 부리나케 찾아와서 경찰에 붙잡혀갔다고 그러더라구요. 얼른 경찰서로 가보라고 하길래 음식 준비할 새도없이 빵을 사가지고 달려갔어요”
이씨가 청주경찰서 앞에 도착하자 이미 많은 사람들이 군용트럭 4∼5대를 둘러싸고 가족을 찾느라 아우성이었다.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는 가운데 트럭안에는 젊은 나이의 보도연맹원들이 힘없이 앉아있었다. 남쪽으로 먼저 피난시켜 준다는 헌병들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은 가족들은 이들에게 음식, 옷등이 담긴 보퉁이를 건네주며 안부를 빌었다. “가까스로 남편을 찾았는데 왜 이제서야 오느냐구 물었어요. 미안한 마음에 빵하고 쓰고있던 우산을 건네줬더니 ‘당신 비맞으면 안된다’면서 그냥 비를 맞구 떠났는데…” 이씨가 다시 남편을 만난 것은 그로부터 4∼5일 뒤. 학살 소문을 들은 보은 친정집에서 전갈을 해주는 바람에 용케 아곡리까지 찾아나선 것이다. 두 사람은 이승과 저승의 사람으로 재회했고 어수선한 난리통에 경황도 없이 끔찍한 그 자리에 묘를 쓰게 된 것이다.
한편 민간인 학살사건 피해 유가족들이 모임을 갖고 추모사업을 준비하는 곳이 있다. 보도연맹원 피해자가 많았던 괴산군 사리면의 유가족 18명은 지난 7월말 증평에서 준비모임을 갖고 유가족회 구성을 결의했다. 또한 사리면내 피해자 실태를 조사해 78명이 희생된 것으로 잠정집계했다. 모임을 주도했던 윤갑진씨(67·서울 거주)는 “부친의 고종사촌께서 젊은 나이에 억울한 희생을 당하셨는데,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는 것이 괴로웠다. 7월초에 서울에서 열린 한국전쟁 피학살자 유족증언대회에 참석했는데, 거기서 충북민간인학살대책위 관계자들을 만나게 됐다. 오는 15일 사리면 보광초교 총동문회 행사 때 유가족 모임을 다시 갖고 향후 위령비 건립등 추모사업에 대해 논의하기로 했다. 그때 가능한 많은 유가족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충북민간인학살대책위 피해신고센터(215∼0324) 이유신 팀장은 “당분간 피해실태 접수와 확인작업을 계속한 뒤 올해안에 백서를 발간할 예정이다. 괴산 사리면처럼 집단 피해지역에 대해서는 유가족회 결성을 적극 지원하고 유령비 건립등 최소한의 추모사업을 추진하겠다. 무엇보다 지난해 국회에 상정한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특별법의 제정을 위해 최선을 다 할 것이다. 대부분의 유가족들은 물질적인 보상을 바라지는 않는다. 지난 50년간 ‘빨갱이’이란 오명속에 억울한 죽음조차 발설하지 못했던 한을 풀어야한다는 생각이다. 진상규명, 명예회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국가가 당연히 해야할 최소한의 책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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