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협력은 ‘경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상생’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중략) 그렇다면 현대의 인류가 맞이해야 할 네 번째 혁명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람과 자연의 상생을 위한 ‘환경혁명’이어야 한다. 핵심내용은 녹색전환의 실현과 탄소중립 달성이다. 다가올 6월 5일은 세계 환경의 날이다. 이제는 성찰을 넘어 혁명적 행동에 돌입해야 할 때다.”(2021.5.26. (사)풀꿈환경재단 염우 정책이사 충북인뉴스 칼럼 “환경 혁명을 꿈꾼다”)  

 

염우 이사는 청주 지역을 중심으로 오랜 기간 환경 운동을 하셨다고 알고 있다. 지금은 풀꿈환경재단 정책이사로 계신다고 하는데, 작년 지자체에서 마련한 그린뉴딜 포럼에서도 마이크를 드셨던터라 그의 입장이 궁금했다. 마침 충북인뉴스에 실린 칼럼이 있어 읽어보았다. 어떤 내용일지 내심 기대를 했는데 아쉬운 점들이 많았다. 혹시나 이 글이 염우님에게 읽혀질 수 있다는 점을 염두해 두고 비판점을 정리해본다. 지역 내 기후위기 담론을 형성하는 과정이라고 여기고 널리 이해하시리라 생각한다.

글 제목은 환경 혁명을 꿈꾼다고 하는데 전반적인 내용은 "협력"과 "상생"에 관한 이야기였다. 기후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협력해야 한다는 건 단순히 보아 옳은 말 같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 누구와 어떻게 협력해야하는지, 상생을 이루기 위한 구체적인 경로와 방법을 제시하지 않고 덮어둔 채 협력과 상생을 말한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그리고 지역에 영향력 있는 환경단체 출신의 인사의 말이라면 문제는 더욱 크다.

 

첫째 ‘협력’이란 말은 문제의 주범에게 면죄부를 줄 뿐만 아니라 주된 조력자의 지위를 부여한다.

‘협력’은 오늘날 당면하고 있는 기후위기가 우리 사회 바깥에 존재하는 ‘악당’이고 정부와 기업은 ‘우리 편’, ‘파트너’라는 왜곡을 가져온다. 기후위기를 초래한 대부분의 몫은 각 나라 정부가 화석연료에 기대어 천문학적인 세금을 쏟아 부으며 발전시켜온 중화학공업과 광역물류체계, 그리고 국가계획에 힘입어 독점적으로 이윤을 획득한 대기업 생산활동에 있다. 온실가스 배출에 가장 많은 몫을 차지하는 부문인 에너지 부문과 산업 부문의 상당 부분은 기업의 생산활동과 결부되어 있다. 그런데 작년 코로나19 국면에서부터 정부가 한국형 뉴딜 속에 그린뉴딜을 포함시키면서 기업을 기후위기 대응의 주된 주인공으로 호명하고 있다. 위기를 일으켜온 주범들이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은근슬쩍 해결사로, 협력의 주체로 초대 받았다. 수조 원의 정부보조금 지원과 함께.

국내 가장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하고, 현재 대규모 화력발전소를 건설하고 있는 포스코, 삼성, 한화, SK 같은 기업들이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연대의 주된 파트너로 초대되었다. 지난 5월 30~31일 진행된 P4G(Partnering for Green Growth and the Global Goals 2030의 약자, 녹색성장 및 글로벌 목표 2030을 위한 연대) 서울 정상회의는 이들 기업이 재생에너지 활용률을 높이고 정부, 민간과 함께 온실가스 감축에 기여하겠다는 내용의 광고를 지속적으로 노출시켰다. 그 중에는 다국적 기업이자 정크푸드 독점 기업인 ‘코카콜라’도 있었다. 다이어트 코크, 스프라이트, 환타 등 35개의 브랜드를 가진 코카콜라는 ‘콜라’만 2010년 기준 연간 16억 병/캔을 팔아치운 독점 기업이다. 코카콜라가 온실가스 최다 배출 기업 중 하나임은 불 보듯 뻔하다. 이들 기업은 협력의 대상이 아닌 규제의 대상이어야 한다.

 

둘째, ‘협력’과 ‘상생’이라는 구호는 우리 사회 불평등을 강화시킨다.

목숨을 걸고 일하는 노동자와, 마땅한 주거 공간조차 갖지 못하는 청년들, 매일 집 문 앞에서 자신을 배제하는 도시 공간을 만나는 장애인들, 일상적인 젠더 폭력과 차별 속에서 생존하고 있는 여성의 자리에서 협력과 상생이란 구호는 불평등한 구조를 부수지 못할망정 강화시킨다. 예를 들어 가부장제 사회 내에서 여성에게 협력은 ‘입 다물고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고 상생은 ‘입 다물고 가만히 있는 것’을 의미한다. 장애인을 차별하는 사회에서 협력은 ‘비장애인의 도움을 열심히 받는 것’이고 상생은 ‘조용히 시설에 갇혀 있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신자유주의의 팽창정책이 초래한 기후위기 국면에서 협력은 ‘시위 같은 거 하지 말고 지금처럼 쓰레기 분리수거나 열심히 하는 것’이고 상생은 ‘죽거나 멸종하고 있는 소수자와 다른 생물 종을 제외한 강자들만의 생존’을 의미한다. P4G 서울 정상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대한민국 경찰은 행사장 바깥에서 정부와 기업의 그린워싱(Green Washing, 녹색분칠)을 규탄하는 시민 활동가들의 사지를 들어 구석에 고착시켰다. 기후위기 대응의 파트너 되기란 이렇게 모질고 힘이 든다.

불평등한 체제를 유지한 채 이루어지는 협력과 상생 모델이란 위와 같다. 신자유주의 경제정책 속에서 기후위기 대응은 ‘기후위기라는 시대적 과제에 대하여 어떻게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가?’로 귀결된다. 모든 사람의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한 공공부문은 날로 약화되고 부패하고 있는 반면, 재생에너지 시장의 크기를 확장시키는 데에는 정부와 기업이 온 힘을 합하고 있다.(그야말로 협력하고 있다) 산업 지형은 태양광 발전, 풍력 발전, 전기자동차, 수소자동차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지만 기존 산업에 종사하고 있는 노동자의 고용 위기에 대해서는 아직도 본격적인 논의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마지막으로 ‘협력’과 ‘상생’은 무책임한 낙관을 퍼뜨린다.

염우 이사는 상생을 지향하는 협력을 통해서 환경 혁명을 꿈꾼다고 한다. 이 문장은 혁명의 주체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는다. 환경은 혁명의 주체도 아니고 대상도 아니기에 오독을 막기 위해 ‘환경 보존을 위한 혁명’이라고 풀이하더라도 누가 어떤 협력을 통해 혁명을 이룰 것인지 밝히지 않는다. 아마 밝힐 수 없을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탄소배출 주범들과의 협력을 통해서는 이제까지의 사회 체제를 폐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같이 살기 위해 힘을 합하면 기후위기를 막을 수 있다’는 두루뭉술하고 듣기 좋은 구호는 기후위기라는 거대한 문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든 현대인에게는 달콤한 소리로 들릴 수 있다. ‘정부 관료들과 기업들이 재생에너지로 전환한다는데 잘 해결되겠지, 세상이 그렇게 쉽게 망하겠어?’라는 낙관에 힘을 실어주는 말들이다. 그리고 저 말들은 그 어떤 정치적 행동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죄책감에서 비롯된 재활용품 적게 쓰기, 에너지 절약, 쓰레기 분리배출과 같은 개인적 실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지 못하게 만든다.

 

상생을 위해서는 협력이 아닌 정치가 필요하다

서로 더불어 살기 위해서는 먼저 각자 어떻게 살고 있는지 혹은 어떻게 죽어가고 있는지 알리고, 그 현실이 서로에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소외된 사람 또는 계층이 처한 현실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하고, 그 현실이 있는 그대로 들려져야 한다. 누군가의 삶이 계속해서 배제된 테이블 위에서 그린뉴딜을 한들, 녹색기금을 조성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사회적 소수자들이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조건을 두텁게 마련하지 않고서 진행되는 협약 따위는 또 다른 차별을 유지시킬 뿐이다.

P4G 서울 정상회의 행사장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연설을 실시간으로 보면서 ‘증강현실’로서 불러들인 자연물들에 혀를 찰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그런 이유이다. 행사장에 불러들여야할 것은 디지털로 환생한 멸종위기 동물이 아니라, 기후위기와 불평등을 감내하고 있는 사회적 소수자의 목소리다. 그러나 행사장에 초대된 청소년은 정작 정부의 서포터즈였고 청소년기후행동 활동가들은 경찰로부터 제지당했다. 목소리 내는 자의 목소리는 고착시켰고, 목소리 없는 디지털 동물과 나무들과 정부의 목소리에 동조하는 이들만이 초대되었다. 이 간극을 드러내어 규탄하고 좁히는 일에 시민사회가 연대해야 한다. 염우 이사께서도 정부와 기업가 협력하고 있는 기후위기 대응의 기만을 드러내고, 모든 이들이 함께 살기 위한 싸움에 동참해주실 것을 요청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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