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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청산‧재산환수 마적단

충북인이 알아야 할 친일파11. 살인귀 이성근 1919년 3월2일 청주서 독립선언서 배포 인종익선생 체포 1920~1921 오동진부대원‧백운기 선생 체포, 10여명 사형 1945년 해방직전, 박춘금과 함게 ‘30만학살음모’ 대의당 참여

‘조선인 30만학살음모’ 주역, 청주 삼일만세운동을 짓밟다

2025. 10. 19 by 김남균 기자
친일반민족 행위자 이성근(李聖根. 1887.11~?)
친일반민족 행위자 이성근(李聖根. 1887.11~?)

 

국사편찬위원회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충북지역에서 삼일만세운동이 최초로 시작된 지역은 괴산군이다.

이에 따르면 3월 19일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괴산 시장에서 학생 등 1600명의 군중들이 선언서를 배포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고 괴산경찰서를 공격했다.

이날 만세운동은 벽초 홍명희(홍명희(洪命熹, 1888~?) 선생의 지휘 아래 전개됐다. 홍명희 선생은 3월 17일과 18일 “최후의 1인까지 조선의 독립운동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내용의 선언서를 제작‧인쇄했다.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한 날은 괴산 장날인 3월 19일이다. 만세운동은 당시 괴산공립보통학교(현 명덕초등학교) 학생들로부터 시작됐다.

학생 35명은 종이로 만든 무리를 지어 태극기를 들고 읍내 시장을 돌아다니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과정에서 곽용순, 이병석, 윤명구 등 초등학생 3명이 일제 경찰에 체포됐다.

괴산군 만세운동이 시작된 명덕초등학교(옛 괴산공립보통학교) 전경 (=사진 김남균 기자)
괴산군 만세운동이 시작된 명덕초등학교(옛 괴산공립보통학교) 전경 (=사진 김남균 기자)

 

이보다 앞선 1919년 3월 15일 충북 진천군 진천읍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진행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번에도 초등학생들이 나섰다. 주인공은 진천공립보통학교(현 진천 상산초등학교) 학생이다.

1919년 3월 28일 당시 조선총독부 충북도장관 장헌식(張憲植)이 조선총독부 내무부장관에게 보낸 ‘상황보고(狀況報告)’ 문서에는 “진천공립보통학교 생도는 그 후 경계 중인 바, 불온하므로 생도 22명을 검거 취조 한 결과 14명을 보안법 위반으로 소추(訴追)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일본 방위성 방위연구소가 소장하고 있는 문서 ‘소요사건(騷擾事件) 경과개람표(槪覽表)1919.3.1.-1919.4.30.)’에는 “3월 15일, 충북 진천, 미연방지(未然防止), 보통학교생도가 독립운동을 기도” 했다고 돼 있다.

종합하면 1919년 3월 15일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독립만세를 외치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일제 진천 헌병분대 헌병들이 사전에 탐지하고 제지함으로 독립만세를 외치지 못했다.

당시 헌병들에게 진천공립보통학교 학생 22명이 체포를 당해 심문 취조를 받았고 14명은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를 당했다.

‘미연에 방지’ 했다고 돼 있지만 또 다른 자료에선 “(만세)운동이 있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1919년 3월 16일 작성된 ‘전보 : 전국 각지 3월 15일과 16日0 시위운동 및 파병 상황’이란 문서에는 “3월 15일 경기 양주군 토리장(덕소리), 전남 영광, 경남 의령, 충북 진천, 충남 온양, 함북 수성, 16일 황해 연백, 달천, 평북 의주군 광평에 50명 내지 1,000명의 운동이 있었음”이라고 기록돼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진천공립보통학교(=상산초) 학생들의 만세운동이 실제로 시행됐다고 추정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진천 상산초등학교 학생들이 충북지역 삼일만세운동을 최초로 실행한 것이 된다.

청주에서 삼일만세운동이 늦어진 이유?

괴산군 괴산읍 보훈공원에 세워진 삼일만세운동기념비(사진=김남균 기자)
괴산군 괴산읍 보훈공원에 세워진 삼일만세운동기념비(사진=김남균 기자)

 

충북의 수부 도시 청주지역에서 삼일만세운동은 괴산과 진천보다 늦은 3월 23일 시작됐다.

1919년 3월 23일 충북 청주시 강내면과 강외면, 옥산면 등에서 주민들이 산 위에서 불을 피우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불을 피우고 한국독립만세를 외치는 ‘횃불독립만세운동’이였는데, 과거 봉화를 올려 변란을 알린 것을 본 받은 것이다.

이어 3월 30일 청주시 미원면 미원시장에서 1000여명 참석한 가운데 신경구 선생의 주도로 만세운동이 진행됐다.

청주에서 만세운동이 늦게 진행된 배경은 무얼까? 일제 경찰의 치밀한 사전탄압이 크게 작용했다.

1919년 3월 9일 청주공립농업학교(현 청주농업고등학교) 학생 오석영, 양재성, 이요습, 서상경 등은 다음날인 3월 10일 만세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동맹휴업을 하기로 하고 독립선언서를 인쇄했다.

하지만 일제경찰은 이를 알고 주도했던 학생들을 체포해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다.

청주농업고등학교(옛 청주공립농업학교) 교정에 세워진 독립운동기념비. 청주농고 재학생들은 1919년 3월 10일 만세운동을 진행하기 위해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3월 10일 동맹휴교를 계획했지만 일제 경찰에 사전 발가돼 실행하지 못했다. (사진=김남균 기자)
청주농업고등학교(옛 청주공립농업학교) 교정에 세워진 독립운동기념비. 청주농고 재학생들은 1919년 3월 10일 만세운동을 진행하기 위해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3월 10일 동맹휴교를 계획했지만 일제 경찰에 사전 발가돼 실행하지 못했다. (사진=김남균 기자)

 

청주지역의 삼일만세운동은 시작부터 일제경찰에 의해 난관에 봉착했다.

1919년 3월 2일 천도교도 인종익 선생은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려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됐다.

인종익 선생은 1919년 2월 28일 천도교 월보과장 이종일로부터 전주와 청주에 배포할 독립선언서 2000매를 수령했다.

인종익 선생은 먼저 3월 1일 남대문역에서 기차를 타고 전주에 도착해 독립선언서 1700매를 전달했다.

3월 2일 청주에 도착한 인종익 선생은 천도교청주교구장 오면수에게 독립선언서를 전달하려 청주교구를 방문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일제경찰 이성근과 일본인 경찰 3명이 들이닥쳐 인종익과 오면수를 체포했다.

독립운동가 체포한 이성근 “일제 경찰로서 본분을 다 한 것”

이성근(李聖根.1887.11~?)의 친일행적은 모두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로 방대하다. 이성근은 1919년 당시 조선총독부 충청북도 경부로 재직하며 오면수 선생과 인종익 선생을 체포해 직접 신문한 것 외에도 평안도 의주와 선천 지역에서 무장투쟁을 벌인 백운기(白雲基)선생을 체포했다.

또 오동진(吳東振, 1889~?)선생이 이끄는 부대원들을 체포해 10명이 넘는 독립운동가가 사형에 처해졌다.

1919년 3월 2일 이성근은 독립선언서를 휴대한 인종익 선생을 미행했다. 인종익 체포에 참여한 일제 경찰은 일본인 2명과 조선인 순사보 김기덕(金基德)이다. 이성근은 인종익 선생과 오면수를 체포한 데 그치지 않고, 직접 심문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그가 반민특위에 체포돼 조사를 받으면서 독립운동가와 관련돼 처리한 건수가 연간 1백건 내외라고 자백했다. 그는 독립운동가를 체포한 것에 대해 “일본 경찰로서 책임을 다했다고 본다”고도 말했다.

이성근은 1935년부터 2년간 조선총독부 함경북도 내무부장으로 재직하면서 일제 전쟁을 위한 동원소집과 징발업무를 수행했다.

일제 문서에 따르면 이성근은 18회에 걸쳐 조선인 2628명을 동원소집했다. 또 조선인 1205명을 강제징용했다.

일제가 청일전쟁을 일으키자 600회에 걸쳐 일본군을 접대하고 환송행사를 진행했다. 또 전승축하회를 19회에 걸쳐 열었다.

일제의 침략전쟁을 옹호하는 강연회도 713회나 열었다.

일제에 바친 군용물자는 돈피 3만737매, 생돈 9014두, 견모피 1만4958매, 양모피 945매에 달했다.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과 임전보국단 활동에 참여해 일제의 침략전쟁을 찬양하고, 조선인에 대한 징병을 옹호했다.

 

‘조선인 30만명 학살 음모’ 대의당과 이성근

악질친일반민족행위자 박춘금(朴春琴, 1891~1973)
악질친일반민족행위자 박춘금(朴春琴, 1891~1973)

 

일제가 패망하기 직전인 1945년 6월 254일 서울 부민관에서 ‘대의당’(大義黨) 결성식이 진행된다.

이성근은 이때 발기인으로 참여했는데, 한국인 대표는 악질친일반민족행위자 박춘금(朴春琴, 1891~?)이 맡았다.

박춘금은 조선인으로 유일하게 일본 중의원을 지낸 악질 친일파다. 일제강점기 오사카 지역에서 폭력배를 동원해 조선인노동자들의 파업을 파괴해 일제의 환심을 샀다.

간토대지진(=관동대지진) 당시 학살당안 조선인들의 사체를 치우는 등 수습에 나서, 일제로부터 공을 인정받았다.

박춘금과 이성근은 1945년 6월 연합국의 최후공세가 일본 본토까지 육박해 오자 육탄으로 일본황국을 지키자는 취지로 대의당을 만들었다.

대의당의 악랄함은 일본에 저항하는 조선인 30만명을 학살하려 했다는 데서 그 끝을 볼 수가 있다.

1949년 발간된 책  『민족 정기의 심판』
1949년 발간된 책  『민족 정기의 심판』

 

1942년 2월 출판된 『민족 정기의 심판』(혁신출판사)은 박춘금과 이성근이 참여한 대의당이 조선인 30만명을 학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고 전한다.

이 책은 반민특위 활동이 활발하던 시기에 출간되어 친일 세력에 대한 사회적 심판을 촉구하는 의도로, 친일파의 활동과 행적을 자세하게 기록했다.

편집진은 서문에서 출간 목적에 대해 “6천만의 눈동자가 주시하고 있는 반민특별조사위원회의 활약이 점차 활발화 하여 가고 있는 이때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의 과거 죄악사를 더듬어 보는 것도 결코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밝힌다.

박춘금이 수괴가 되어 결성한 ‘대의당’에 관한 기록은 이 책 제 5부 <한일동포 30만명 학살을 음모한 전율할 대의당 사건 전모> 편에서 언급된다.

이 책 5부는 “친일파 민족반역자 중에도 박춘금처럼 잔악무도한 놈은 없다. 또한 그가 영도하는 대의당(大義黨)처럼 직접 동포를 살해코자 덤벼들던 친일단체는 없었다”는 글로 시작한다.

박춘금에 대해선 “(일본) 중의원(衆議院) 의원인 박춘금은 1891년에 경상남도 밀양에서 탄생하였으나 천성이 잔인하기 그 비유가 없어 왜놈의 술집에 심부름꾼으로 있을 때 싸움 잘하기에 유명해다”며 “사람을 치기가 마치 짐승에 대하는 것 같고 어떻게 참혹하게 때려 치는 지 눈 뜨고서는 차마 보지를 못하였다 한다”고 전한다.

이어 “ 듣기만 해도 소름이 끼칠 잔인무도한 흉계를 꾸미기 시작하여 군관당국(軍官當局)과 비밀리에 회합을 거듭하고 마침내 조선 내외 항일 반전 조선민중 30만명을 학살할 것을 하청부(下請負) 맡아 관동 진재(震災=지진과 화재)때 재일동포를 죽창으로 학살시켰던 극악 무쌍한 잔인성을 충분히 발휘하려고 하였던 것”이라고 서술한다.

그러면서 “박춘금은 박흥식(朴興植), 이광수(李光洙), 이성근(李聖根), 김동환(金東煥), 신태악(辛泰嶽), 김민식(金敏植)... 등과 공모하여 가지고 대의당 조직에 착수했다”고 기록했다.

이에 따르면 이성근은 대의당이 만들어 졌을 때, 발기인으로 참여한다.

부민관 전경. 1945년 7월 24일 친일반민족행위자 박춘금과 이성근 등은 이곳에서 대의당 주관으로 '아세아민족 분격대회'를 진행했다.
부민관 전경. 1945년 7월 24일 친일반민족행위자 박춘금과 이성근 등은 이곳에서 대의당 주관으로 '아세아민족 분격대회'를 진행했다.

 

1945년 7월 24일 박춘금과 이성근은 서울 부민관 대강당에서 ‘아세아민족 분격대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이성근은 개회사를 맡았다. 참석자들은 “아세아민족분격대회를 개최함에 당하여 대일본 제국 육해군 장병 각위의 어분전에 대하여 심심한 사의를 표하고 아울러 아세아 민족해방이 하루 라도 속히 오기만 기원하는 바이다”라는 내용의 대일본 육해군 장병에 대한 감사 전문을 보낼 것을 결의한다.

이날 행사 분위기가 오를 즈음인 오후 9시 10분 안팎으로 사람이 꽉 찬 부민관에 돌연 폭탄 두 개가 연속 폭발된다.

부민관 대회장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고, 대의당 당원 한 명이 현장에서 즉사했다.

바로 조문기 선생과 강윤국, 유만수 선생이 일으킨 그 유명한 ‘부민관 폭탄 의거’ 사건이다.

책 『민족정기의 심판』에선 부민관 의거에 대해 “왜놈과 박춘금 일당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으며 불사신 조선민족의 의기를 만천하에 선양하였다”고 평가했다.

 

이성근(李聖根. 1887.11~?)

□ 1887.11. 황해도 금천군에서 출생

□ 1907. 황해도 순검. 해주수비대와 함께 의병토벌, 공로로 특별상여금

□ 1910. 조선총독부 경부

□ 1912. 일본정부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

□ 1913. 황해도 신계경찰서 경부

□ 1915. 조선총독부 충청북도 음성경찰서 경부. 일본정부로부터 다이쇼대례기념장

□ 1917. 조선총독부 충청북도 청주경찰서 경부.

□ 1919.3. 삼일운동 참여 오면수, 인종익 선생 체포 심문

□ 1920.3 조선총독부 평안북도 도경시(고등관 8등)

□ 1920. 무장투쟁 오동진 부대 관계자 12명 검거, 10여명이 사형에 처해짐

□ 1921. 독립군 백운기 체포

□ 1927. 조선총독부 전라남도 도이사관(고등관 5등). 일제로부터 훈6등 서부장

□ 1928. 일본정부로부터 쇼와대례기념장

□ 1930. 조선총독부 전라남도 산업과장

□ 1932. 조선총독부 함경북도 참여관 (고등관4등). 일본정부로부터 훈5등 서보장

□ 1933. 조선총독부 고등관 3등

□ 1934. 일본정부로부터 만주사변 공로로 은사금 수령

□ 1935. 조선총독부 함경북도 도사무관, 내무부장

□ 1938. 조선총독부 함경북도 방공위원회 위원. 일본정부로부터 훈4등 서보장

□ 1939.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활동

□ 1939. 조선총독부 충청남도 지사(고등관 2등)

□ 1939.12. 충청남도유도연합회 회장

□ 1940.4. 중일전쟁 공로 일본정부로부터 훈3등 서보장

□ 1941.3. 조선총독부 고등관 1등. 일본정부로부터 훈3등 서보장

□ 1941.6.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사 사장, 흥아보국단 준비위원, 임전대책협의회 준비위원

□ 1941.9. 임전대책협의회 채권가두유격대 광화문대로 활동

□ 1941.10.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상무이사.

□ 1942.5.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 1942.11. 육군특별지원병경성후원회 참가

□ 1943.8. 징병제실시기념사업실행위원회 실행위원

□ 1944. 국민동원총진회 고문. 조선전시종교보국회 활동

□ 1945. 대화동맹 상무이사

□ 1945.6. 대의당 발기인

□ 1949.3. 반민특위 체포

 

저서 『민족정기의 심판』주요 내용

서문

6천만의 눈동자가 주시하고 있는 반민특별조사위원회의 활약이 점차 활발화 하여 가고 있는 이때에 있어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의 과거 죄악사를 더듬어 보는 것도 결코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소책자를 발간하게 된 동기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 소책자가 민족정기를 앙양하는 데 있어 또한 매국의 무리들의 정체가 어느 정도 밝혀졌다면 이에 더한 기쁨이 없으며 앞으로 더욱 면밀한 조사를 진행시켜 2집 3집 계속하여 출간하려 한다.

단기 4282년 2월

편집자 일동

제5부 목차

한일동포 30만명 학살을 음모한 전율할 대의당 사건 전모

1. 박춘금 일파의 흉모

2. 그들의 양면작전

3. 대화동맹의 정체

4. 박춘금 일당의 최후발악

5. 조선민족혼은 불사신(不死身), 아세아민족분격대회장 폭파

 

세부내용

만귀(蠻鬼) 박춘금 일당의 죄상

친일파 민족반역자 중에도 박춘금처럼 잔악무도한 놈은 없다.

또한 그가 영도하는 대의당(大義黨)처럼 직접 동포를 살해코자 덤벼들던 친일단체는 없었다. 그 인물에 그 단체라 철두철미 일본제국주의의 충실한 주구(走狗)로서 조선 민족혼을 문자 그대로 말살하려 하였다.

그 뿐이랴. 백절불굴(百折不屈)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피비린내 나는 혈투를 계속하는 혁명투사급 항일인민대중을 몸서리치게도 대규모적으로 학살하려고 든 것이다.

실로 그들의 흉모(兇謀)는 천인이 공노할 바이며 그들 무리를 거족적 분노로 철저히 숙청하여야 할 것이다.

듣건데 대의당 당수 박춘금(朴春琴)이 방금 일본에 도피중이라 하는데 일본은 고사하고 미국에 있더라도 잡아와야 할 것이다.

여기에 본지는 땅에 떨어진 민족정기를 살리기 위하여 또한 민족적 분노를 억제하지 못해 박춘금 일파의 흉악무비한 음모사건 전모를 백일하에 공개하는 바이다. 응당 냉엄한 민족의 심판이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1. 박춘금 일파의 흉모

중의원(衆議院) 의원인 박춘금은 1891년(明治 24년)에 경상남도 밀양에서 탄생하였으나 천성이 잔인하기 그 比類가 없어 왜놈의 술집에 심부름꾼으로 있을 때 싸움 잘하기에 유명하였다.

사람을 치기가 마치 짐승에 대하는 것 같고 어떻게 참혹하게 때려 치는지 눈 뜨고서는 차마 보지를 못하였다 한다.

그러니만큼 언제나 불량배들의 두목이었으며 일본에 가서는 ‘노가다’로 그의 만용(蠻勇)은 사방에 떨치었다.

그러한 박춘금이라 1923년 9월 일본 관동 진재(震災=지진과 화재) 당시 자기의 야욕을 위하여서는 수천 수만의 가련한 동족을 눈 하나 꿈쩍이지 않고 학살시켰던 것이다.

결국 동족학살의 공로로 代義士가 되고 보니 기고만장(氣高萬丈)하여 조선에 와서는 각지로 돌아다니며 갖은 악행을 감행하였다.

그러다가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처음엔 일본이 세계를 집어 꺾을 듯하더니 달수를 거듭하고 해가 갈수록 일본의 전세가 불리하여졌다.

매일 들어오는 소식이 옥쇄(玉碎)뿐임에 박춘금은 점차 일본의 실력과 장래에 불안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원래 무식한 그는 터무니도 없는 왜신(倭神) 천조대신(天照大神)과 일본이 신국(神國)이라는 것을 굳게 믿고 있었음으로

“절대 일본은 승리하고야 말 것이다. 神國인 일본이 망할리가 있을라구....”

자기의 신념을 더욱 굳게 하여 일본을 위하여서는 자기 몸 하나는 그다지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이렇듯 박춘금의 일본에 대한 충성이 더욱 두터워짐에 따라 일본을 타도하려 하고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혈투를 계속하고 있는 혁명투사급 항일민중을 그냥 두었다가는 큰일날 상 싶었다.

그리하여 듣기만 해도 소름이 끼칠 잔인무도한 흉계를 꾸미기 시작하여 군관당국(軍官當局)과 비밀리에 회합을 거듭하고 마침내 조선 내외 항일 반전 조선민중 30만명을 학살할 것을 하청부(下請負) 맡아 관동 진재(震災)때 재일동포를 죽창으로 학살시켰던 극악 무쌍한 잔인성을 충분히 발휘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박춘금은 박흥식(朴興植), 이광수(李光洙), 이성근(李聖根), 김동환(金東煥), 신태악(辛泰嶽), 김민식(金敏植)... 등과 공모하여 가지고 대의당 조직에 착수하였다.

2. 그들의 양면작전

박춘금은 뜻대로 일이 진행됨에 극히 만족하였으나 그러나 발당시키기까지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첫째로 서로 의견이 맞지 않는 것과

둘째로 전세가 불리하여짐에 일본의 패망이 멀지 않음을 깨달음인지 피동적으로 움직이던 자들이 얼른 대의당 조직에 참가 않을 뿐더러 도리어 시골로 도피하는 자들이 속출하였다는 것과

셋째로 대의당 조직에 이면으로 영도하고 있는 군관 당국자들이 당수(黨首) 문제에 있어서 박춘금이의 수차에 긍한 자기 출마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수로는 이광수(李光洙)를 내세우고 고문 격으로 사실상의 실권은 박춘금이 쥐고 있으라고 박춘금에게 에게 내명(內命)하였다.

박춘금은 자기가 당수되지 못함을 불만히 여기면서도 그가 절대로 믿고 있는 군관 당국의 명령이라 할 수가 없어서 그때 사릉에 가 누워있는 이광수를 수차 찾았으나 이광수는 박춘금의 마음을 짐작하는지라

그 춤에 나서지 않고 자기는 자기 대로의 길을 밟으려 하였다. 그리하여 이광수와 박춘금와의 양파에 분열은 대의당 조직을 더디게 하였으며 8. 15직전 1945년 6월 하순에 발당식을 거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진영의 구성을 보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 하나 의아스러운 점은 대의당 외에 대화동맹(大和同盟)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 양 단체의 중심인물이 동일하다는 것이다.

사실은 이에 흉악한 조직적 계획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표면에서 활약하는 데는 대화동맹을 응용하고 이면에서 활약하는 데는 대의당을 앞세우자는 소위 양면작전인 것이다.

말하자면 대화동맹은 표면에서 비교적 평화적으로 사회정책 부면을 담당하고 대의당은 이면에서 항일 반전 조선민중 30만 명을 학살코자 직접적 행동을 취할 폭력 살인단체인 것이다. 실로 이 박춘금 일파의 잔인무도하고 대규모적인 흉모에는 새삼스래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만약 8. 15가 오지 않고 전쟁이 더 계속되었더라면 수만의 동포가 그들 박춘금 일파의 흉모의 희생으로서 쓰러졌을 것이다.

3. 대화동맹의 정체

대화동맹에 대해서는 이미 말한 바이지만 그 정체를 폭로하는 바이다.

대화동맹 역시 박춘금 일파에 의하여 조직된 것이며 대의당의 자매당(姉妹黨)이라 하겠다. 대의당과는 취지를 달리하여 표면에서 필승체제(必勝體制) 확립(確立), 내선일체(內鮮一體) 촉진(促進)을 목표로 하는 대화동맹은 1945년 일본의 전세가 바야흐로 불리하여 가는 2월 11일에 결성된 것이며 그 강령과 진영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강령

1. 황도공민 연성.

1. 결전체제의 강화(특히 학병 근노추에 치중).

1. 내선 동포의 정신적 단결을 촉진.

1. 증산 공출 책임의 완수.

역원

<이사장> 윤치호

<이사> 박춘금, 이성근, 이광수, 손영목, 주학문, 강병순

<심의원> 장직상, 박흥식, 이충영, 이원보, 김동진, 정연기, 최준집, 주○한, 고원훈, 이승우, 김사연, 김신석, 김성진, 조○식, 김동환, 노성석, 홍승균, 최정 등

4. 박춘금 일당의 최후발악

박춘금을 중심으로 한 흉악무비한 살인귀(殺人鬼)들의 날뛰는 양은 실로 말세기적 장관이었다.

일본의 전력이 점차 붕괴되어 최후의 운명이 닥쳐옴에 그들 무리는 일본의 패망시의 사태에 불안과 공포를 느꼈으나 그래도 日本의 실력을 믿는 모양이어서 기울어지는 전세를 소위 신기(神機)로 돌리려고 미친 광이처럼 각지에 쏘다니며 대의당 기부금을 강요하고 준 계엄적 폭력정 치하에 신음하는 우리 청장년을 강제 동원시켜 학병, 징병, 징용, 보국대 등으로 몰아 넣고 이에 응하지 않으면 곤봉 등으로 무수 구타하고 혹은 경찰에 인도하여 잔인한 고문을 감행하고 혹은 나이 찬 자식 사랑하는 남편 오빠의 장차 오고야 말 운명에 눈물의 세월을 보내고 있는 가련한 부녀의 정조를 권세를 방패로 징용, 징병가기를 면해 준다는 대가로서 강요하고 이에 응하지 않으면 징용, 징병 등으로 위협하며 강간하고 혹은 강연 등으로 일본을 위하여 피를 흘리라고 절규하며 조선 인민 대중을 죽음터로 몰아넣기에 눈코 뜰 사이가 없으니 실로 이 악귀들에 희생이 된 동포는 부지기수였다.

이러한 천인공노할 죄악을 감행한 박춘금 일당은 이광수와의 불화에도 불구하고 드디어 1945년 6월 25일 부민관(府民館)에서 대의당 결성식을 거행하였던 것이다.

이 흉악무비한 대규모 학살 계획기관인 대의당의 결성은 일제의 야만적 폭압 하에서 죽지 못해 사는 조선 인민대중을 더욱 한층 공포에 전전긍긍케 하였으며 실로 이 대의당의 최후 발악은 일제 말기의 특징적인 것이었다.

여기에 대의당의 정체를 폭로하는 데 있어 그 취지서와 강령 及 진용을 공개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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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의당 취지서 요지

전국(戰局=전쟁 양상)은 바야흐로 황국(皇國=일본)이 흥폐(興廢)를 결정할 위기에 직면하였으니 이 위기를 신기(神機)로 돌리는 데는 국민의 결사적인 결의와 분투가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들 반도 2천 6백만 동포는 황국을 지키는 한 사람으로 몸과 가정에 사로잡힘이 없이 소의를 던지고 오직 충군애국(忠君愛國)이라는 대의에 살아야 할 것이다.(이하생략))

대의당 강령

1. 오등(吾等=우리)은 먼저 공구수성(恐懼修省) 자기로 하여금 대의의 덕기(德器)가 될 것을 기(期) 함.

1. 오등(吾等)은 널리 동지를 구하여 대의에 순할 굳은 단결을 지을 것을 기함.

11. 오등(吾等)은 황도의 본의에 기하여 국민사상을 통일하여 전력증강과 국토방위의 임무에 취할 것을 기함.

1. 오등(吾等)은 지도자가 아니다. 국가에 대하여는 병졸이며 동포에 대하여는 일개 충복(忠僕)이 될 것을 기함.

1. 오등(吾等)은 모든 비결전적 사상에 대하여는 단연 이를 분쇄하여 필승태세의 완벽을 기함.

대의당 진용

<당수> 박춘금

<위위원> 李聖根, 李光洙, 金東煥, 孫永穆, 朴興植, 李在甲, 朱○成, 朱○翰, 高元勳, 李源甫, 金信錫, 金東進, 金敏植, 鄭然基, 李升雨, 金思演, 辛泰嶽, 曺秉相, 等(以下 未調査)

5. 조선민족혼은 불사신, 아세아민족분격대회장 폭파

1945년(소화 20년) 7월 24일 오후 6시부터 서울 부민관 대강당에서 대의당 주최인 아세아민족 분격대회가 개최되었다.

7월 24일이라면 날씨로 보아 한참 무더워 가만히 앉았어도 진땀이 줄줄 흐르고 홋 것을 입고도 더워서 괴로운 때이지만 서울 부민관에는 남녀노소 할것 없이 수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문이 메일 만치 초만원이었다.

이 군중들은 오늘도 점심을 굶고 저녁에 죽 한 그릇 먹었을 뿐이다. 또 그만한 고통이라면 참아볼 여지나 있겠지마는 거의 다 소집영장, 징용의 통지를 받은 자나 모두 닥쳐올 운명에 가슴을 조리고 있는 사람들 뿐이다.

일제의 무자비한 억압 하에서 살래야 살 수 없고 견딜래야 견디기 어렵고 아이들은 배고파 울며 밥달라 조르고 소집영장은 내리고 노인만 제외하고는 성한 사람이나 병신이나 할 것 없이 징용으로 다 끌려가니 마음을 놓고 살지 못하던 때라 항상 원수 일본이 망하기만 갈망하던 조선 인민대중은 일본이 어느 정도로 싸우고 있으며 언제쯤 일본이 망할 것인가를 일제의 충실한 주구배들이 연설을 통하여 점쳐 보려고 물밀 듯이 모여든 것이다.

이를 박춘금 일당은 어디까지나 대의당의 취지에 찬성하며 일본을 위하여 결사봉공함에 더위를 무릅쓰고 몰려든 것으로 인정하고 지극히 만족감을 느꼈으리라.

대회는 먼저 소위 국민의례에 이어 이성근(李聖根)의 개회사가 있었고 다음에 왜인 渡邊豊日子를 의장으로 추천한 후 대일본 육해군 장병에 대한 감사 전문을 일선에 전송할 것을 결의하였는데 그 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세아민족분격대회를 개최함에 당하여 대일본 제국 육해군 장병 각위의 어분전에 대하여 심심한 사의를 표하고 아울러 아세아 민족해방이 하루 라도 속히 오기만 기원하는 바이다.”

다음에 各 연사의 연설이 있었는데 즉 아세아 민족 대동단결의 필요성 정원간(丁元幹)(中), 왕도문화의 위대성과 국부의 예언 정유분(鄭維芬)(中), 신흥 만주제국과 왕도정치 동춘전董春田)(滿洲), 아세아 민족의 자유와 책임 高山虎雄(日本), 아세아 민족의 해방 박춘금(朴春琴)(日本) 등이다.

그리하여 各 연사들이 대기염을 올리며 강연회가 최고조에 달할 즈음 오후 9시 10분 안팎으로 사람이 꽉 찬 부민관에 돌연 회장을 진동하는 폭음이 들리며 폭탄 두 개가 연속 폭발되어 회장은 별안간에 일대 수라장으로 변하고 대의당 당원 한 명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왜놈과 박춘금 일당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으며 불사신 조선민족의 의기를 만천하에 선양하였다.

이에 당황한 일제는 헌병 경찰관을 총 동원시켜 범인 체포에 전력을 기울였으며 대의당 당수 박춘금은 사재로 5만원을 내놓아 범인 체포에 주야를 가리지 않고 비상한 노력을 하였으나 사건은 오리무중으로 들어간 채 죄없는 청장년 4백여 명이 피의자로 검거되어 잔인한 고문을 당하였으나 진범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얼마 없어 곧 역사의 날 8. 15를 맞이하게 되어 조선은 해방되었던 것이며 박춘금 일당의 흉악무비한 대학살 계획은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고 조선 인민대중은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 부민관에 폭탄을 던진 투사들은 과연 누구인가? 문제의 투사들은 조문기(趙文紀), 강윤국(康潤國), 유만수(柳萬秀)의 세 청년으로 일찍이 동경으로 가 있는 동안 산업전사라는 미명하에 온갖 모욕과 갖은 학대를 받아 일제에 대한 원한이 골수에 사무쳐 동경에서 대한혁명청년단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파업과 태업 등으로 일제의 무자비한 폭압과 혈투하다가 조국에 돌아와서는 친일주구들의 날뛰는 양을 보다 못해 친일 주구배들의 암살계획을 세우고 우선 그들의 무리가 주최하는 강연회부터 때려부술 목적으로 경의선 수색에 있는 군수공장에서 ‘다이나마이트’를 구해다가 폭탄을 만들어 처음에는 무태에 장치하여 무태에 있는 친일 주구배들을 폭살하려 하였으나 그러면 전면에 앉아 있는 선량한 인민에게까지 불똥이 튀어 애매하게 죽을까 염려하여 생각 끝에 변소와 무태로 들어가는 입구에다 장치하여 이 회합을 두둘겨 부셨던 것이다.

이는 일제의 야만적 폭압에 대한 조선 인민대중의 영웅적 항쟁의 일 편모이며 이 사건을 통하여 조선 민족혼이 아직도 건전하다는 것이 전세계에 널리 알려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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