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5.10 : 청주신사(神社) 건립 부지 1만5000평 헌납
□ 1936.10 : 청주신사(神社) 건축기금 2500원 헌납
□ 1937.08 : 비행기 ‘충북호’ 헌납자금 1만원 헌납
□ 1937.08 : 조선총독부 충청북도청사 신축비 1만6000원 헌납
□ 1937.09 : 국방병기구입비 명목 일본 육군성에 1만원 헌납
□ 1937.09 : 조선군사령부 방문해 비행기 ‘충북호’ 제작 자금 8만200원 충북도민 대표로 헌납
□ 1937.11 : 일본 육군성에 국방헌금 1000원 헌납
□ 1939.01 : 경설일보와 매일신보에 중일전쟁 승리 축하광고 게재
□ 1940.01 : 경성일보에 일본군 무운장구를 기원하는 광고 게재
□ 1941.02 : 제국재향군인회 청주분회 회관건축비 3000원 헌납
민영은(閔泳殷. 1878~1944)은 충북 청주를 대표하는 친일반민족행위자중의 한 사람이다. 대한제국 당시 청주군수(1908)를 지냈지만, 조선이 일본에 강제병합되자 곧바로 일제에 부역해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까지 지냈다.
민영은 1936년 10월부터 이듬 해 11월까지 신사 건립비와 국방헌금 등으로 조선총독부에 3만9500원을 헌납했다.
특해 1937년 9월에는 조선군사령부를 방문해 자신이 낸 돈을 포함해 총 8만2000원을 비행기 ‘충북호’ 제작 자금을 충북도민 대표자격으로 갖다 바쳤다.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조선공로자명감’에선 민영은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다.
“관앵어연(觀櫻御宴=일 황제가 베푼 향연)에 초대되어 천은(=일 황제의 은혜)에 감읍하였으니, 이는 무상의 영광이며, 아울러 언제나 사회와 국가를 위해 공헌함. 드물게 보는 인격의 소유자임. 충청북도 청주의 거인(巨人)으로 충청북도 제일의 지자(智者=지혜로운 인물)요. 인자(仁者. 어진 사람)이며, 충청북도에서 최고의 부호로 이름난 인물임”
조선총독부는 민영은은 충북 최고의 지혜롭고 어진 사람으로 평가한다. 조선총독부는 민영은에 대해 최고로 극찬했다.
조선총독부가 극찬한 인물, 민영은
일제의 시각에선 최고 였을지 몰라도 민영은은 같은 민족을 배신한 행위로 일생이 점철됐다.
1919년 3월 전국 각지로 만세운동이 들불처럼 번졌다.
민영은 1937년 4월 일본인 3명 등 7명과 함게 ‘청주자제회’ 설립에 나서 회장을 맡는다.
민영인 만든 청주자제회 규칙 제1조는 “경거망동(=만세운동)에 인하여 국민(=황국신민)의 품위를 상함이 없기를 상호 자제함”이다.
제 3조는 “경거망을 하는 불령도배의 유혹이나 협박에 불응하고 만일 불온한 행동을 하고자 하는 자를 발견할 시 (일제의) 경문관헌에게 통지함”이다.
만세운동에 나서는 동포들을 일제 경찰에게 앞장서 고발한다는 것이다.
동포를 팔아먹는 일제의 앞잡이를 선언한 것이다.
자발적으로 애국비행기 충북호를 헌납하다
1937년 9월 6일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고사포와 탄약 등 외에 전투기 충북호 헌납’이란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매일신보>는 먼저 중일사변에 대해 충북도민 유지 67명이 자발적으로 애국비행기 충북호를 헌납하기로 했다고 전한다.
이어 헌납자 대표 민영은 등 4명이 조선군사령부를 방문해 8만200원을 헌납했다고 알렸다.
헌납자 대표는 총 4명인데 이중 2명은 일본인이다.
<매일신보>는 “타 도는 모두 기부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충북은 자발적으로 성금을 모은 헌납이고, 전 조선을 통해 제일 빠르다. 충북 도민의 성의에 감격했다”는 조선군사령부 사령관의 말을 전했다.
그러면서 헌금 8만200원 중 7만5000원으로 전투기 1대, 4080원으로 고사포 2대, 나머지 돈으로는 탄환을 사겠다고 전했다.
민영은은 이때 기금으로 1만원을 헌납했다.
이렇게 전투기를 헌납한 민영은 급기야 침략전쟁에 불과한 중일전쟁을 찬양하는 시(詩)까지 서서 바친다.
다음은 민영은이 직접 써서 바친 시다.
중국에서 무력 씀에 조정 계책 훌룡하여
동양 함께 구제하는 그 의로움 당당하네
응징한 건 단지 함께 잘 살자는 것이건만
항전하다 제 스스로 망한 것이 가련하네
폭격 받은 성안 적의 시신 탄 재 이미 싸느랗고
들판 적신 충성 피에 풀은 되레 향기롭네
천황 군대 오랜 노고 무슨 말로 위로하며
개선가를 부르면서 올 때 나라에 영광 있으라.
민영은은 일본군의 침략전쟁으로 희생당한 중국인민의 피가 묻은 풀까지 향기롭다고 소름 돋는 단어를 사용했다. 이런 인간을 조선 총독부는 “충북에서 최고로 어진 사람”이라고 촌평했다.
청주신사 건립위해 현금과 땅 1만5000평을 갖다 바쳐
일제 강점기 식민지 치하에서 조선 민중들에게 가장 치욕적인 대상 중 하나가 신사(神社)였다.
그들은 내선일체와 일본혼(大和魂) 고양한다는 명목으로 전국에 신사를 세우고 조선인에게 참배를 강요했다.
일제의 강압에 의해 조선 민중은 믿지도 따르지도 않는 일본 신(神)앞에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 참배해야 했다. 일제는 각 읍면마다 수천명의 조선민중을 강제로 동원해 일본군의 ‘무운장구’를 기원하는 기원제를 열었다.
조선 민중이 가지고 있던 신사(神社)에 대한 증오심이 얼마자 컸을까? 해방을 맞자마자 조선민중이 제일 먼저 한 일이 각 읍면마다 설치됐던 신사(神社)를 불지르고 파괴하는 일이었다.
이런 가운데 민영은은 1935년 일제가 청주신사(神社)를 신축 이전 할 때 현금과 땅을 앞장 서 갖다 바쳤다.
1935년 10월 26일 <경성일보>는 청주신사 경내가 협소해 오래전부터 신사를 옮기자는 논의가 있었는데, 민영은이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산림이 울창한 와우산(현 우암산) 부지 1만5000평을 무상제공하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엣 청주목 관아까지 옮겨 개인 집무실로 사용
1923년 조선총독부의 충북도청이 건립되면서 시내에 있던 청주목 관아와 동헌이 해체된다. 민영은은 청주관아가 해체되자 그 건축자재를 그대로 옮겨 청주시 율량동 300번지에 이전 건축했다. 이전 건축한 건물을 자신의 집무실로 사용했다.
민영은은 1935년 청주신사 부지로 1만5000평을 헌납했지만, 이듬해 비슷한 규모의 땅으로 돌려받는다.
1936년 충북 도청 뒤에 있는 당산이 국유지에서 민영은으로 주인이 바뀐다.
일제가 작성한 토지대장에 따르면 당산은 1920년 국유지였고, 1921년 소유권이 조선총독부 충북도로 넘어왔다. 그리고 다시 1936년 민영은에게 소유권이 이전됐다.
민영은의 후손들도 이런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민 씨의 후손 민병완씨는 과거 <충청리뷰>와의 인터뷰에서 “ 대성동 당산 땅과 (민영은이 가지고 있던) 우암동 땅을 일제의 강압에 의해 맞바꾸게 된 것”이라 고 말했다.
‘일제의 강압’ 이란 단서를 달았지만 토지와 토지를 교환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조선 청년을 전쟁터로 내몰다
“조선에 지원병 제도를 실시하는 법령이 공포되리라 하니 감격하기 비할 데 없다. 이로서 내선일체가 구현되는 것이라 생각해 황은(皇恩)에 감격하는 바이다. 최근 중일전쟁에 국가가 시상시에 처해 분투하고 있는데 조선인은 병역의 의무가 없어 방관하고 있어 송구했다. 금번 지원병제도가 실시되게 되리라 하니 조선인도 국민으로 책임을 할수있게 되어 감격한 마음을 무어라고 말 할수 없다” <매일신보. 1938년 1월 18일)
침략전쟁 광기에 빠진 일제는 1938년 급기야 조선 청년들을 전쟁터로 내모는 지원병제도를 실시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대해 민영은은 앞장서서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황은에 감사”한다고 지껄였다.
민족을 팔아 챙긴 대가로 청주 제일의 부자가 되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청주군수를 지냈던 민영은은 일제에 강제병합되자 마자 일제의 앞잡이로 나섰고, 죽을 때 까지 친일 반민족 행적을 이어갔다.
민족을 팔아 넘긴 대가는 달콤했다. 그가 죽었을 때 그와 후손들은 청주 제1의 부자가 됐다.
그들이 소유한 농지는 어느 정도 규모였을까?
해방후 농지개혁 과정에서 ‘충북도내 20정보이상 피분배 지주 명단’을 보면 민영은 일가는 322 정보의 농지를 가지고 있었다.
민영은의 장남 민주식이 129정보, 장손자 민병철씨가 105정보로 나타났다. 민영은이 설립한 은성장학회가 88정보를 소유했다.
1정보를 ㎡로 환산하면 9917㎡다. 총 319만3274㎡다. 손자 민병각, 민병혁씨 피분배 토지까지 합치면 민영은의 후손들이 분배받은 토지는 400정보에 달했다.
여기에 민영은 일가가 보유하고 있던 임야나 대지는 포함되지 않았다.
당시 민영은 일가와 비슷한 규모의 토지를소유한 이는 청주대학교를 설립한 김원근씨가 출연해 만든 대성학원(401정보) 뿐이었다.
민영은은 무슨 수단으로 이렇게 많은 재산을 모을수 있었을까? 이와 관련해 1913년 일제의 충청북도 토지조사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했던 그의 전력이 의심받는다.
역사학자들은 민영은이 토지조사위원으로 참여하면서 청주시 일원의 토지를 자신의 이름으로 등재하는 방식으로 토지를 축척했다고 의심한다.
“친일파 할아버지 땅 돌려달라” 민영은 후손들의 역습
2005년 12월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됐다.
친일재산 귀속업무를 맡은 친일재산조사위원회는 2007년 민영은씨의 후손에게 증여됐던 토지 중 청주시 상당구 대성동 109-4번지 등 토지 일부에 대해 국가 귀속결정을 내렸다.
다만 재산조사위원회는 민영은이 1914년부터 1920년 사이에 취득한 땅에 대해서는 환수대상에서 제외시켰다. 재산조사위원회는 “민영은이 일제가 준 직위를 갖기 이전에 취득한 것은 환수 대상이 되지 않는다”라고 본 것이다.
그러자 민영은의 후손들은 이를 근거로 청주시가 민영은 소유 토지를 무단으로 점용하고 있다며 이 땅을 돌려달라고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이 제기된 토지는 모두 12필지, 1천894.8㎡로 필지당 3.3㎡에서 많게는 709.8㎡ 규모였다. 청주 도심인 청주중학교와 중앙초등학교, 서문대교, 성안길, 상당공원 인근에 있는 이들 '알짜배기' 토지에는 현재 도로가 개설돼 있었다.
1심재판부에선 민영은의 후손들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2013년 11월 열린 항소심에선 친일파 후손이 낸 소송을 기각하고 청주시의 손을 들어줬다.
항소심 재판부는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 귀속에 관한 특별법’에 근거해 일본이 1904년 대한제국 정부와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맺고 조선에 대한 주도권을 행사하기 시작한 러일전쟁 이후 친일 행위로 취득한 재산은 국가에 귀속돼야 한다. 민씨 재산도 국가에 귀속돼야 한다”며 원고 패소 판결했다.
결국 민영은 후손들이 대법원상고를 포기하면서 소송은 일단락 됐지만 이를 저지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들어갔다. 학생들까지 나서서 길거리 서명운동을 벌이고 많은 시민들이 집회를 개최하는 번거로움을 겪어야 했다.
민영은의 친일반민족 행위 이력
1870 : 출생
1902 : 충북 괴산군수
1905~1908 : 청주군수
1911 : 조선총독부 청주군 지방위원. 청주금융조합장. 일본관광단원. 충청북도 도참사
1912 : 조선총독부로부터 목배 하사.
1913 : 조선총독부 충청북도지방토지조사위원회 위원. 조선총독부로부터 목배 하사
1914 : 조선총독부로부터 목배 하사
1915 : 소방조합비로 200원 기부해 조선총독부로부터 목배 하사. 일본정부로부터 다이쇼(大正)대례기념장. 충북대표로 일 황제 취임식에 참석
1916 : 명치신궁봉찬회 조선지부 충청북도 위원
1919 : 3‧1만세운동을 탄압하기 위한 ‘청주자제회’ 발기인 및 회장
1920 : 조선총독부 충청북도 도평의회원
1923 : 조선총독부 충청북도 고등보통학교 기성동맹회 회장. 청주명륜회 회장
1924 :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조선총독부 충청북도 도평의회원.
1925 : 조선총독부 충청북도청에 의해 조선신궁 참배자로 선정
1926 : 조선총독부 주최 전 조선지주간담회 참석
1927 : 친일조직 ‘국민협회’에서 일본내각에 제출한 중의원의원선법의 조선시행 건의서에 서명
1927 : 조선총독부 충청북도평의회원. 일본정부로부터 쇼와대례기념장을 받음.
1928 : 일본적십자사 기금 기부해 조선총독으로부터 표창.
1929 : 조선박람회 평의원(촉탁)
1930 : 충청북도농회 부회장. 조선신사회(朝鮮神社會) 표창.
1931 : 대충북건설 기성동맹회 실행위원.
1932 : 친일반민족행위자 박중양을 위한 조직에 참여
1933 : 조선총독부 충청북도 도회의원. 충청북도 도회 부의장. 조선신궁봉찬회 발기인.
1934~1939 : 조선총독부 명륜학원 평의원
1934 : 조선총독부 충청북도 회의에서 △ 일왕자 생일축하 △일본 관동군사령관에게 감사하는 축전을 발송한 것을 제의하여 통과.
1934 : 충청북도 국방의회연합회 부회장. 시중회 평의원
1935 : 조선총독부시정 25주년 기념 표창 및 은배 1조 하사.
1936 : 충청북도 청사이전 신축 후원회 부회장. 청주신사 건축자금으로 2500원 헌납.
1937 : 조선총독부 충청북도 도회의원. 충청북도군사후원연맹 부회장. 비행기 ‘전투기’ 헌납자금 1만원 기부. 조선총독부 충북도청사 기금 1만6000원 헌납. 조선총독부 주최 전선순회 시국강연대회 활동
1937 : 충북도민을 대표해 조선군 사령부를 방문해 전투기 ‘충북호’ 자금 8만200원 헌납. 국방병기 구입비로 일본 육군성에 1만1000원 헌납. 일제의 중국침략전을 찬양하는 시를 발표. 조선총독부부 조선군사령부 감사장 수여.
1938 :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감사. 청주군사원호 상담소 참사. 충북 유린회 고문.
1939 : <경성일보>와 매일신보에 충북도의회 부의장 명의로 ‘중일전쟁 승리와 무운장구를 기원’하는 내용으로 광고게재.
1939 :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충청북도회 부의장.
1940 : <경성일보>에 충청북도 도회의원 명의로 ‘일본기원2600년 축하 및 일본군 무운장구를 기원’하는 내용의 광고게재.
1941 : 청주번영회 고문. 조선총독부 충북도회 회의에서 ‘반도 장정에 대한 징병령 실시방안’을 건의.
1941 :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1942 : 일본제국 재향군인회 청주분회 회관건축비 3000원 헌납.
1944 :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