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국민 10명 중 1~2명’, ‘느린학습자’, ‘사각지대’, ‘장애·비장애의 중간’, ‘은둔형 외톨이’.
지능지수 71~84인 경계선지능인을 일컫는 또 다른 표현입니다. 늘 우리 곁에 있었지만 살펴보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유아시절부터 성인 이후까지 우리사회 곳곳에 있는 차별과 편견으로 힘겨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최근 들어 일부 지자체에서 경계선지능인을 지원하기 위한 조례와 지원센터가 생겨나고, 인식 또한 확산되고 있지만 한계는 여전합니다.
충북인뉴스는 8회에 걸쳐 경계선지능인들의 학교생활과 성인이후 삶을 조명해보고, 문제 개선 및 대안을 마련해보고자 합니다.(편집자 주)
경계선지능 아동을 둔 부모들의 가장 큰 바람은 뭘까? 자녀의 우수한 성적표?, 높은 IQ?
전혀 아니다. 부모들은 우선 자신의 자녀가 맘 터놓고 얘기하고, 함께 놀 수 있는 친구를 만나길 바란다. 여느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웃고, 떠들고, PC방에도 가고, 떡볶이도 같이 사먹을 수 있는 단 한명의 친구 말이다.
그런 마음으로 부모들은 이 학교를 찾는다. 교사들도 부모들의 이런 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예술을 표방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경계선지능 아동·청소년들의 가장 큰 취약점인 대인관계·사회성 향상을 교육의 목표로 삼고 있다.
경계선지능인을 위한 학교, 교육청으로부터 위탁받고, 구청에서 지원받는 학교, 예술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학교. 바로 국내 최초 경계선지능인을 위한 학교, 예룸예술학교다.
예룸예술학교에는 초등부터 고등까지 현재 60여명의 학생들이 생활하고 있다. 국어, 영어, 수학, 사회, 과학, 도덕 등을 필수교과목으로 정하고 무용, 음악, 미술, 연극 등 예술관련 교과를 운영한다.
예룸예술학교 현장 가보니…
5월 10일 오전 10시. 이 학교를 방문했을 때는 따사로운 햇살이 비추고 있었다. 학교 건물은 여느 학교와는 다른 모습이다. 서울시 노원구, 서울 한복판에 있지만 마치 한적한 수목원에 온 듯한 느낌마저 든다.
정문으로 들어서자 중학생들은 야외수업을 위해 이동하고 있었다. 투닥거리는 소리도 들리지만 재잘거리며 깔깔거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선생님~ ○○가 세게 때렸어요.”
“그랬어? 잠깐만, 선생님이 ○○와 이야기해 볼께.”
교사에게 한 학생이 다가와 억울한 감정을 토로한다. 중학생 나이지만 친구에게 맞았다며 눈물까지 보인다. 그러나 교사는 동요하지 않고, 아이를 가만히 토닥여 준다. 그리고 때렸다는 학생과 조용히 대화한다. 이후 두 학생은 다시 아무렇지 않다는 듯 장난치며 이야기를 나눈다.
2층 교실에선 고등학생들의 과학수업이 진행되고 있다. 필기하는 학생도 있고, 교사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는 학생도 있다.
옆 교실에선 초등학생들의 영어 수업이 한창이다. 아이들은 모니터를 보며 춤을 추고 영어를 따라한다. 개구진 표정이 영락없는 초등학생이다. 영상장비와 함께 기자가 들어가자, “우리 테레비에 나와요?”, “어디 텔레비전에요?” 천진한 질문에 절로 웃음이 난다.
무용수업이 한창인 교실도 있다. 사춘기 나이인 중·고등학생들은 교사의 말대로 자신의 감정을 온몸으로 표현한다.
2015년에 문을 연 예룸예술학교는 서울시교육청으로부터 위탁인가를 받아 운영되며 학력이 인정되는 학교다. 서울시 노원구에서 월세와 교사 인건비, 강사지원금 등을 지원받는다. 장애인 부모이기도 한 지우영 이사장은 개교 당시 절박한 심정으로 예룸예술학교 중학교 과정을 개설했고, 이듬해에는 고등학교 과정도 개설했다고 전했다.
“처음 2년은 너무 열악하니까 집도 내놓고 월세도 제가 개인적으로 부담했습니다. 어려웠었죠. 그만큼 절박했어요. 그런데 저처럼 맞춤형 교육에 목말라 하던 학부모들이 많았던 거예요. 교육과정을 확장하자는 요구가 많았습니다.”
이심전심이었을까. 경계선지능 아동을 둔 많은 부모들은 예룸예술학교의 문을 두드렸고 중학교에 이어 고등학교, 초등학교 과정도 만들게 되었다. 현재는 대기자도 있는 상태다. 지 이사장은 자신의 자녀를 예로 들며, 적절한 교육과 지원이 있으면 경계선지능 아이들도 얼마든지 좋아질 수 있다고 전했다. 그리고 적절한 교육을 위해 이제는 국가와 지자체가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계선 아이들을 위해 어릴 때부터 지원을 해줘야 합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많은 아이들이 일반학교에 숨겨져 있습니다. 중·고등학교에 올라가면 더 많이 힘들어 합니다. 청소년기를 잘 보내야 성인이 되어서도 긍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충북을 비롯해 많은 지자체에서 경계선 아이들이 잘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길 바랍니다.”
“여기서는 뭔가 다 자연스러워요”
이쯤에서 대안학교에 대한 의견이 분분할 수 있겠다. 그리고 혹자는 질문할 수도 있다. “우리나라 사회에서 대안학교가 대안이 될 수 있느냐”고. “학교 다닐 때는 좋겠지만 어차피 고등학교 졸업하면, 또 사회에 나가면 다시 ‘전쟁’을 해야 하는데 그 이후엔 어떻게 하느냐”고.
맞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경계선지능인들은 비장애인과 경쟁을 하며 자립이라는 큰 벽에서 또다시 외로움을 견뎌야 할지도 모른다. 그 과정에서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
다만, 인터뷰를 자청한 예룸예술학교 학생들의 말에서 이 학교의 의미와 필요성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볼 수 있다.
올해 고3인 김채헌 학생. 중학교 때부터 이곳을 다녔으니 벌써 6년째다. 채헌 학생은 예룸예술학교를 소개해달라는 질문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소통이 잘되는 학교’라고 답했다.
“친구들이 저를 많이 이해해주고, 좋아해주고, 뭔가를 표현하면 말을 잘 들어줘요. 애들하고 소통이 진짜 잘 돼요.”
채헌 학생은 초등 4~5학년 시절 친구들로부터 받은 상처로 힘들어했던 기억을 잠시 떠올리며, 예룸예술학교에 오길 잘했다고 말했다. 공부도 일반학교와는 달리 쉽게 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친구들과 관계 맺기에 이제는 자신이 생겼다고.
물론 이곳에서도 다툼과 갈등은 있었다. 하지만 화해하는 법, 어울리는 법을 알게 되었으니 걱정이 없단다. 졸업을 앞둔 채헌 학생은 자신의 마음이 단단해졌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졸업 후에는 서비스분야의 직업을 찾아 사람들에게 도움 되는 일을 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예전에)괴롭힘을 당하고 나서 거절을 못하게 됐어요. 거절을 하면 너무 무섭고…, 욕을 먹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나도 친구에게 잘 표현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마음이 단단해 진거 같아요.”
5년째 예룸예술학교를 다니고 있는 박병옥(고2) 학생. 그 또한 초등시절 어려워했던 친구들과의 소통 문제를 이곳에서 해결했다고 강조한다.
“(초등학생 때는)친구들과 대화가 안 되고, 같이 어울리지도 못하고, 소통하기가 어려웠어요. 친구들은 저하고 카톡도 같이 안하고, 얘기도 안하고…. 친구들이 얘기할 때 잘 끼지 못했어요. 그런데 여기에 오니까, 애들하고 소통도 잘하게 되고 대화도 잘 할 수 있게 됐어요. 그래서 기분이 참 좋아요.”
특별히 더 친한 친구 세 명과는 모든지 나누고 공유한다는 병옥 학생. 웹툰 작가를 꿈꾸는 그는 앞으로 글과 그림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작품을 만들 것이고, 그것을 팔아 돈을 벌면 친구들과 나누고 싶다고 전했다.
초등학생 때보다 마음이 굉장히 ‘활발해졌다’고 표현하는 조민환(중3) 학생. 그 또한 예룸예술학교에 오고 나서 친구가 많이 생겼다며 활짝 웃는다. 가끔 동생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이 재미없을 때도 있지만, 여러 가지 체험도 해보고 무엇보다 친구들과 놀이하는 방법과 소통하는 방법을 배운 것이 좋았다고 전했다.
“여기 애들은 6학년 때 애들하고는 뭔가 달라요. 그때는 애들하고 친하지도 않고, 외로웠고, 말도 안 걸어주니까 마음이 힘들었어요. 졸업사진 찍을 때 친구랑 찍은 사진이 딱 한 장밖에 없어요. 마음이 아팠어요. 그런데 여기 다니면서 활발해지고 친구와 어떻게 친해지는지를 알게 됐어요. 여기서는 뭔가 다 자연스러워요.”
예룸예술학교에서는 뭔가 다 자연스럽다는 민환 학생. 그는 이곳에서 배운 것을 발판삼아 자신만의 길을 찾아갈 것이라고 자신했다.
청소년 시기 친구의 의미와 관계는 설명할 필요도 없이, 매우 중요하다. 자기와 비슷한 또래로부터 얼마나 인정을 받고 친밀한가는 자신감 형성 뿐 아니라 성인 이후 대인관계, 유능감, 도덕성발달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예룸예술학교 존재의 중요성과 필요성은 바로 이점에서 부각된다. 지우영 이사장은 “예술교육을 표방하고 있지만 사실은 사회성 향상을 목표로 합니다. 예술을 통해 표현하고 협동하는 능력을 기르고 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아직도 예룸예술학교의 필요성과 의미, 나아가 대안학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독자가 있다면 조민환 학생의 마지막 말을 다시 한 번 전해주고 싶다.
“예전에 느꼈던 외로운 감정들… 뭐 그런 게 앞으로도 또 찾아오겠죠. 그래도 전 새로운 길을 만들어 갈 것입니다. 길도 오래되면 없어지는 것처럼, 새로운 길을 만들면 새로운 사람들이 찾아오겠죠. 어떤 친구와 사이가 안 좋으면 잠시 멈추고, 내가 새로운 길을 만들 것입니다. 자신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예룸에서 배웠습니다.”
(본 기획물은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정부광고 수수료를 지원 받아 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