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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이 가루가 될 때까지 잊지 말자. 그 이름 친일

‘앵마장’은 일본인들이 말을 타며 여흥을 즐기던 벚꽃공원일제시대 조성, 청주벚꽃 진해보다 유명…도청엔 벚꽃문양도

들어 보셨나요? 일제강점기의 청주 앵마장(櫻馬場)

2019. 04. 02 by 김남균 기자
매일신보가 1931년 4월 23일 <만개한 청주앵마장의 앵화> 제목으로 내보낸 청주앵마장 사진(자료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앵마장(櫻馬場)으로의 청주냐! 청주의 앵마장(櫻馬場)이냐? 청주를 알고 앵마장을 모를 자 없는 만큼 그 이름이 높은 청주! 앵마장의 앵화(櫻花)도 날로 시간으로 그 눈은 크고 봉오리는 붉어서 봄을 자랑한다.”(1932년 4월 16일 / 매일신보)

벚꽃이 흐드러지게 날리는 4월입니다. 무심천의 벚꽃도 며칠 있으면 활짝 핍니다. 봄을 맞은 청주시민들은 무심천과 우암산에 피어있는 벚꽃을 맞으러 나오겠지요.

일본인들은 벚꽃을 한자어로 앵화(櫻花)라고 표기합니다. 살구나무 ‘앵(櫻)’자인데 벚나무도 ‘앵’자로 같이 사용합니다. 벚꽃이 일본 국화(나라꽃)라고 알고 있을 수 있는데 이는 사실과 맞지 않습니다. 일본의 나라꽃은 따로 정해진 것은 없고 다만 일본 황실이 ‘국화’를 상징으로 사용할 뿐입니다.

일본의 국화는 아니지만 벚꽃은 일본인이 가장 사랑하는 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인지 일본인들은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에 들어와 전국 곳곳에 벚꽃을 식재합니다.

청주 앵마장의 유래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유난히 좋아하는 벚꽃이 피어있는 곳에 말을 타며 거닐수 있는 곳을 앵마장(櫻馬場)이라고 불렀습니다.

 

진해보다 더 유명하다고?

1927년 4월 22일 매일신보 기사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통합정보시스템에서 일제강점기 시절 발간된 신문 기사장 ‘앵마장’을 검색하면 8건의 기사가 검색됩니다.

8건중 7건이 청주앵마장과 관련된 것이고 나머지 한 건이 진해의 앵마장입니다. 기사 제일 첫 머리에 소개한 것처럼 청주의 앵마장은 그 당시 가장 유명했나 봅니다. 이 기사는 1932년 4월 기사지만 이것보다 7년 앞선 매일신보 1927년 4월 22일자 기사에도 청주의 앵마장이 언급됩니다. 매일신보는 <앵화의 청주, 청주의 앵화! 꽃틈에는 전등이 열려>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냅니다.

기사에서는 청주마장(馬場)의 앵화가 4월 22일나 23일에 피었다며 각 나무에 전등을 설치했다고 언급합니다.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역할을 했던 매일신보는 1921년경부터 서울의 봉산공원, 수원, 청주 등 전국 수십 곳에서 관앵대회(觀櫻大會)를 주최합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벚꽃축제’ 쯤 될 터인데 특별 열차를 편성하고 특별할인 행사까지 곁들여 가면서 행사를 대대적으로 준비했습니다.

매일신보는 1921년 4월 25일자 기사에서 이런 모습이 잘 드러납니다.

매일신보는 “본사 주최 수원 관행대회는 예정과 같이 (4월) 24일 거행됐다”며 “아침부터 일기는 청명하여 봄빛을 자랑했고 오전 일곱시 수원 유지대표 상원씨 등 기타 여러 대표가 상경했다”고 언급합니다.

이어 남대문역에 도착한 관행위원과 함께 500~600여명의 관행단원이 열차를 타고 9시 10분에 도착했다고 소개합니다.

청주의 관앵대회에 대한 기사도 있습니다. 1923년 4월 12일 발간된 매일신보 <청주군의 관앵대회 / 20일경에는 함박 웃을 사쿠라꽃>이란 제목의 기사입니다.

기사에서 청주의 벚꽃에 대해 남선유수의 명소로 철도 길을 따라 대전, 조치원, 공주, 천안에서 구경을 온다고 언급합니다. 대회에 참가하는 비용도 소개되는데 저 멀리 대구에서 오는 회원은 기차왕복비와 하루 숙박료, 점심값 등을 포함해 8원50전이라고 합니다.

조치원서 오는 회원은 1원500전, 대전 2원 50전, 공주 4원50전, 천안 2원50전입니다.

1933년 4월 21일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관행대회 기간에 충북선 철도에 대해 할인행사를 하는데 10인이상 30%, 20인 이상 40%, 50인 이상 50%를 깍아줍니다.

 

청주 앵마장은 어디 있었을까요?

 

매일신보는 1931년 4월 23일 <만개한 청주앵마장의 앵화>라는 제목의 사진기사를 내보냅니다. 사진 왼편에는 길을 따라 벚나무가 두 줄로 늘어서 있습니다. 나무에는 전등이 걸려있습니다.

그 옆으로 작은 도랑이 보입니다. 그리고 우측에는 건물이 보입니다. 무심천변이 아니라는 것은 한 눈에 알아 볼수 있습니다.

충북참여연대 강태재 전 대표는 청주앵마장에 대해 “사쿠라마치(벚꽃길)가 (청주)상공회의소 뒷길 교서천을 따라서 조성했었다는 말을 들었는데, 확인은 하지 못했다”고 밝혔습니다.

또 1936년 4월 26일 매일신보 기사에는 조선총독부의 충북도지사 김동훈이 2년 동안 벚나무 5만그루를 식재할 계획을 수립해다고 되어 있습니다.

벚나무를 심을 곳은 청주시내를 중심으로 부근의 산과 도로, 주택가에 심기로 했습니다.

일제강점기인 1937년에 지어진 충북도청사에도 벚꽃문양의 문양이 남아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충청북도는 도청 본관이 등록문화재로 지정되면서 2004년말부터 2005년 6월까지 보수공사를 진행하면서 수리보고서를 책자 형태로 만들어 문화재청에 제출했습니다.

이 보고서에 수록된 자료사진에는 국화 혹은 벚꽃으로 짐작할 수 있는 왜색문양이 확인됐습니다. 이 왜색문양은 2층 중앙 도지사실 외벽에 5개가 뚜렷하게 그려져 있는데, 1959년 증축과정에서 제거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도정반세기(1996·충청리뷰사 간행)의 저자인 이승우(전 충청북도 기획관리실장)씨는 “1950년 공직을 시작할 당시에도 분명히 그 문양이 있었지만 언제 사라졌는지는 뚜렷하지 않다”며 “증축 당시 창문틀 등의 구조가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문양이 제거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양이 무엇을 표현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다만 일제강점기부터 있었다는 점에서 일왕가(日王家)를 상징하는 국화나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벚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무심천의 벚꽃이 한창입니다. 무심천 벚꽃은 1971년 채동환 청주시장 시절 대대적으로 식재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벚꽃 자체가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취향을 위해 심어 만든 청주앵마장의 흔적은 사라지고 정확한 위치조차 파악이 되지 않습니다.

다만 일제강점기 시절 그들에 취향에 맞게 앵마장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기억해 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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