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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이 가루가 될 때까지 잊지 말자. 그 이름 친일

곳곳에 일재잔재, 친일에 대한 설명 없어…일제‧해방후 도지사 구분 안해황당 일본어 안내서 “(문화의집은) 일본의 도지사관사”…친일기록 남겨야

충북도지사 옛관사에 남은 친일잔재…명치(明治)연호에 다다미방까지

2019. 01. 20 by 김남균 기자
1939년 지어진 옛 충북도지사 관사 다다미방 내부
1939년 지어진 옛 충북도지사 관사 다다미방 복도 전경
충북문화관이 설치한 안내판

 

[충북인뉴스 김남균 기자]"일본 전통적 주거양식인 다다미방. 다다미는 유까라고 하는 나무로 된 바닥에 접을수 있는 깔개를 깔았던 것에 유래하여 접는다는 뜻에서 파생되었다. 일본 전통가옥의 마르에 까는 짚으로 된 메트리스라 할수 있는데, 보온과 방습의 효과를 높여준다"

"도코노마 : 객실에 다다미 한 개 너비를 확보하여 바닥을 한단 높인 곳 정면의 벽에는 족자를 걸도록 만든 장치로 일본 주택의 상징"

2010년 6월까지 역대 충북도지사가 관사로 사용했던 옛 충북도지사 관사의 내부 구조에 대한 설명이다. 충북도지사 옛 관사는 이시종 현 지사가 2010년 개방하기로 결정한 뒤 현재는 충북문화관으로 이름을 바꾸고 시민들이 문화 쉼터로 변신했다.

곳곳에 친일의 잔재가 남아있다. 이곳이 개방되기 전까지 대부분의 시민들은 도지사 관사가 일본식 다다미방으로 돼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여기서 드는 의문점. 한국인인 충북도지사가 사는 관사에 왜 굳이 일본식 주거양식인 다다미방을 만들었을까?

분명 이 관사를 지은 사람은 김동훈 충북도지사라고 하지 않았나?

 

일제강점기 조선총둑부 시절 충북도지사 명단. 대부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됐다.
2012년 이시종 충북도지사가 충북도지사 옛 관사를 충북문화관으로 시민에게 개관하면서 세운 비

 

충북도지사 이름이 히라마츠 소콘?

옛 충북도지사 관사를 개방하면서 이시종 지시 명의로 생긴 비문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여기는 일제 강점기인 1939년 김동훈(金東勳, 1986~?) 도지사 시절 충청북도지사 관사로 건립되어 伊藤泰彬, 平松昌根 도지사 등 6명의 도지사와 1945년 8월 15일, 미군정수립당시 황인식 도지사 등 2명의 도지사, 그리고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이후 2010년 6월까지 윤하영 도지사 등 28명의 도시사 중 71년간 36명의 역대 도지사들이 거주하던 공간이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충북도지사 관사가 세워진 사실을 비로소 알수 있다. 그런데 김동훈은 알겠는데 한자로 쓰여진 伊藤泰彬, 平松昌根은 누구일까?

네 글자로 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 일본사람으로 추정할수 있다.

伊藤泰彬(이토 야스야키타이빈 : 창씨 개명전 윤태빈), 平松昌根(히라마츠 소콘 : 창씨 개명전 이창근)은 조선사람 이다.

히라마츠 소콘, 이창근은 누굴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에 따르면 이창근은 조선인 최초로 1923년 일제 고등문관고시에 합격한 인물이다. 고등관은 주임문관 시험해 합격해 천황에 의해 직접 임명받는 관료를 지칭한다. 보고서에 따르면 합격자들은 견습기간을 거쳐 군수 혹은 도청의 과장급인 이사관으로 관료생활을 시작한다.

보고서는 1923년 이창근을 시작으로 1943년 고등문관시험이 폐지될때까지 조선인 합격자수는 140명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정우택 의원의 부친인 정운갑씨도 1943년 고등문관고시에 합격한바 있다.

충북도지사 관사를 지을 당시 도지사인 김동훈의 일본식 이름은 무엇일까?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에는 김동훈의 일본식 이름이 ‘金原邦光’ (카네하라 쿠니미쓰)라고 언급됐다.

어찌되었든 친일반민족진상위규명위원회는 일제강좀기 조선총독부가 임명한 김동훈 충북도지사에 대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하고 그의 친일 행위를 기록했다.

그는 일제강점기의 도지사로서 일제에 부역하는 것 이외에도 각종 언론에 글을 기고해 친일을 드러냈다.

김동훈은 “ 내선일체의 국민적 신념을 하나로 해서 자원의 개발과 산업의 발전 촉진에 전력을 기어하여 생업보국의 지성을 완성하지 않으면 안된다”(경성일보 1937년 9월 15일 5면)거나 “노력을 게을리하면 국민정신총동원을 준비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들을 비상시에 임하는 공복으로 중임을 새롭게 깊이 인식하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Ⅲ-2 67~68P) 등 적극적으로 친일에 가담했다.

출생만 조선인이고 마음은 일본인인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충북도지사. 이들이 지은 관사인 만큼 왜색을 띠는 것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충북문화관 내부에 설치된 충청북도지사관사 상량식 기록물 해설문
일제강점기 시절 옛충북도지사관사 상량식 기록물

 

‘조선총독부 충북도지사’와 현 충북도지사는 한뿌리?

 

2012년 9월 이시종 지사는 옛 충북도지사 관사를 현 충북문화관으로 개관하면서 “일제통치의 잔재인 도지사 관사를 청산하고 충북 문화‧예술의 혼이 서린 충북문화관으로 중수하여 도민이 주인인 열린 공간으로 2012년 9월 개관하였다”라고 명시했다.

일제 잔재를 청산한다고 했지만 여전히 혼란스럽다.

일제는 강제합병이후 관찰사로 불렸던 직제를 ‘도장관’으로 변경한다. 이후 일제는 1917년 이후 ‘도장관’을 도지사로 명칭을 개편한다.

문제는 일제강점기 충북도지사와 대한민국정부 수립이후의 충북도지사의 개념이 정확히 구분되지 않고 사용된다는 것.

오히려 일제강점기 충북도지사를 충북도지사의 역사로 포함시켰다. 비문에는 “1939년 김동훈도지사 시절부터(2010년까지) 71년간 36명의 역대 도지사들이 거주하던 공간이었다”고 적었다.

일제강점기 17년 사이 6명의 친일부역 도지사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후의 충북도지사와 구분 하지 않은 것이다.

부가적으로 일제강점기 충북도지사의 친일 행적이에 대한 설명도 없다.

오히려 건립당시 상량식 자료를 그대로 번역해놔 혼란을 가중시킨다.

충북문화관에는 현재 충청북도장관 관사 상량식과 이개축 상량식에 사용돼 보관된 2개의 기록문이 전시 소개되고 있다.

‘충청북도 장관 관사 상량식’에는 일제에 의해 임명된 충북도장관 스즈키 다카시 (鈴木隆)의 이름과 함께 ‘명치 45년 7월 12일’이라고 번역해 놨다. 스즈키다카시의 이름은 한문으로만 적어 있어 조선인인지 일본인지조차 쉽게 알수 없다. 제국주의 일본 연호인 명치(明治)에 대해서도 아무런 설명을 해 놓치 않았다.

마찬가지로 ‘충청북도지사관사 이개축 상량식’ 설명자료에도 충북도지사 김동훈 이란 이름과 함께 소화(昭和) 연호를 그대로 기재했다.

친일잔재를 청산한다고 하면서도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일본연호를 아무런 설명 없이 그대로 기재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친일잔재인 다다미방에 대해서도 왜 이 방이 생기기 되었는지에 대해선 아무런 설명이 없다.

충북문화관 일본어 안내 해설서

 

여기가 일본 도지사 관사라고? … 황당한 일본어 안내서

 

충북문화관내 비치된 충북문화관 일본어 안내서의 내용도 황당하다.

해설서는 A4용지보단 조금 큰 4단 접이식 해설서에 ‘지역대표 문화인 전시실’이라며 ‘문화의 집’을 소개한다. 그러면서 문화의집은 “日道知事官事”(일 도지사 관사)라고 표기했다.

일본에서 학위를 취득한 인사에게 해석을 의뢰해 보니 내용은 이렇다. “일본 도지사 관사인 문화의 집은 일본의 전통적인 다다미방으로 서양 건축양식이 융합된 독특한 건축양식으로 남겨져 있다”

충북문화관을 소개하면서는 “1939년에 설립되어 71년간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충북도지사관사가 민선 5기에 들어와 도민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창조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문화예술의 공간으로서 다시 태어났다”고 했다.

그러면서 “근대문화유산(등록 제353호)인 충북문화관은 역사와 건축적인 상징성을 가지고 있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공존하는 공간”이라고 설명했다.

이 인사는 “앞 뒤 표현을 보면 잘 맞지 않는 구석이 있다”며 “표현대로라면 일본 도지사 관사라고 해석되는데 (일본어로) 잘못 표기하거나 굳이 넣지 않아도 될 일본을 지칭하는 ‘日’자를 넣은 것 같다”고 말했다.

충북도 충북문화관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공존하는 공간”이라고 하지만 ‘청산했어야 했지만 청산되지 못한 과거가 오늘을 지나 미래로 향하는 공간’은 아닌지 돌이켜 볼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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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인 2019-02-03 11:26:40
건물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것임. 그건 세월의 변화를 나타내는 역사물임 서양교회는 이슬람시대는 이슬람교회가 되고 기독교시대는 기독교교회로 사용된다, 경복궁터위에 건립한 일제시대 중앙청건물을 일제의 잔재물이라 허문 맹탕0삼의 행위는 역사의 증거물 지운것이 된다.
문화재 2019-02-03 11:21:36
60년대 사직로 주변에 일본 다다미방이 널려 있었다. 그대로 보존 하였디면 손가년이 고가로 매수 폭등하였을것임.
청주인 2019-02-03 11:18:21
일제강점기란 말은 북괴가 만들어낸 용어다. 그건 한국말이 아니다. 우리가 쓰는말은 일제시대 또는 왜정시대다.
대한인 2019-01-24 03:15:19
무조건 없애는 것이 능사인가?
충청인 2019-01-21 11:50:01
청산하지 못한 역사가 아니라
청산할 생각없는 역사라고 해야 할까요?

청산은
단순한 의지만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철저한 반성과
정확하고도 단호한 역사관이
반드시 수반돼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