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원·도지사… 광복후 요직 장악

또 해넘기는 친일재산환수 면죄부 받은 친일파 ‘승승장구’

2013-12-26     충청타임즈

반민특위충북도조사부 압박… 무죄 증명·구명 노력도

광복이후 4년만에 출범한 반민특위 충북조사부는 1949년 3월 2일부터 활동하기 시작해 그해 8월까지 모두 19건의 체포, 송치 26건등을 취급했다. 이중 반민피의자는 12명이었으나, 대부분 제대로 처벌되지 않고 반민특위의 해산과 함께 사실상 ‘면죄부’를 받았다.

◇ 광복후 국회의원, 도지사까지 진출

친일파의 승승장구는 계속됐다. 음성출신 김용제(1909~1994)는 동양지광사 편집부장으로 활동하며 징병제 선전을 하는 등 활발하게 친일행각을 벌였다. 광복이후 흥사단 이사에 선임돼 1983년까지 재직했다.

김원태(1909~1997)는 괴산 출신으로 일본 강점기때 군수등을 지냈다. 광복이후 내부부 차관등을 역임하다가 1971년 괴산에서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제8대 국회의원에 당선됐으며, 1973년에는 진천·괴산·음성지구에서 제9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일제 군수출신 김태동(1918~1982)은 체신부장관(1968), 보건사회부장관(1969)등을 지낸 뒤 전경련이상, 코리아헤럴드 사장, 한국신문협회 이사등으로 활약했다.

군수출신 김학응(1899~)도 1955년 충북지사에 임명됐으며, 옥천출신으로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을 지낸 정구충(1895~1986)은 대한외과학회 회장, 대한의학협회 부회장, 서울의사회 회장, 대한결핵협회장, 대한의학협회 회장을 지냈다.

◇ ‘민족이 낳은 희대의 인물’로 둔갑

이강수 국가기록원 연구관이 지난 2005년 충북학연구에 실은 ‘충북지역의 친일파 청산의 역사와 우리의 과제’를 보면, 체포된 친일파를 구명하기 위한 노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잘 나타나 있다.

충북지역 친일파들은 여전히 지방사회를 장악한 상태에서 자신들의 무죄를 증명했고, 경우에 따라서는 반민특위충북도조사부를 직접 압박했다.

중추원참의 출신 이명구(1892~1975)는 광복 후 건국준비위원회 충북위원장을 지냈으며, 반민특위에서 기소유예로 풀려난 뒤 충청북도지사와 충북향교재단 이사장등을 지냈다.

또 영동중·영동농림학교.영동여중 창림자인 중추원 참의 출신 손재하(1888~1952)는 반민특위에서 불기소됐으며, 고등계 형사인 이민호(1900~)는 징역1년 집행유예 5년을 언도받았으나 이후 행적이 불분명하다.

◇ 친일문학인 기리는 상까지 제정

다수의 농민소설을 써 ‘농민작가’로 잘 알려진 음성출신 이무영(1908~1960)은 죽은 뒤에 매년 4월 그를 기리는 ‘무영제’가 열리고 있다. 이무영은 1943년 1월호 ‘국민문학’에 ‘국제문체회담’에서 조선인의 행복은 국어(일본어) 보급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등 수십건의 대표적인 문학작품을 냈다.

지난 1994년부터 무영제가 개최되고, 무영문학상이 매년 4월 열리는 무영제에서 시상되어 왔다. 지난 2011년부터 무영제의 폐지를 요구하는 시민단체의 요구가 빗발쳐 왔다.

조선언론보국회 상무이사를 지낸 김기진(1903~1985)은 해방후 한국전쟁때인 1952년 육군종군작가단 부단장으로 활약하면서 금성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이밖에 한국펜클럽과 한국문화협회 고문, 예술원 회원등을 지냈다. 지난 1990년부터는 팔봉비평문학상이 만들어져 비평문학 분야를 대상으로 시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