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5일 선택, 판단의 기준은 이렇다

감성 이미지 이벤트 넘어 정책투표 절실
후보자 자질과 도덕성 마지막까지 고려해야
변형된 지역감정에 유혹될 땐 17대 국회 파행 불가피

2004-04-13     한덕현 기자

이번 17대 총선을 한마디로 규정한다면 ‘신파극’이다. 요상하게 치장을 한 배우가 무대에 나와 때로는 과장된 몸짓으로, 때로는 눈물을 질질짜며 관객의 심금을 울리려는, 그러나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허접스런 통속 극에 불과하다. 17대 총선이 끝나면 많은 유권자들은 후보자들의 손가락과 손목 등에 둘둘 감긴 붕대와, 느닷없이 어느 당대표가 타고 나온 휠체어만을 기억할지도 모른다. 당대표들의 손목붕대와 휠체어, 그리고 계속되는 절과 눈물로 점철되던 신파극은 급기야 ‘단식’이라는 대단원을 벌여 놓고 관객들의 환호를 기다리고 있다.

우려됐던 감성정치, 이미지선거가 결국 17대 총선의 대미를 장식할 조짐이다. 정책은 실종되고 유권자들은 하루하루 전해지는 파노라마 뉴스에 정신이 혼미할 정도다. 그러나 이는 유권자에게 신선함을 던지기 보다는 되레 유권자의 맑았던 정신을 시나브로 마비시키는 ‘마약’으로 다가 오고 있다. 각 정당들이 쏟아내는 말과 이벤트가 선거막판에 이를수록 유권자의 판단능력을 흐리게 하는 것이다.

이번 17대 총선의 변함없는 화두는 정치 물갈이다. 지난 수십년간 지역감정에 찌들대로 찌든 부패정치의 청산과 새로운 정치의 창출이 17대 총선의 지상과제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어떤가. 오히려 변형된 지역주의가 막바지 선거판을 휘두르고 있다. 각 당 대표들이 정서적 연고지인 영남과 호남으로 달려가 표를 호소하는 것은 똑 떨어지는 지역감정 부추기다. 비록 “호남이여 궐기하라” “영남이여 뭉쳐라”를 외치지 않더라도 그 저변에 깔린 의도는 이번 총선에서만큼은 유권자들이 마지막까지 묶어두려 했던 ‘지역정서’를 일깨우기 위함이다. 안타깝게도 보수정당들의 이런 의도는 점차 먹혀들고 있다. 초유의 대통령탄핵에 맞서 맑은 시민의식으로 저항하던 그 많은 유권자들이 또 다시 패거리 정치꾼들의 농간에 말려들고 있는 것이다. 다수 의석에 기고만장해 마치 게임을 즐기듯 대통령 탄핵소추를 가결시킨 반민주, 반의회 세력을 심판하고 새로운 정치문화의 장을 열어야 할 17대 총선이 지금 각 당이 부추기는 감성 정치 때문에 최악의 위기를 맞고 있다. 이대로 가다간 17대 국회 역시 파행이 불가피하다. 국회의원 머릿수 게임이 계속될 것이고, 87년 6월 항쟁 이후 어렵게 이어오던 탈권위주의, 탈식민지화 정치시도는 또 된서리를 맞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기회는 아직도 남았다. 유권자가 다시 한번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이다. 감성정치 때문에 잠시 잊었던 역사적 소명의식을 다시 일깨우면 된다. 그리고 이 소명의식의 정점은 끊임없이 민족의 동질성을 훼손하며 정권을 유린해 온 ‘수구에 대한 심판’과 ‘새로운 민주 헌정질서의 회복’인 것이다. 숫자에 기고만장하고 숫자에 가위눌리는 근성의 대의정치가 아닌 휴매니즘과 민족애의 이성으로 접근되는 합목적의 대의정치를 정착시켜야 한다.

다행히 이번 총선에선 돈선거와 군중동원이 사라진 대신 각종 매체를 통한 후보자 정보공개는 어느 때보다도 활성화됐다. 관심만 있다면 지금 당장 컴퓨터 앞에 앉기만해도 후보자의 모든 정보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누가 자질있고, 누가 땅투기를 하고, 누가 사생활이 문란하고, 누가 세금을 안 내고,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 금방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최선은 아니더라도 차선의 인물선택이 가능하다. 적어도 특정 정국을 틈타 결코 능력도 없고 자질도 없는 후보가 마치 길을 가다가 엉겁결에 현금을 줍듯 국회의원이 된다거나, 선거 때마다 정당을 옮겨 다닌 철새가 여의도에 다시 둥지를 틀거나, 혹은 결코 개혁적이지 못한 수구적 인물이 어느날 개혁인사로 둔갑해 여의도로 가는 것만큼은 끝까지 막아야 할 것이다.

이번 선거에선 또 한가지 과제가 있다. 여야를 막론하고 어려운 시기에 당을 지켜 온 적자를 내몰고, 단순히 명망과 재산만으로 후보로 나선 ‘정치의 서자’를 반드시 심판해야 충북의 정체성이 비로소 바로 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