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년 화약원료 창고 폭발사고, 어떻게 해결됐나

2003-11-26     권혁상 기자

한화 보은공장 가동이후 사망 사고는 지난 18일 폭발사고가 처음이지만 주민들의 물적피해가 가장 컸던 때는 지난 97년 10월 8일 폭발사고였다. 밤 10시께 공장 화약저장 창고에 보관중이던 화약원료 12.8톤 가운데 8.9톤이 폭발했다. 당시 200여평의 창고가 전소됐고 폭발로 날아간 H빔 파편으로 조립식 건물 2개동이 전파 또는 반파될 만큼 파괴력이 엄청났다.

공장 인근 법주리에 살던 이상욱씨(47)는 취재 당시 “집에서 TV를 보고있는데 갑자기 ‘꽈꽝’하면서 벽이 흔들리는 거여, 아이쿠 지진인가 보다 싶어서 밖으로 뛰쳐나가보니 뒷산 꼭대기 위루다 뻘건 불기둥이 환하게 솟아 올랐더라구. 그때서야 아-화약공장에서 뭔 일이 터졌구나 싶었다”고 말했다. 이날 사고로 법주리를 비롯한 창리․화전리 20여 가구의 유리창이 깨지고 형광등과 거울이 떨어져 부서지는 소동을 빚었다.

심지어 20km이상 떨어진 보은읍을 비롯 내속리면․산외면 주민들도 한밤중에 폭발음과 불기둥에 놀란 경우가 적지 않았다. 폭발과 함께 불길이 인근 야산으로 번지는 바람에 청주지역 소방차와 공군 3579부대 화학차량까지 동원돼 다음날 새벽 3시가 지나서야 불길을 잡을 수 있었다.

피해가 컸던 화전리는 ‘마을회관 건립, 가구별 유선TV망 설비’를 조건으로 회사측과 합의했다. 하지만 전업 양축농가들과 피해보상 협상이 난항을 겪게 됐다. 폭발음에 놀란 가축들이 뛰쳐나간 경우도 있었고 후유증으로 유․사산하거나 발육부진 등의 피해가 잇따랐다. 결국 이상욱씨등 양축농가 3가구는 회사측과 서울대에 피해산출 용역의뢰를 맡켜 그 결과에 따르도록 합의했다. 하지만 사고 당시 소음치를 80-90db로 산정하는 바람에 피해농가에서는 당초 요구액의 20-25% 수준의 보상금을 받는데 그쳤다.

당시 피해산출 용역을 맡았던 서울대 황우석교수는 취재진에게 “조사과정에서 해당 농민들의 요구도 집요했고 회사에서는 보상예정가의 1/3 수준을 내세웠다. 나중에는 경찰, 정보기관에서도 전화가 걸려왔다. 입장이 곤란해서 이런 상황에서는 용역보고서를 제출하지 못하겠다고 보류하기도 했었다”고 말했다. 조사과정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입장을 하소연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