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적 아나키스트 류자명을 추억하다

남·북 모두로부터 훈장받은 유일한 독립운동가
김구·신채호와 교류 ‘조선혁명선언’ 저술에 도움

2010-02-24     오옥균 기자

류자명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조선혁명자연맹 대표·조선민족전선연맹 이사·조선의용대 지도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한, 중국관내지역 독립운동의 대표적인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김주영 박사는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임에도 불구하고 류자명 선생에 대한 연구와 관심은 우리나라보다도 중국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 안타깝다”고 전했다. 박걸순 충북대 교수는 선생에 대해 “한국독립운동사는 물론 한국현대사에서도 매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 충주 출신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류자명 선생은 만주에서 활동하면서 김구·신채호 등 독립운동계 거목들과 교유했다.
1894년 충주군 이안면 삼주리(현 이류면 영평리)에서 태어난 선생은 충주공립보통학교를 거쳐 수원농림을 졸업하고 고향에서 교편을 잡았다. 1919년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벌어지자 자신이 가르치고 있던 학생들을 주도하여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하지만 3·1운동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고, 보통학교 동창 황인성의 도움을 받아 서울로 피신했다.

이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한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임시의정원 의원에 피임되고, 신한청년당이라는 독립운동 단체에 참여하여 본격적인 항일투쟁의 길에 나섰다. 또한 시대적 전환기에 신사상을 수용하면서 의열단,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조선민족전선연맹 등 폭넓고 다양한 궤적을 남겼다.

선생은 중국 전역을 무대로 많은 활동을 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김구·신채호·이회영·조소앙·김원봉·나석주·김산 등 독립운동계의 거목들과 교유했다. 특히 그는 1923년 신채호와 함께 기숙하며 신채호가 '조선혁명선언'을 저술하는데 결정적 도움을 주었다.

1924년 1월 선생은 의열단의 의열투쟁을 주도했다. 1925년 3월 일제밀정 김달하 처단과 1926년 12월 나석주의거는 선생의 지도하에 결행됐다.

1927년에는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를 조직해 중국·인도 등 각국의 무정부주의자들과 국제연대 활동을 펴고, 조선혁명자연맹의 간부로 활약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해 갔다. 1930년에는 남화한인청년연맹을 결성한 뒤 1933년 육삼정 의거를 배후에서 지휘하기도 했다.

이후 1938년 조선의용대가 조직되자 지도위원으로 활동하며 항일무장투쟁에 앞장섰고, 1942년 임시정부가 중국 관내 좌우독립운동 세력을 통합해 통합 의회를 구성하자 다시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었다. 그 후 임시약헌개정 기초위원, 학무부 차장 등으로 활약했다.

선생은 아나키스트로서도 활동했지만 그에게는 계급과 이념보다 민족과 조국이 상위의 절대적 가치였다. 그래서 선생을 민족주의적 아나키스트라고 부르기도 한다.

박 교수는 “선생은 김원봉·김성숙과 함께 좌파 민족운동의 트로이카를 형성하기도 했지만 끝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여 민족 통일 전선을 이루어 간 것은 독립운동사에서 높이 평가되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선생은 중국의 곽말약·파금·나세미·노신·정성령 등 정치·문화계의 인물과 우의를 다지며 국제적 인물로 부각하였다. 박 교수는 “현재 중국에서는 선생을 독립운동을 전개한 애국주의자요, 양국을 연계하는 역할을 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국제주의자라고 평가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 말년의 류자명 선생.
광복이후 농학자로 살다
결국 선생은 조국 땅이 아닌 중국 복안현에서 조국의 광복을 맞이했다. 그가 저술한 수기인 ‘한 혁명자의 회억록’에는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밝혔다, “나는 비록 동포들과 한자리에서 해방의 기쁨을 나누지 못했지만 서울에서, 나의 고향에서 해방의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감격의 눈물을 흘릴 나의 동지들, 나의 동포 형제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뜨거웠다.”

선생은 해방 이후 두 차례 조국으로 돌아올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한번은 6.25의 발발로 귀향길이 막혔고, 또 한번은 북한의 요구로 북으로의 귀환이 거의 성사될 무렵 위대한 농학자를 보내줄 수 없다는 중국 호남성 인민들의 반발로 무산되고 말았다.

결국 선생은 조국과 고향을 가슴속에 묻고 호남농학원 교수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농학자로서 선생은 다방면으로 연구 성과를 거뒀다. ‘벼의 기원에 관한 연구’는 세계농학계의 인정을 받았다.

몸은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했지만 선생의 가슴속에는 언제나 조국과 고향이 있었다. 그는 1977년 10월 심극추에게 보낸 편지에서 “3·1운동 그 해에 나라를 떠나서 이젠 60년이 됩니다. 집이 남조선에 있기에 줄곧 고향에 편지를 못해 봅니다. 만일에 남북이 민족 대단결 회의를 열게 되면 나도 돌아가서 참가하고 싶습니다”라고 적었다.

박 교수는 “남과 북으로부터 공적을 인정받아 훈장을 받은 분은 선생이 유일하다. 그는 남한 정부로부터 항일 투쟁의 공적을 인정받아 1968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 받았고, 1978년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3급 국기훈장을 받았다”며 “우리가 민족통일을 전망하면서 선생을 추앙하고 조사·연구해야 하는 당위성이 여기에 있다”고 말했다.


“생가 복원,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고향 지키고 사는 손자 유인탁 씨
“몰살 안당하고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복 받은 것.” 류자명 선생의 손자 류인탁 씨(69)의 말이다.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삶은 그야말로 가시밭길이었다. 하지만 유가족들은 그들의 인생을 보상받길 원하지 않았다. 류 씨(69·충주시 이류면 영평리)는 “할아버지가 떠난 후에 이곳의 삶은 남은 가족들의 몫이었다. 할머니와 어머니, 5남매가 겨우 생계를 이어갔다. 시대가 그러하니 어쩔 수 없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유가족들은 다만 할아버지의 대한 평가는 제대로 이뤄지길 바랐다. 류 씨는 “수년전 할아버지에 대한 관심이 고조될 무렵 형제들과 시장님을 뵌 적이 있다. 바라는 점이 뭐냐고 묻길래 생가가 복원됐으면 한다는 뜻을 전했다”고 말했다.

선생의 생가는 화재로 인해 사라졌고, 현재는 논으로 변해있다. 충주시 관계자는 “건축물에 대한 근거가 남아 있지 않아 복원이 더 어렵다”고 말했다. 원주에 살고 있는 선생의 둘째 손자 인호 씨는 “아버님이 생전에 이후 생가복원을 염두해 옛 땅을 구입했고, 인근 터도 구입했다. 시장님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화재 전 생가를 기억하고 있는 분이 현재 살아계신다. 하지만 그분 나이가 올해로 100세다. 더 이상 미루면 생가 모습을 증언할 분도 계시지 않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유가족들은 기념관 설립을 위해 선생의 유품 250점도 기증을 원했던 독립기념관이 아닌 충주시에 기증했다. 류 씨는 “독립기념관에서 요청이 있었지만 독립기념관에 기증한 물품은 다시 돌려받을 수 없어 충주시에 기증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혹시나 모를 기념관 설립을 염두해 둔 것이다.

류 씨는 “할아버지는 돌아가시는 날까지 조국을 잊지 않으셨다. 일부에서는 할아버지가 중국인으로 귀화한 것으로 알고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