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세운동에 참여한 동포를 사살한 조선인 헌병보조원

충북인이 알아야할 친일파 9. 조선총독부 문광면장 송재욱 1919년 미원면 삼일만세 시위당시 발포 장일환(張一煥 , 1882~1919.3.30.)애국지사 순국 송재욱은 그 공로로 괴산군 문광면장 까지 지내

2025-10-08     김남균 기자
1919년 삼일만세운동 당시 장일환 애국지사는 헌병보조원 송재욱이 쏜 총에 맞아 순국했다. 장일환 선생 후손 장기영 전 광복회충북도지부장(오른쪽)이 충북 괴산군문광면 소재지에 보전된 송재욱의 공덕비를 살펴보고 있다. 

 

1948년 8월 31일 <조선중앙일보>는 ‘반민족행위처벌법 공소시효, 8월 31로 종료’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당시 진행되던 반민특위와 관련된 내용을 보도한다.

먼저 1949년 1월 8일 박흥식을 검거해 취조 하기 시작했지만 첫걸음부터 순조롭지 못했고 공소시효가 조기에 종료되면서 일반 국민들의 기대가 엄청나게 어그러졌다고 전한다.

그러면서 <조선중앙일보>는 반민족행위자들이 보석으로 석방되는 현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개탄한다.

“재판정에서 재판관 및 신성한 법정을 무시하고 빨갱이의 법정이니 무엇의 재판소니 하고 모독을 감행하던 이종형(李鍾滎)이 조차도 보석되었다는 것에 대하여는 아무리 생각하여도 머리를 끄덕일 수 없는 것이다. 죄를 미워하나 사람은 미워하지 않고 따라서 병이 있는 피고를 보석함이 잘못이 아닐지도 모르나 그러나 모든 일에는 정도가 있는 것이니 어찌 하필 반민자에 한하여 그다지 병자도 많이 생기며 시비도 많은가 말이다.”(조선중앙일보.1948.8.31. <반민족행위처벌법 공소시효, 8월 31로 종료> 기사 中)

<조선중앙일보>는 반민특별재판부 통계를 인용해 병보석등으로 석방된 통계를 공개합니다. 이에 따르면 1949년 1월 8일부터 그해 8월 29일 현재로 기소 총건수는 222건입니다. 이중 불구속기소 건수가 44건이며 보석 건수는 57건입니다.

<조선중앙일보>는 “불구속 건수와 보석 건수를 합치면 101건으로 이를 기소 총 건수에 비해보면 약 50%에 해당된다” 보석된 자의 이름을 공개한다.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일급살인범 송재욱

친일반민족행위진상조사위원회 보고서 일부

 

공개된 57명의 이름에는 송재욱(宋在旭)이라는 사람이 포함됐다.

송재욱은 누굴까?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조사위원회에서 발간한 보고서 ‘Ⅲ-1’편에 이렇게 송재욱은 다음과 같이 소개된다.

“송재욱(宋在旭) 헌병보조원으로 미원에서 3.1운동 당시 2명을 사살한 공로로 면장한 자, 괴산군 문광면장 9.29 현재 병보석”

같은 보고서 151쪽에 또다시 언급된다.

보고서에는 먼저 “반민법 제4조 6호는 군이나 경찰의 관리로서 악질적인 행위로 민족에게 해를 가하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거나 15년 이하의 공민권을 정지하고 그 재산의 전부 혹은 일부를 몰수 할 수 있다:고 언급한다.

그러면서 (반민특위가) 헌병보조원으로 체포 조사하는 자는 송재욱이라고 밝힌다.

1939년 6월 1일 <부산일보>는 송재욱이 (괴산군) 문광면장으로 임명됐다고 보도한다.

조선총독부및소속관서직원록에도 1939년과 1940년도 연속으로 문광면장에 송재욱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

이로서 친일반민족행위진상조사위원회에서 발간한 보고서 ‘Ⅲ-1’편에 언급된 “송재욱(宋在旭) 헌병보조원으로 미원에서 3.1운동 당시 2명을 사살한 공로로 면장한 자, 괴산군 문광면장 9.29 현재 병보석” 이란 내용이 확인된 것이다.

송재욱의 총찬에 맞아 순국한 장일환(張一煥 , 1882~1919.3.30.)애국지사

1919년 3월 30일 시작된 청주시 미원면 미원장터 만세시위는 규모면에서 충북을 대표하는 삼일운동으로 평가받는다.

당시 미원면 용곡리에 거주하는 신경구(申敬求) 선생은 1919년 3월 1일 이후 전국 각지에서 독립만세시위가 전개되고 있다는 소속을 듣고, 미원면에서도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계획한다.

신경구 선생은 이수란(李水蘭)·이용실(李容實) 등과 미원장날을 이용하여 시위할 것을 결의하고, 선언서와 태극기를 인쇄·제작하는 한편 동지를 규합했다.

이들은 3월 30일 오후 1시경 장터 네거리로 나가 조선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호소하며 1,000여 명의 시위군중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펼쳤다.

현장에 출동한 일제 헌병들이 태극기를 빼앗으며 강제 해산에 나섰다.

이에 불구하고 군중들의 규모는 더욱 커졌다.

일제 헌병은 시위에 앞장섰던 신경구를 헌병주재소에 구금했다. 이에 격분한 시위군중들은 주재소로 몰려가 신경구의 석방을 요구하는 등 더욱 격렬한 시위를 전개한다.

이에 놀란 일제는 청주경찰서 수비대의 일부 병력까지 동원하더니, 급기야 시위군중에게 발포 했다.

총을 맞은 장일환(張一煥 , 1882~1919.3.30.)애국지사가 그 자리에서 순국하는 등 2명이 사망하고 다수의 부상자와 피해자가 발생했다.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에 따르면 장일환 선생은 1919년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의병장으로 활약한 한봉수(韓鳳洙)로부터 고향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부탁 받고, 동지들과 상의해 3월 30일 주민을 동원했다.

이날 미원(米院)장터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후,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주재소 앞길에서 장일환 선생은 독립만세를 외쳤다.

기막힌 현실, 처벌은커녕 공덕비가 버젓히

괴산군 문광면사무소에 보전됐던 송재욱 공덕비.  2019년 당시 면사무소 공사 관계로 한 켠에 옮겨져 있는 모습. 

 

1949년 반민특위는 이승만의 와해공작에 의해 결실을 맺지 못한다. 만세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를 사살한 송재욱은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다.

더 기가 막힌 것은 21세기 대한민국 기관인 괴산군 문광면 사무소에 송재욱의 공적을 기리는 공덕비가 2020년까지 버젓히 세워졌다는 사실이다.

문광면 사무소에 남아있던 공적비에는 면장송재욱기념비(面長송재욱紀念碑)라고 적혀있다. 뒷면에는 ‘갑신 중추 문광면 일동’ 이라고 적혀있어 갑신년(1943년)에 세워진 것을 알수 있다.

이런 사실은 1919년 12월 <충북인뉴스>의 보도로 세상에 알려졌다.

2020년 초 송재욱의 후손은 어떤 사과의 말 한마디도 없이 송재욱의 공덕비를 슬그머니 가져갔다.

<충북인뉴스 보도이후> 장일환 애국지사의 후손 장기영 광복회충북도지부 전 지부장은 “처음에는 심장이 두근거렸습니다. 이제는 용서합니다. 비석을 문광면사무소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다만 송재욱의 비석 그의 행적을 있는 그대로 알리는 안내판을 세웠으면 좋겠습니다. 두고 두고 사람들이 볼수 있도록 말입니다”라며 괴산군에 안내판 설치를 요청했다.

당시 괴산군 문광면은 장일환 애국지사 후손의 절절한 절규에도 불구하고 후손에게 공덕비를 넘겼다.

공덕비의 소유자는 송재욱의 후손이라는 이유에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