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수품‧전쟁헌금 갹출 성과로 귀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다
충북인이 알아야 할 친일파6. 일제 충주‧괴산군수 전석영 일제침략전쟁에 앞장섰는데, 충주향교엔 공덕비가 우뚝 26세에 면장, 28세에 조선총독부중추원참의로 수직상승 32세에 괴산군수 부임…충주군수 재직하며 침략전쟁에 앞장 쌍광욱일장 등 훈장, 종4위 관직까지 올라
의병의 도시를 자랑하는 천년도시 충주. 일제국주의의 조선침탈이 본격화된 19세기 말 까지만 하더라도 충주시는 충청북도의 중심도시였다.
1896년 고종이 행정구역을 13개 도(道)로 개편하면서 충청도는 충청북도와 충청남도로 분리됐다. 충북의 관찰부가 있는 도시는 당연히 충주였다.
그러나 청주시로 충북의 중심이 옮겨가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1908년 순종은 칙령을 발표해 충주에 있던 관찰부를 청주로 옮겼다. 충청도 1000년 중심이였던 충주의 위상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린 것이다.
충북의 수부도시 위상에서 멀어진 충주시는, 그 뒤로 쇠락을 거듭했다. 지금은 청주시 인구의 1/3 수준으로 차이가 크게 벌어졌다.
충주시가 충북 제1의도시 위상을 잃게 된것은 일제의 조선강제병합과 깊게 연관돼 있다.
1908년 충북도관찰부가 청주로 옮기게 된 데에는 한 일본인이 통감부 내무차관에게 보낸 의견서가 계기가 됐다.
당시는 조선을 강제병합하기 전이지만 이미 을사늑약과 정미조약을 통해 일제가 사실상 대한제국을 실실적으로 지배하던 시기였다.
일제강점기인 1923년에 작성된 '청주연혁지(淸州沿革誌)'에 따르면 충북관찰부 일본인 서기관 카미타니 다카오(神谷卓男)는 통감부에 관찰부와 관련한 의견서를 보냈다.
카미타니는 의견서에서 조치원에 경부선 철도가 개통하면서 청주가 정치·경제의 중심지로서 가장 적당한 곳이고, 주변이 산악으로 둘러싸인 충주는 반란군의 근거지가 됐던 점 등을 들어 도청 이전을 제기했다.
전홍식 충주3‧1운동기념사업회 대표는 2015년 발표한 박사학위 논문 <식민통치전략과 도시공간의 변화. 일제시기 충주를 중심으로>에서 "충청북도 관찰부가 충주에서 청주로 이전한 것은 당시 최고 통치권자인 조선통감이 결정하고 통감부 차관과 충청북도 서기관이 담당자가 돼 실행에 옮겼다"고 분석했다.
일제침탈로 충청 제1의 도시 위상까지 빼앗겼건만...
충주의 오래된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충주향교.
향교 입구 오른편 광장에는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영원히 잊지 않고 기념하겠다)가 놓여있다.
영세불망비의 주인공은 전석영(全錫泳, 1893~?)이다.
창씨명은 ‘松田圭生’으로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면장에서 시작해 28세에 중추원참의에 오른 고위 친일파다.
전석영은 누굴까?
일제의 광기어린 침략전쟁이였던 중일전쟁(일본식 표현=지나사변)이 시작된 1937년 8월 23일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전석영에 대한 기사를 싣는다.
<매일신보>는 기사에서 “(중일전챙을 지지하는) 시국강연회가 지난 8월 16일 충주경찰서 상무회관에서 개최됐다. 충주군수 전석영씨가 ‘지나사변에 ‘군민의 각오(覺悟)’라는 연제(演題=강연제목)로 일장의 열변을 토했다”고 보도했다.
신문에 보도된 것은 이 한건이였지만 전석영이 일제의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옹호한 것은 단 한 번 이였을까? 무수히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3년 뒤인 1940년 조선총독부는 중일전쟁에 부역한 공로를 인정받아 전석영에 대한 ‘지나사변 공적조서’를 본국에 상신한다.
공적조서에는 “전석영이 조선총독부 충주군수로 재직하면서 1937년 7월 7일부터 1940년 4월 6일까지 2년9개월22일 동안 △(중일전쟁에 대한) 여론 환기와 국방사상의 보급 및 선전 △군용물자의 조달과 군수품의 공출 △전사, 전상, 병사자의 조위, 부조, 위문 △ 군대와 군인, 유가족의 후원 △국방헌금 갹출에 큰 공을 세웠다”고 기재됐다.
일제의 침략전쟁에 국방헌금을 걷어 바친 전석영
전석영의 본적은 황해도 은율군 장연면이다. 1910년대에 일본의 메이지(明治=명치)법률학교를 졸업했다.
1919년 조선총독부 황해도 은율군 장연면장에 오르더니, 28세인 1921년 조선인이 오를수 있는 최고 관직인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에 올랐다.
1920년 조선총독부 황해도 도평의회원이 되었고, 1926년 조선총독부 괴산군수가 됐다. 1927년 조선총독부 영동군수에 이어 1932년부터 1942년까지 조선총독부 충주군수를 지냈다.
1935년에는 일본정부로부터 훈 6등 서부장, 1939년에는 훈5등서부장, 1940년 훈5등 쌍광욱일장을 받았다.
1942년에는 일본관직 직위 종4위에 처해져 귀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조선총독부가 1940년 작성한 공적조서에 기재된 내용은 일체의 침략전쟁에 부역하기 위해 같은 동포를 수탈한 것에 불과하다.
전석영은 충주군수로 재직하며 국방헌금이라는 명목으로 동포의 주머니를, 군수품을 공출한다며 조선민중의 곳간을 수탈했을 뿐이다.
전석영을 추모하는 자는 과연 누구?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조선인사흥신록>과 <공로자명감>은 전석영에 대한 인물평을 다음과 기록했다.
△ 십수년 당국의 방침에 순응하여 치적을 올려 직책을 다하여 충성함이 일반인을 뛰어 넘음.
△ 충주에서의 수완과 재능은 늘 호평으로 시종일관 함.
△ 숭고한 인격은 부하를 독려하고, 주민을 교화하기에 족함.
일제와 조선총독부가 보기에도 전석영은 늘 일제에 충성했으니, 그 인격마저 “숭고”하다고 기록했을 터이다.
그러나 동포의 재산을 수탈해 침략전쟁에 부역한 전석영을 바라보는 조선민중의 관점은 이와 달라야 하지 않을까?
충주의 역사를 온전히 간직한 충주향교에 보존돼있는 ‘전석영 영세불망비’를 어떻게 봐야 할까?
적어도 일제의 침탈로 도시의 쇠락까지 경험한 충주시민 만큼은 그의 공덕을 찬양하는 ‘영세불망비’가 아니라 그의 죄상을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단죄불망비’가 필요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