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친일경찰, 아들은 조선인 최초 일본 신직
충북인이 알아야 할 친일파 5. 청주고보 졸업생 이산연 아버지 이원우는 일제고등경찰 경시, 청일전쟁 복무
1949년 6월 1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 조사관 조사관 김상철(金相喆)이 한 남성에게 묻는다.
문) 김상철 조사관 : 당신의 이름과 주소를 말하라
답) 이산연(李山衍)입니다. 청주시 수동 187-5번지에서 부모님과 처, 아들 3명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반민특위에 체포돼 조사를 받는 남성은 조선총독부 조선신궁 산하 청주신사(神社)에서 신직신직을 지낸 이산연(1917~?)이다. 조선인으로 조선신궁의 신직 자리에 오른 것은 이산연이 유일하다.
반민특위 조사관 김상철이 이산연에게 묻는다.
문) 김상철 조사관 : 청주신사 신직이 된 동기를 말하라.
답) 이산연 : 1937년 청주공립고등보통학교(현 청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38년 아버지 이원우((李洹雨. 1891~미상, 당시 조선총독부 경찰부 경부)가 조선총독부 충북도지사 김동훈(김동훈(金東勳, 1886~1947)의 추천장을 받아 ‘조선황전강습소’ 입소원서를 조선신궁사무소에 제출해 입소통지를 받아 입소케 되었던 것입니다.
이산연은 자신이 신직이 되기위해 ‘조선황전강습소’를 들어가게 된 경위에 대해 부친 이원우(李洹雨)를 핑계댄다.
그의 부친 이원도 1915년부터 해방때까지 조선총독부 고등경찰직인 경시까지 오른 입지전적의 친일파다.
반민특위 조사관 김상철은 이산연에게 신직이 되기를 지원한 이유를 구체적을 묻는다.
문) 김상철 조사관 : 당시 중등교육을 받았던 피의자가 신직이 되기를 지원한 이유를 말하라.
답) 이산연 : 조선인으로서 2대 유리조건이 제시되어 있었던 관계로 지원하였던 것입니다.
문) 김상철 조사관 : 2대 조건이란 무엇이었던가.
답) 이산연 : 신직이 되면 일본인이 특별대우한다는 등이었습니다.
문) 김상철 조사관 : 일본인이 특별대우한다는 점을 말하라.
답) 이산연 : 그것은 조선 사람으로서 일본인의 행동을 하는 고로 일본인으로 대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조선 사람의 조상보다 일본인의 조상이 중하다고 신념으로 생각”
앞서 이산연은 자신이 조선총독부 청주신사의 신직이 되고자 했던 이유에 대해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인으로 대우한다는 점을 들었다.
1949년 반민특위 조사관 김상철은 박원종(朴元鍾)이란 사람을 불러 증인 신문을 받는다.
문) 김상철 조사관 : 이산연이 신직 당시에 동족을 ‘싫어해 멀리하였다’(擯斥敬遠)는데 사실입니까?
답) 증인 박원종 : 한 동리에서 같이 큰 연배 간에도 전연 교류가 없었던 것만은 사실이었습니다. (오직) 신직을 다닐 뿐이고, 그 사람의 범절이 순전히 일본식(日式)이었고 동족(조선인)과 교제도 아니하였던 관계로 일본인(日人)이상의 조선인이라는 말이 자자하였습니다.
증인 박원종의 이산연에 대한 세평한 “일본인 이상의 조선인”이라는 정황은 반민특의의 범죄조사 보고서에도 등장한다.
1949년 8월 작성된 반민특위 김상철 조사관이 작성한 이산연에 대한 범죄보고서에는 “이산연은 신사재직 중 일관하여 단신으로 신사숙직실에 ‘때 묻지 않도록 홀로 생활하는 수행을’ (獨居淨戒=독거정계)하며 자신의 전 생활을 일(본)식화하기 위하여 가정까지 격리하였을 뿐아니라, 동족지구(조선인이 거주하는 마을이나 공간)까지도 싫어하여 멀리한 사실 등 일본침략주의와 그 시책을 수행하는데 협력하기 위한 반민족행위의 표본”이라고 적시됐다.
당시 청주신사를 비롯한 신사는 조선총독부가 걷는 세금 이외에 ‘신사갹출비’를 강제로 징수했다.
이산연은 청주신사의 ‘신직’이란 직위에 있으면서 ‘신사갹출비’를 징수하는 업무를 맡았다.
이산연이 이 업무를 맡으면서 보인 태도는 반민특위의 조서에도 잘 나타난다.
문) 김상철 조사관 : 피의자는 자신의 담당사무로서 신사갹출비를 징수할 제 가렴하였다는데 사실인가.
답) 이산연 : 수차 징수하러가도 체납한 자에게 한하여 “신사갹출비는 다른 세금과 달라서 만일 아니 내면 비국민이 될 터이니 내라”고 강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문) 김상철 조사관 : 그런 사실은 몇 번이나 있었는가.
답) 이산연 : 12, 13차례 있었습니다.
문) 김상철 조사관 : 신사갹출금이 세금보다 중하다는 점은 무엇이었는가.
답 : 조선이 일본에 속하여 있으니까 ‘조선 사람의 조상보다 일본인의 조상이 중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신념에서 이를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친일파 이산연이 모셨던 일본 신 아마테라스
일제강점기 작성된 『청주연혁기』에 따르면 조선총독부와 일본인들은 1911년 충북도청 뒤 당산 정상에 정상에 작은 사전(社殿)을 지어 신관에게 청하여 일본 황조신 아마테라스 혼령을 모셔와 봉제했다.
이곳은 청주목사가 산신제를 올리는 성황당이 있던 곳이다. 일본인들은 다시 신궁을 청주시 사직동 현 충혼탑이 있는 곳으로 옮겼다 1913년 다시 당산 산허리를 깍아 정식으로 청주신사를 지었다.
1935년 경 일본인들과 조선총독부 충청북도는 당산에 있던 신사가 좁다며 이전을 모색했다.
그해 친일반민족행위자 민영은이 청주신사가 새로 이전할 우암산 자락 (현 삼일공원 부지) 토지 1만여평을 신사부지로 기부했다. 민영은 1936년에는 신사 건축비용 2500원을 추가로 납부한다.
청주신사가 처음 지어졌을 때부터 주신은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 였다. 일본에서는 일본 신화의 주신이자 황실의 시조로서 오늘날에도 '일본 그 자체'로 비유될 정도로 절대적인 위치에 있다.
조선총독부 충북도지사급 대우를 받은 이산연
1942년 이산연은 전국에 있던 조선신궁 신직의 대표로 조선총독부가 금강선에서 주최한 ‘계연성대회’에 참가했다.
이산연은 반민특위 조사에서 이 행사에 대해 “단식을 하며, 수중(=물속)에 뛰어 들어가 축문을 낭독하는 것”아리고 말했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는 매월 3~4회 전쟁승리와 일본군 전사자를 위로하는 제사를 지냈다.
일제의 황조신을 모시고, 침략전쟁을 옹호하는 신직의 역할을 다했던 이산연은 어떤 대우를 받았을까?
일제 당국은 황민화 정책의 최일선에서 혼신을 다한 그에게 특별한 대우를 하며 충분히 보상했다.
이산연은 일본인과 동등한 '앵급(櫻級)'의 배급을 받았다. 또 조선인이라는 호칭 대신 일본인이라는 호칭을 들었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물자배급의 등급을 앵(櫻)·송(松)·죽(竹)·매(梅)의 4단계로 나눠놓고 이중 일본인에게는 앵급을, 조선인은 사회적 지위와 생활정도에 따라 송·죽·매 3단계로 차등 지급하했다.
조선인으로서 앵급 배급을 받은 자는 도지사급에 드는 몇 명에 불과했다.
이산연이 조선총독부로부터 받은 대우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수 있는 대목이다.
이산연 못지 않은 일제 고등경찰 아버지 이원우
아들 이산연을 조선인 최초의 일본 신사 신직 자리에 오르게 했던 이원우도 일제 고등경찰을 지낸 고위 친일파다.
이원우는 1915년 3월 경성전수학교 졸업해 1915년 9월 조선총독부 경상남도 부산경찰서 경부로 임명됐다.
이어 1916년 2월 경상남도 마산경찰서 경부로, 삼일독립만세혁명이 발생한 1919년에는 조선총독부 울산경찰서 경부로 지냈다. .
1924년 5월충청북도 괴산경찰서 경부로 근무하다가 같은 해 12월 충주경찰서 경부로 옮겼다. 1930년 충청북도 청주경찰서 경부로 전임됐고, 1937년부터 청주경찰서 경부(사법계 주임)를 지냈다.
당시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군수품 수송과 경계 업무 등을 적극 수행했다..
1938년 1월 충청북도 경찰부로 옮겨 보안과 경부를 지내다가 같은 해 5월 고등경찰과 경부(고등계 주임)를 맡았다.
이원우는 고등경찰과 경부로 근무하면서 중일전쟁과 관련한 방공 방첩, 시국 관련 각종 강연회와 좌담회 개최하고, 시국인식 강화를 위한 여론을 환기한 점, 국방사상 보급 업무 등의 전시(戰時) 업무를 적극 수행한 공로를 인정받아 ‘지나사변(청일전쟁)공로자공적조서’에 이름을 올렸다.
1941년부터 충청북도 경찰부 경무과 경부로 근무했으며, 같은 해 8월 충청북도 경시(고등관 7등)로 승진했다.
해방우 재조선 미군육군군정청 시절 미군정청 충청북도 경찰부 형사과장과 경찰학교장을 지냈다.
'신직'이란 어떤 자리?
'신직(神職)'이란 글자 일본 신사(神社)에 근무하면서 제사와 기도 등 신사(神事)를 집행하는 사람을 통칭한 용어다.
다른 용어로는 신주(神主), 신관(神官), 사사(社司), 궁사(宮司) 등으로도 불렸다.
일제 당시 각 지역의 신사는 도(道) 지방과에서 관리하였는데 출사(出仕)는 고원(雇員)에 해당하는 낮은 직급이었으나 신직부터는 정식 관리로 임명돼 판임관 대우를 받았다. 신직은 신사에서 행하는 각종 제사(祭祀)를 주관하였는데, 일제당국으로부터 물자배급과 신분에서 특별대우를 받았다.
신직 가운데 궁사(宮司)는 메이지신궁(明治神宮)이나 남산 중턱(현 남산식물원 일대)에 있었던 조선신궁(朝鮮神宮)과 같은 대형 신사에 근무한 신직의 장(長)으로, 일황이 직접 임명하는 친임관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