퍽치기 일당에 맞아 죽은 친일파 윤명선, 그리고 대통령 윤보선
일명 땅달보‧째보‧떼보는 왜 윤명선을 죽였을까?
1946년 2월 24일 <동아일보>는 ‘윤명선 씨의 타살범 검거’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낸다.
내용은 1946년 21일 밤 열한시 경 시내 명치정에 있는 술집 ‘샌프란시스코’ 앞에서 시내 통의동 76번지 전 만주국 참사관 윤명선씨를 죽인 범인을 22일자로 검거했다는 것이다.
검거된 범인은 주소 미상의 속칭 ‘꺽쇠’ 홍성우(22세)와, 속칭 ‘땅딸보’ 김지양(23세), 속칭 ‘떼부’ 김필수(23세) 세명이다.
1946년 2월 24일 <자유일보>도 ‘윤명선씨 살해 악당 타진’으로 같은 내용을 보도했다.
<자유일보>는 기사에서 21일 조선취인소(=주식거래소) 부근에서 윤명선씨를 살해한 범인 네명이 23일 아침 신정 유곽과 술집에서 각각 경찰에게 체포했다고 전한다.
이어 범인은 외면(겉모습)은 훌륭한 신사로 보이나 밤이면 본정(현 서울 종로구 명동)을 휩쓰는 무서운 ‘깽(단)’이라며 이상한 별명까지 가지고 있다고 했다.
<자유일보>는 홍성우(꺽쇠), 김필수(떼보), 김지양(땅딸보) 등인데 그날 밤 윤 씨가 친구 안익조씨와 같이 조선취인소 부근에 도달하자 돌연 달려들어 “술을 먹고 다니는 놈은 모두 건국의 방행자다”하고 먼저 안 씨를 구타한 후 시계를 강탈해 도주함으로 안 씨는 윤 씨를 남겨두고 그 흉한을 추격하는 사이에 윤 씨는 남아있는 흉한에게 구타 당하여 뇌진탕이 되어 병원에서 사망했다고 기사를 마무리 했다.
지금으로 보면 조직폭력배가 집단적으로 사람을 살해하고 강도 짓을 벌인 중대 범죄다.
이들은 어느 정도 처벌을 받았을까?
1946년 4월 7일 서울법원은 윤명선을 때려 죽인 범인 홍성우(꺽쇠) 20년, 김필수 5년(떼보), 김지양(땅달보)에 6년은 언도했다. 생각보다 형량이 높지 않아 보인다.
이들 ‘퍽치기’범이 검거된 과정도 흥미롭다.
범행이 이뤄진 날은 1945년 2월 21일이다.
하루 뒤인 22일 사건이 발생한 명동 일대에서 조선인 경찰과 점령군였던 미군정 소속 군인들과 맞추쳤고 시비가 붙었다.
공교롭게도 퍽치기 일당이 이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퍽치기 일당은 미국 군인이 조선인 경찰을 괴롭히자 분을 참지 못하고 미군에게 달려들었다.
때 마침 윤명선의 장례식장에서 심부름을 하던 지인이 초와 향을 사기 위해 나왔다 이 장면을 목격하고 경찰에 신고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 그때 출동했던 경찰이 이들을 윤명선 살해범으로 보고 전격 체포했다.
‘퍽치기’에 죽은 윤명선은 누구?
일명 ‘퍽치기’로 맞아 죽은 윤명선(윤명선(尹明善, 1900.9.1.~1946.2.21.)은 누굴까?
동아일보는 당시 기사에서 윤명선에 대해 ‘전 만주국 참사관’이라고 언급했다.
만주국은 1932년 3월 일제가 중국을 침공해 만주지역을 점령한뒤 세운 친일괴뢰국가다.
친일괴뢰국가에서 고위관료를 지낸 만큼 당연히 친일파다.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자진상규명위원회 진상규명보고서에 따르면 윤명선은 1929년 동경제국대학 법학부 정치과를 졸업했다. 만주사변(1931년 9월 18일일 일제과 일으킨 침략전쟁)이 일어나자 윤명선은 만주로 이주해 일제에 부역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34년 만주국장부로부터 건국공로장과 대전기념장을 받는다.
이후 1935년부터 1937년까지 만주국 국무원 사무관, 1937년 7월부터 만주국 국무원 통계처 통계과장, 1945년 6월 이후에는 간성성 민생청장으로 재직했다.
만주지역에서 진행된 항일무장투쟁 독립군을 탄압하는데도 앞장섰다.
윤명선은 일제가 항일무장세력을 무력으로 탄합하기 위해 조직한 ‘동남지구 특별공작후원회’ 간사로 활동했다.
‘동남지구 특별공작’은 일제가 1940년 하반기에 만주지역 통화현, 집안현과 임강현 등 만주 동남부 일대의 항일무장부대를 상대로 진행한 대규모 토벌 작전이다.
윤명선은 ‘동남지구특결공작후원회’ 간사를 맡으며 ‘선무공작’을 지원하고 조선인들을 상대로 금품을 모집해 일제에 전달했다.
친일반민족행위자진상규명위원회는 윤명선의 행위에 대해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 16호 “고등문관 이상의 관리, 헌병 또는 경찰로서 무고한 우리민족 구성원을 감금‧고문‧학대하는 등 탄압제 적극 앞장선 행위”로 규정했다.
친일파 윤명선의 본적지 땅 주인, 알고보니 대통령 윤보선
친일반민족행위자진상결과보고서에 따르면 ‘퍽치기’ 일당에 맞아 죽은 윤명선의 본적지는 충청남도 아산시 둔포면 신항리 1△△ 번지다.
제적등본상 사망년도는 앞서 동아일보와 자유일보가 보도했던 1946년 2월 21일이 아니라 1962년 5월 7일이다. 사망신고가 사후에 이뤄졌을 가능성이 엿보인다.
윤명선의 본적지인 신항리 1△△ 번지는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신항리 1△△-1 번지, 1△△-2번지 등 여러 필지로 분할됐다.
신항리 1△△-1번지 토지의 소유자를 확인해 보니, 놀랄만한 인물이 등장했다.
소유자는 바로 1960년부터 1962년 박정희 군사 쿠데타 전까지 대통령을 지낸 윤보선(尹潽善, 1897~1990) 전 대통령이다.
토지등기부등본과 일제강점기 작성된 구 토지대장을 확인해보니 신항리 1△△-1번지의 최초 소유자는 윤치소(尹致昭, 1871~1944)다.
구 토지대장에는 윤치소가 명치(明治)45년(서기 1912년) 3월 24일 토지를 사정받은 것으로 돼 있다.
이후 윤치소는 대정(大正) 7년(서기 1918년) 5월 8일 소유권보유 등기를 했다.
윤보선 전 대통령이 토지 소유자가 된 시점은 소화(昭和) 20년 (1945년) 5월 11일이다.
토지등기부등본에는 윤보선 전 대통령은 이 보다 1년 앞선 1944년 2월 20일 ‘가독상속’을 받은 것으로 기록돼 있다.
친일파 윤치소(尹致昭)로부터 땅을 물려받은 윤보선 전 대통령
윤보선 전 대통령에게 땅을 물려준 윤치소는 누굴까?
윤치소(1871~1944, 창씨명 이토 치쇼 이토 치쇼(伊東致昭)는 윤보선 전 대통령의 어버지다.
윤치소는 부인 해평윤씨와의 사이에에서 장남 윤보선 등 6남 3녀를 두었다.
본적지는 충남 아산시 둔포면 신항리 1△△번지로 앞서 언급한 친일파 윤명선과 같다.
윤보선 전 대통령의 아버지인 윤치소도 친일반민족행위자진상규명위원회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한 친일파다.
윤치소는 1924년부터 1927년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내며 일제로부터 연간 600원의 수당을 받았다. 1912년 조선총독부에 땅을 기부한 공로로 조선총독부로부터 ‘목배’를 하사 받았다. 1913년도에도 조선총독부에 교육기금을 기부하 목배를 받았다.
1940년도에는 문중 주도로 창씨 개명을 주도했다.
기독교 장로회 신자로 서울 안동교회 장로를 지냈는데 1938년 조선기독교연합회 평의원으로 조선신궁 참열원으로 참여했다. 이후 일제가 전시체제에 들어서자 종교단체 간부로 전생수행에 협력하는 단체 활동을 펼쳤다. 1938년에는 기독교 장로회에서 결성한 ‘비행기헌납기성회’ 부회장을 지내면서 일제에 비행기 헌납운동을 주도했다. 그 결과 일본군에 비행기 1댜와 기관총 7정의 자금에 해당하는 15만여원을 일제에 헌납했다.
한 마디로 뼈속까지 친일파였던 것이다.
그런데 윤치소의 본적지는 ‘퍽치기’ 일당에 맞아 죽은 윤명선과 본적지가 같다. 도대체 이들은 무슨 관계였을까?
윤치소와 윤명선은 사실 삼촌과 조카였다.
다음 편에서는 일제강점기 최고의 친일가문이었던 윤보선 전 대통령 일가의 친일행적을 공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