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설 다시보기 3) 100억대 재산을 독립운동에 쏟아붓다
독립운동에 헌신했지만, 대한민국 정부 2013년에야 국적부여
역사의 시계가 다시 그 시간으로 돌아왔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제로 박탈했던 1905년 을사늑약. 시간은 120년이 흘러 ‘을씨년 스런’ 을사년이 돌와왔다.
보재 이상설 선생은 을사늑약 이후 한국 영토를 벗어나 최초로 무장독립투쟁 기지를 건설하고 임시정부를 세운 인물이다. 상해임시정부 보다 5년이나 앞섰다.
그의 수많은 업적을 역사적 평가로 제대로 담지 못했다는 지적이 최근 확산되고 있다. 특히 대한민국 정부가 이상설 선생에게 수여한 서훈(2등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의 격이 상향돼야 한다는 주장이 확산되고 있다.
이에 본보는 그동안 보도한 기사를 보충하고 첨가해 ‘이상설 다시보기’ 기사를 연재한다.(편집자 주)
'헤이그 특사'인 독립운동가 보재(溥齋) 이상설(李相卨·1870~1917) 선생은 현재 시가로 100억원대 이상의 재산을 독립운동에 쏟아부었지만 이런 사실을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런 사실은 평생을 독립운동 연구에 헌신한 충북대학교 사학과 故 박걸순 전 교수에 의해 밝혀졌다.
2017년 박걸순 교수는 '이상설 선생 순국 100주년 기념 전국학술대회'에서 북간도 서전서숙(瑞甸書塾) 개설 등 연해주 일대 전방위적인 독립운동을 주도한 이상설 선생의 독립운동 자금 규모 등을 학계 최초로 공개했다
그는 1901년 작성된 대한제국 시기 토지대장인 '충청북도 진천군 양안(忠淸北道 鎭川郡 量案)'을 전수 조사·분석해 이상설 선생의 토지 소유 현황을 파악했다.
이에 따르면 이상설 선생은 진천군 내 남변면·북변면·초평면·월촌면 등 4개 면에 19.7정보의 토지를 소유했다.
현 시가로 80억~100억원을 호가하는 재산으로, 당시 진천군 상위 지주 18위에 해당하는 대지주였다.
이 가운데 논이 47필지에 7결31부5속이고, 밭이 25필지에 3결37부4속이며, 대지가 11필지에 70부1속이다.
이 토지에는 기와 1채와 초가 10채 등 11채의 가옥이 있었다.
극빈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난 이상설 선생이 대지주였다는 사실은 양아버지 이용우(李龍雨) 소유의 토지를 물려받은 것으로 박 교수는 짐작했다.
이상설 선생이 양아버지의 서울 재산도 물려받았다면 100억원 이상의 재산을 소유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선생은 7살에 상경해 고향 진천과 인연을 끊은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들 재산을 고리로 망명 직전까지 30여 년간 고향과 연계됐다.
박 교수에 따르면 이상설 선생은 고향 문중에서 평판은 그리 좋지 않았다고 한다.
나랏일에 쓰기 위해 돈 떨어질 때마다 와서 고향의 전답을 팔아가서 모두 없애버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독립운동사에서 독립운동가의 군자금으로는 서간도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이회영(李會榮·1867~1932) 선생 형제가 내 놓은 600억원 상당 규모의 재산이 대표적으로 알려졌다.
안중근 의거의 배후, 연해주 한인사회 통합 주창자
박 교수는 안중근(安重根·1879~1910)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의거의 실질적 배후이자 안 의사의 '동양평화론' 형성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 이상설 선생임도 입증했다.
일제는 안 의사의 의거 후 연해주 지역 관련자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최재형(崔在亨·1858~1920) 선생과 함께 이상설 선생에게 혐의를 뒀다.
안 의사의 동양평화론은 '조선의 독립이 동아시아 지역의 평화를 가져온다'는 이상설 선생의 동양평화론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게 박 교수의 견해다.
그는 이상설 선생이 안중근 의거를 주도한 실질적 배후로 평가했다.
박 교수에 따르면 이상설 선생은 연해주 한인사회의 화해와 통합의 주창자였다.
일제는 연해주 한인사회를 이범윤(李範允), 이갑(李甲), 최봉준(崔鳳俊), 정순만(鄭淳萬) 등 유력한 파의 수장 휘하와 어느 파에도 속하지 않은 자 등 5개 파 또는 경성파(서울), 서파(평안도), 북파(함경도) 등 지역 3개 파로 구분했다.
이상설 선생은 이런 연해주 한인사회의 통합을 위해 노력했고, 1911년 권업회(勸業會) 창립이 그의 심복인 청주 출신 정순만의 피살 사건을 계기로 결실을 거뒀음도 규명했다.
이는 기존 연구에서 완전히 간과된 사실로 한국독립운동사 해석에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된다.
박 교수는 "이상설 선생은 한말~1910년대에 광폭의 공간을 무대로 전방위적인 독립운동론을 실천하고자 노력한 대표적 독립운동가이지만 다른 독립운동가에 가려 지나치게 저평가되거나 잘못 이해된 부분이 적잖다"고 말했다.
한편 이상설 선생은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에서 태어났고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서 이준, 이위종 열사와 함께 국권 회복을 국제여론에 호소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러시아 연해주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벌이고 민족교육에 앞장서다 1917년 향년 48세로 세상을 떠났다.
선생은 직계비속이 없다는 이유로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가 국가보훈처가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에 따라 독립유공자 가족관계등록부를 창설해 2013년 9월 선생에게 대한민국 국적을 수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