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가 가장 존경했던 인물 ‘보재 이상설’, 국가서훈 상향해야
1909년 11월 29일, 안중근 의사가 ‘뤼순’ 감옥에 갇힌채 일제로부터 심문을 당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은 이상설이다. 포부는 매우 크며 세계대세에 밝고 동양시국을 간파하고 있다. 애국심이 강하며 교육발달을 기도하고 국가 백년대계를 세울 사람이다”고 말했다.
안중근 의사가 가장 존경했던 인물, 이상설(1871~1917) 선생은 고종의 헤이그 특사(1907년)로 알려져있다.
헤이그특사로 이준 열사가 널리 알려졌지만, 이상설 선생이 ‘정사’(대표)였다는 사실을 생각만큼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이상설 선생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톡과 만주 지방을 무대로 펼쳐진 독립운동과 무장투쟁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이다.
안중근 의사가 1909년 하얼빈에서 이토히로부미를 암살할 때 자금을 조달해주고 지원해준 최재형 선생과 교류하며 권업회(1911년)를 조직해 의장을 맡았다. . 안중근 의사가 최재형을 만나기 위해 들렀던 대동공보(전 해조신문)에도 관여했다.
만주의 독립운동 ‘3만’으로 불렸던 정순만 선생과 옌벤에 서전서숙을 설립했다.
1909년 중국 헤이룽장성 미샨(밀산)에 한흥동무장기지촌을 건설했는데, 홍범도 장군이 이곳에서 교관 역할을 했다. 1910년 유인석, 이범윤 선생과 함께 연해주 방면에 모인 의병을 규합해 ‘13도의군’을 편성했다.
이상설 선생이 1914년 정통령으로 선출된 ‘대한광복군정부’는 상해임시정부보다 5년 먼저 설립된 최초의 망명정부다.
이후 박은식, 신규식, 이동휘, 성낙형 등과 함께 신한혁명당(1914년)을 창설했다.
1917년 향년 48세를 일기로 러시아 우수리스크에서 사망했다.
이상설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 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고 유언했다.
그의 유언대로 이상설 선생의 유해는 우수리스크 수이푼 강가에 뿌려졌다.
커다란 업적 불구, 서훈은 2등급
이상설 선생이 독립운동과정에서 보여준 수많은 업적과 정신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그에게 수여한 서훈은 2등급이다.
1962년 대한민국정부는 이상설 선생에게 국가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수여했다.
독립운동가 서훈 중 제일 높은 1등급은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다.
당시에도 이상설 선생에 대한 서훈이 업적에 비해 낮게 수여됐다는 지적이 일었다.
독립운동가 심산 김창숙 선생은 1962년 병상 인터뷰를 통해 “정부가 발표한 명단 중에는 왜경에 투항한 자도 끼여있고, 마땅히 중장(1등급, 대한민국장)을 받아야 할 사람이 복장(2등급, 대통령장) 수장자로 결정되는 등 미흡한 점이 많다”며 “복장(2등급) 포상자 중 이동녕(상해임시정부 4대 대통령) 선생과 ‘헤이그밀사사건’으로 유명한 이상설 선생은 중장(1등급)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지적했다.
현재 독립운동가 단체와 이상설 선생 출생지인 진천군을 중심으로 서훈이 1등급(대한민국장)으로 상향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오는 28일 광복회는 충북진천 이상설 기념관에서 ‘독립운동의 발원지 연해주와 이상설, 그리고 ’대한국민의회‘ 재조명’ 행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이 자리에서는 이상설 선생과 대한국민의회 활동을 재조명하고, 서훈을 1등급으로 상향할 것을 촉구한다.
한편 이날 행사에는 이종찬 광복회장과 진천군수등이 참석할 예정이다. 또 이상설 선생을 추모하는 노래를 만든 산오락회(김강곤, 조애란 명창, 최상돈)가 ‘우수리스크의 편지’와 신흥무관학교 교가를 부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