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휘 일가, 이순신 장군의 묘소위토까지 팔아먹으려 했다
1931년 5월 동일은행, 충남 아산 이순신 장군 묘소위토 경매 통보 당시 동일은행장은 민영휘‧안유풍 장남 민대식 경매 사실 알려지자 전 조선민중 분노, 모금운동 벌어져 2만여명 참여해 1만7000원 모금, 동일은행 채권환수
민영휘 일가는 자신들의 무덤은 왜색풍으로 호사스럽게 만들었다. 하지만 민 씨 일가는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묘소 위토를 경매에 부쳐 팔아넘기려 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1931년 5월 13일 동아일보는 <이천원에 경매당하는 이 충무공의 묘소 위토> 제목의 기사를 단독으로 보도한다.
동아일보는 기사에서 “임진란, 거북선과 함께 역사를 지은 민족적 은인 ’이 충무공‘(=이순신 장군)의 충남 아산군 음봉면 사정리에 소재한 위토(位土) 60 두락지가 장차 경매에 붙을 운명에 있다”고 전 한다.
동아일보에 따르면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13대 종손 이종옥(1887~1941)씨의 살림이 어려워 지면서 위 토지를 담보로 당시 돈 1300원을 빌렸는데 채권자인 동일은행이 빚을 갚지 못한다며 그해 9월에 경매에 부치기로 했다는 것이다.
독립운동 관여했던 충무공의 후예, 가산 기울자 동일은행에 담보 대출
13대 종손 이종옥의 살림이 어려우진 것은 독립운동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충무공의 14대 손이자 이종옥 선생의 아들인 이응렬(李應烈, 914~1993) 선생이 1942년 4월 14일 조선총독부 용산경찰서에서 치안유지법 위반혐의로 조사를 받는다.
치안유지법은 1925년 일제가 독립운동가와 사회주의 운동을 억누르기 위해 제정한 법률이다.
당시 작성된 용산경찰서 심문조서에는 이응렬 선생은 부친 이종옥 선생에 대해 “나의 부친은 중국군관학교(=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어렸을 때는 만주로 도망쳐 상당히 조선독립운동을 위하여 활약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돼있다.
또 조선일보에 따르면 1934년 6월 조선총독부 경무국(警務局)이 극비로 작성한 ’국외 용의(容疑) 조선인 명부‘에도 이종옥 선생이 포함됐다.
이런 것을 종합해 생각해 보면 종손 이종옥은 그 당시 가산을 정리해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 등지등에서 활동했을 가능성도 높다.
동일은행은 1931년 민영휘가 세운 한일은행과 호서은행이 합병돼 만들어진 회사다. 은행장(=頭取. 두취)은 민영휘와 안유풍 사이에 태어난 장남 민대식이 맡았다.
민족의 성웅으로 추앙받은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묘소 위토 였지만, 아버지에 이어 대를 이은친일파 민대식이 은행장으로 있던 동일은행은 가차 없었다.
당시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휘하에 있던 책임비서를 통해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묘소 위토를 경매에 부친다는 것에 대해) 내용을 도무지 모른다. (동일은행) 천안 지국에 통지 해보겠지만, 방침이 경매로 되어 있다면 어쩔수 없다”고 말했다.
경매방침에 분노한 조선 민중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묘소 위토가 경매에 부쳐진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조선민중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이런 사실은 경매 기사를 단독으로 보도한 동아일보 기자가 1931년 12월 1일 잡지 『동광』에 쓴 글에 잘 나타나있다.
이 기자는 <신문기자 실패담, 충무공의 위토 경매사건>이란 글에서 “동일은행에서 이 충무공 위토를 경매한다는 문제로 내가 사명을 가지고 민대식의 말을 신문에 보도한 것이 이었다”며 “민대식의 말은 물의를 자아내 은행을 OO한다거니 민대식을 OO한다거니 하는 분격에 넘치는 투서가 매일 빗발치듯 우리 신문사로 들어 왓고 또 그 은행에도 들어왔다고” 전했다.
동아일보 보도이후 <충무공 유적보전회>가 꾸려졌고, 조선민중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묘소 위토를 지키는 모금운동에 나섰다.
그 결과물은 대단했다.
운동의 성과는 1932년 5월 29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잘 나타나있다. 동아일보는 당시 한 면 전체를 할애해 해당 소식을 전했다.
지면의 가장 큰 제목은 ‘만 민중의 눈물로 중건된 현충사, 새 사당에 봉안될 충무공 영정’이다.
각각 배치된 기사의 제목은 ‘성금으로 한곳에 뭉친 추모의 열정, 뜻모아 유적 보전’, ‘민족적 의분, 빈부와 노소를 초월해 발로된 민족적 지정’, ‘성금에 얽힌 눈물어린 미담’ 등 보전운동 전반을 상세히 보도했다.
동아일보에 따르면 1년여 동안 총 2만여명이 모금에 참여해 당시 돈으로 1만7000여원이 모금됐다.
동아일보가 소개한 모금자들은 사연은 눈물나도록 애절하다.
“우리집 식구가 굶을 지경이라도 성금을 보탭니다. 위토와 묘소를 구하십시오”(자동차 운전사 김문갑)
“저는 향촌에서 7~8식구와 함께 다섯 두락지기 소작을 하는 가난한 집 아이 올시다. 작년 농사는 전부 소작료로 바쳤고, 기금은 먹으며 굶으며 하는데 오늘 요행으로 돈이 몇푼 생겨서 쌀을 사려고 쌀가게에 갔으나 그 집에서 동아일보에 난 충무공 기사를 읽는 소리를 듣고 눈물이 앞을 가려옵니다. 충무공의 은덕을 생각하면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습니다. 돈이 적음으로 다른 동무와 협력하여 1원을 만들어가지고 우표로 사서 보냅니다.”(〇〇〇 소년)
“저희 들은 처지가 처지이니만치 눈이 어둡고 귀가 먹었습니다. 남들 신문 읽는 소리를 듣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여 견딜수 없어 약간의 금액을 보냅니다.” (미상)
친일파에 맞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묘소와 위토를 지키다
결과적으로 조선 민중은 친일파 민씨 일가가 운영한 동일은행으로부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묘소와 위토를 지켰다. 당시 돈 2000여원의 채무를 갚고 남은 돈 1만5000여원으로 사당을 중건하고, 영정을 새로 제작했다.
동아일보에 따르면 당시 봉안된 충무공의 영정은 이상범 화백이 그렸다.
하지만 친일파 민씨 일가의 묘들은 여전히 화려하다. 강원도 춘천시에 소재한 민영휘의 묘소는 여전히 왕릉 부럽지 않게 호화롭게 번쩍이고 있다.
민영휘의 묘지기가 살던 집은 강원도지정 문화재가 돼, 국민의 세금으로 보전된다.
국가 사적지 상당산성 안에 있던 안유풍과 민대식의 묘는 최근에서야 파묘됐다.
민대식의 동생 민천식(한일은행 두취=은행장) 부부의 무덤은 여전히 국가 사적지 상당산성안에 왜색을 드러낸 채 버젓이 존재한다.
여기서 혹시 모를 뜬 구름 잡는 이야기를 해보면 어떨까?
만약 1931년 당시 조선 민중이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묘소 위토를 지키지 못했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친일로 얻은 부귀영화가 자손만대에 이르기를 꿈꾸던 그들 일가의 묘소로 바꿔치지 되지는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