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하고 힘없는 소시민들의 ‘해결사’정진동 청주도시산업선교회 목사

2002-08-16     충청리뷰
청주도시산업선교회 정진동 목사(71)는 지난 9일 성안길 산업은행 앞에 서있었다. ‘김윤배퇴진 및 청주대 비리척결 시민연대’의 상임대표 자격으로 대시민 캠페인에 참석한 그는 지나가는 시민들에게 청주대 문제의 실상을 알리고 있었다. 현안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가 바른 소리를 하는 그는 청주의 대표적인 재야운동가다. 실제 문제가 있는 곳 치고 정목사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는 곳이 없다. 독재시절에는 민주인사로, 국민의 정부시에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해결사’로 그는 그렇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정의는 반드시 이긴다’
요즘 청주대 문제 때문에 바쁘겠다고 인사를 건네자 정목사는 “매일 하는 일인데 뭐…”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러나 뒤에 이어지는 말들은 단호했다. “설립자가 모든 재산을 다 바쳐 학교를 세웠는데 후손들이 이것을 빼가면 말이 되는가. 학교를 열심히 운영하다가 빚을 진다면 우리같은 시민들이 모금을 할텐데 후손들은 있는 재산마저 가져가 버렸다. 이것은 교육인적자원부 감사에서도 드러났다. 청주대 비리척결운동은 관련자들을 바르게 서게 하기 위한 것이지 우리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는 ‘정의는 반드시 이긴다’라는 평상시 지론을 강조하며 이번에도 이길 것이라고 장담했다. 지난 3월 김영세 전 도교육감이 물러나는데도 그는 혁혁한 공을 세웠다. ‘김영세 교육감 퇴진을 위한 시민행동본부’ 일원으로 각종 집회, 캠페인, 시위현장에 꼬박꼬박 참석하며 김 전 교육감의 퇴진을 일관되게 주장해왔다. 이에 대해 정목사는 ‘민주주의 구조 악을 깨는 사건’이었다고 정의하며 “꼬박 2년을 싸웠는데 힘이 많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아직도 초정노인병원에 관련된 문제는 해결되지 않아 유감이라는 것이다.
이어 그는 “나한테 청주문제를 왜 사사건건 간여하느냐고 하는데 살아있는 양심이라면 비뚤어진 것을 바로 잡아야 한다. 성경에도 성령이 임해 성신을 받으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눈 먼자를 보게 하고, 구속된 자에게 해방을 선포하라고 돼있다. 모든 교회가 이런 역할을 해야 하는데 한국교회는 돈모아 땅사고 교회를 확장시키는 등 예수와 관계없는 일만 하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런 부분에서 정목사가 운영하는 청주도시산업선교회의 성격은 분명 다르다. 지난 72년 설립된 도시산업선교회는 WCC(세계교회협의회)내 기구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곳이다.

목사로 산 30년, 그 핍박의 세월
한 때 전국적으로 도시산업선교회가 설립됐으나 74년 중앙정보부에서 해체하라고 지시, 많은 교회들이 문을 닫았다. 그럼에도 정목사는 굳건히 버텼다. 현재 청주와 영등포에서만이 교회 간판을 걸고 있고 대부분은 일반 교회와 비슷해지거나, 정부 지원금을 받는 관변단체 역할을 하는 쪽으로 바뀌었다는 것이 그의 말이다. 이 때부터 그는 월급이 끊어지고 힘들게 사는 생활을 시작한다. 잠깐동안 WCC에서 지원을 받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내가 도시산업선교회 목사로 처음 맡은 것이 청주시청 청소부 퇴직금 사건이었다. 청소부들에게 퇴직금을 안 줘 집단싸움을 벌여 이겼고 그후 조광피혁 부당전출, 신흥제분 노동자 퇴직금, 율량천 한해대책시 파놓은 웅덩이에 어린이가 빠진 사건 등 여러 가지 일들에 간여했다. 70년대 후반에는 노사분규가 많이 일어났는데 이런 문제를 해결해주는 곳이 없어 우리 교회로 많이 찾아왔다. 여러개의 사건이 겹쳤던 78년에 전국에서 유명한 민주인사들이 찾아와 강연을 하고 단식투쟁을 했다. 그 때 생떼같은 아들이 의문사를 당하는 아픔을 겪었다.”
반독재·반부패운동에 깊숙이 개입한 정목사를 정부에서 가만둘리 없었다. 경찰들은 날마다 교회를 지키고, 드나드는 사람들을 일일이 신원조회하며 괴롭혔다. 구속, 테러, 감시도 모자라 88년 택시파업 때는 정목사의 집을 때려부수는 사건도 있었다. 이제까지 공식적인 연행만 30번. 그 때 당시를 회상하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들을 하루 아침에 잃고, 경찰들로부터 매일 감시당하는 생활을 했어도 선교사업이 위축된 적은 없다.”

어려운 사람 가르치는 일에 헌신
지금도 그의 교회에 찾아오는 사람들은 가난하고 억울한 일을 당한 소시민들이다. 어디가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그들은 정목사를 붙들고 하소연한다. 그러면 그는 진정서를 써서 해당기관에 보내고, 반부패특위나 인권위원회 같은 곳에 호소하고, 당사자들에게 대처하는 법을 일러준다. 이런 과정을 거쳐 아파트 경비원이 못받은 퇴직금을 받았을 때, 부당전출된 회사원이 원직복직 됐을 때 보람을 느낀다.
그의 성격을 알 수 있는 일화 한토막.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고 나서 기독교 관계자들이 축하파티를 열었는데 마치 모든 기독교인이 김대통령을 찬성하는 것처럼 말해 정목사는 그 자리를 뿌리치고 나왔다. “종교는 중립에 서야지 누구 편을 들 수 없다. 그래야 나중에 대통령이 실수를 할 때 쓴소리를 할 수 있다”고 하면서.
청원군 옥산면 호죽리가 고향인 그는 어렸을 때도 지독하게 가난했다. 후에 대한신학(현 대신신학), 단국대 문과대, 장로회 신학대학, 고등성경학교 등을 졸업했지만 모두 제 나이를 훌쩍 넘어서 다녔다. 이 때문인지 정목사는 가난해서 배우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유난히 많은 정을 베풀었다. 자유당 때 호죽리에 헌신고등공민학교를 설립해 돈이 없어 못배우는 사람들을 가르쳤다. 당시 인가를 받기 위해 관청에 진정서를 냈는데 이 일이 나이를 먹어서도 계속 하고 있는 것이 됐다며 그는 허허 웃는다.
이어 그는 진천군 덕산면에서 염광학원을 지어 정규학교를 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모아 가르친다. 토끼풀 뜯어오는 것이 수업료 였다. 그 때 시골을 돌아다니며 ‘돈없는 사람들은 모두 와서 배우라’고 광고해서 학생들을 모집하곤 했다는 것. “지금 하는 일도 자기희생 없이는 할 수 없다. 솔직히 어떤 때는 너무 힘들어 그만두고 싶을 때도 있다. 나와 생각이 같은 사람이 3∼4명만 돼도 좋을텐데…”하는 그는 1주일에 1장씩 쓴 글을 모아 벌써 6권의 책을 냈을 정도로 정열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