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신 곽예부터 소설가 홍명희까지

▲ 정혜원 청주대 신문방송학과 4학년
충북에 살면서 한 번쯤은 ‘충북출신 위인엔 누가 있지?’하는 궁금증을 가진 적이 있을 것이다. 자신이 사는 지역의 위인들에 대해 알면 지역에 대한 자부심이 생기게 된다.

‘곽예’는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1232년 청주에서 태어났다. 호는 ‘연담’이다. 1255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좌승지, 국자감, 대사성, 문한학사 등을 역임하였다. 성품이 강직하고 소박하여 높은 지위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초심을 잃지 않았다. 글을 잘 짓고 서예에도 탁월한 능력을 보이며 독특한 서체를 이루었다고 전해진다.

일본이 웅신현(지금의 경상남도 창원)에 침입해 온갖 재물을 약탈하고 사람들을 잡아가자, 첨사부녹사로서 일본에 갔다. 그 곳에서 도둑질을 금지하고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을 돌려보낼 것을 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1286년 충렬왕 때, 황족의 생일축하 사절로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별세했다. 현재 묘는 청주시 상당구 명암동에 위치해 있으며 충청북도 기념물 제 20호로 지정되었다.

‘박연’은 1378년 지금의 영동군 심천면 고당리에서 태어났다. 조선초기의 문신 겸 음악가였다. 조선 초기의 미비했던 궁정 음악을 정비하였다. 세종이 즉위한 뒤 악학별좌(樂學別坐)에 임명되어 음악에 관한 일을 맡았다.

당시 불완전한 악기의 조율을 정리하고 악보찬집의 필요성에 대한 상소문을 올리기도 했다. 그리고 1427년, 편경 12매와 12율관에 의거한 정확한 음률로 연주토록 했다. 또한 조정 조회 때 사용하던 향악을 폐지했다. 대신 아악의 사용을 건의하여 실행토록 했다. 고구려의 ‘왕산악’, 신라의 ‘우륵’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악성(樂聖)으로 불리고 있다.

▲ ①곽예 ②박연 ③송시열 ④홍명희

1458년 별세했으며, 현재 영동군 심천면 고당리에 박연의 아호였던 ‘난계’를 따서 지은 ‘난계 국악 박물관’이 운영되고 있다.

‘송시열’은 1607년 지금의 옥천군 구룡리에서 태어났다. 호는 ‘우암’이다.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철학자이자 정치가였다. 1633년 과거시험에 장원 급제하여 생원(生員)이 되었다. 효종과 현종의 왕자 시절을 가르친 스승이기도 하다.

1658년에 이조판서로 승진하고, 효종과 함께 북벌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효종이 죽자 그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그 뒤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제기되자 기년설(만 1년)을 주장하였다. 이에 반대하고 3년설을 주장하는 남인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좌참찬 등을 역임하며 서인의 지도자로서 자리를 굳건히 하게 된다.

1689년에는 숙의 장씨가 낳은 아들(경종)의 세자책봉이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 때문에 숙종의 미움을 사게 되어 모든 관직을 삭탈당하고 제주로 유배를 가게 된다. 그리고 그 해 6월, 서울로 압송되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난다.

‘홍명희’는 1888년 괴산군 괴산읍 동부리에서 태어났다. 소설 <임꺽정>의 작가로 유명하지만 작품활동 뿐만 아니라 언론, 정치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1945년에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장을 맡으며 사회주의 운동을 했다. 1948년에는 월북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내각 부총리, 제3대 부위원장 등을 역임한 바 있다.

홍명희는 일제강점기 동안 이광수, 최남선과 함께 조선의 3대 천재로 대표되었던 인물이다. 또한 한국전쟁을 반대한 인물 중 한명이기도 했다. 1968년 3월 5일 별세하였고, 평양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었다. 현재 홍명희의 생가는 충북 괴산군에 보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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