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열고 아래로 흘러라[開門流下]

김성명 국립제주박물관장

채 피지도 못한 어린 생명들을 한꺼번에 물속에 가라앉히고 말았습니다. 생명보다 돈을 따르고 이웃을 멀리하는 우리 사회가 일으킨 대참사였습니다. 온 누리가 슬픔에 잠기고 분노합니다. 그래서 아무 일도 하시지 않은 듯 밑으로 기시면서 조용히 생명공동체 운동을 펼치셨고, 앞장서 실천하셨던 이 땅의 큰 스승 한 분을 그리워합니다.

20대에 원주에 대성중고등학교를 세운 교육자. 사람을 닮은 난초를 그린 서화가. 민주화운동가. 협동조합운동과 한살림 운동을 펼친 사회운동가. 생명사상가. 선생은 호를 무위당(無爲堂)이라 하셨습니다. 그저 ‘아무 것도 아니고, 한 일도 없다’라며 낮추신 것이지요. 나중엔 ‘좁쌀 한 알에도 우주가 있다’며 호를 ‘좁쌀 한 알[一粟子]’이라거나 ‘나는 쥐뿔도 없다’고 ‘장서각[張鼠角]’이라고도 하셨다니 그 뜻이 짐작됩니다.

선생은 길가나 골목길 허름한 담벼락 틈새의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를 부처의 어머니(百草是佛母)로 여기셨다지요. 일부러 글을 쓰지 않으셨지만, 선생을 따르던 이들이 엮고 묶어 낸 여러 책에서 그 말씀을 옮겨봅니다.

‘....... 발밑의 풀들을 보게 되지요. 사람들에게 밟혀서 구멍이 나고 흙이 묻어 있건만 그 풀들은 대지에 뿌리내리고 밤낮으로 의연한 모습으로 해와 달을 맞이한단 말이에요. 그 길가의 모든 잡초들이 내 스승이오 벗이 되는 순간이죠. 나 자신은 건전하게 대지 위에 뿌리박고 있지 못하면서 그런 얘기들을 했다는 생각에 참으로 부끄러워집니다.’

기억이 흐릿하지만… 제가 선생의 명성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어느 신문에서 군고구마 장사가 직접 쓴 ‘군고구마’라는 글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글씨’라는 말씀을 하셨다는 글귀를 읽었던 때 인 것 같습니다. 바로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추운 겨울날 저잣거리에서 군고구마를 파는 사람이 써 붙인 서툴지만 정성이 가득한 ‘군고구마’라는 글씨를 보게 되잖아. 그게 진짜야 그 절박함에 비하면 내 글씨는 장난이지. 못 미쳐.’


2010년 5월 판화가 이철수님의 제안으로 국립청주박물관과 한살림청주생활협동조합은 특별전시 ‘좁쌀 한 알에도 우주가 있다네, 무위당 장일순의 삶과 수묵전’을 마련한 적이 있습니다. 이 전시는 무위당의 글씨와 그림을 중심 삼고 지역 작가들의 작품을 보탠 뜻 깊은 전시였지요. 그 때 생명사상과 공동체를 지향하며 음(陰)으로 무한의 실천을 이어가셨던 선생을 처음 뵙고(?), 당신이 살아오신 삶과 말씀과 실천 앞에 몹시 부끄러웠지요. 전 그저 책만 읽었을 뿐 딱히 한 일이 없습니다.

5월22일, 장일순 선생 20주기

1994년 5월 22일, 선생은 뭇 생명들의 곁을 떠나셨으나 영원히 우리 곁에 살아계십니다. 올해가 20주기 되는 해입니다. 선생은 물이셨습니다. 문 열고 아래로 흘러[開門流下] 목을 적셔주고 썩거나 깨진 것들에 뒤섞여 힘을 북돋고 다시 서게 하셨습니다. 선생을 한 번도 뵌 적이 없으나, ‘죽비가 되고 경책이 되고 위로와 격려가 되는 무위당 장일순의 말씀과 그림’이 담긴 책들을 알려드립니다.

<나락 한알 속의 우주>(장일순, 녹새평론사),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김익록 엮음, 삼인), <좁쌀 한 알 장일순>(최성헌 글, 도솔), <무위당 장일순>(이용포, 작은씨앗),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이야기>(이현주 목사, 삼인), <조 한 알 할아버지>(장미라, 웅진주니어), <좁쌀 한 알에도 우주가 담겨있단다>(김선미, 우리교육), <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무위당을 기리는 모임, 녹색평론사) 이 가운데 다시 한 구절 뽑아봅니다.

‘우선 자신이 잘못 살아온 것에 대해 반성하는 고백의 시대가 되어야 합니다. 넘어진 얘기, 부끄러운 얘기를 하자는 겁니다. 실수하고, 또 욕심 부린 얘기, 그래서 감추고 싶은 얘기를 고백하며 가자는 거지요. 지금은 삶이 뭐냐, 생명이 뭐냐 하는 것을 헤아려야 하는 시기입니다. 뭘 더 갖고, 꾸며야 되는냐에 몰두하는 시대는 이미 절정을 넘어섰어요. 글 쓰는 사람들이 가급적이면 고백의 글을 많이 써 줬으면 좋겠어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경쟁 속에서 고단한 삶을 이어가는 우리의 일상입니다. 그나마 우리 곁에 사랑하는 가족과 따뜻한 이웃들이 있어 다행입니다. 또 해와 달과 별과 바람이 있고, 나무와 새와 풀과 꽃들이 있어 상처를 씻고 위안을 받습니다. 점점 더 어려워지는 세상살이. 지금부터라도, 이 땅의 사람들이 선생이 남기신 원주 대성학교 교가의 한 구절처럼 ‘... 희망을 키워라 세상을 위하여… 이상을 닦아라 인류를 위하여’ 열심히 살아, 우리의 일상이 생명공동체의 울타리 안에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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